서문

‘식인‘이라는 은유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굳이 지금이 혼란기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난마처럼 서로 얽힌 미래의 위협과 현재의 참사에 이미 익숙해져 있으며, 실은 이로 인해 이미 요동치고 있다. 부채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노동은 불안정하며, 생계는 위협받고 있다. 공공 서비스는 퇴보하고, 인프라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며, 국경 감시는 더욱 가혹해진다. 거기에다 인종화된 폭력, 생명을 위협하는 팬데믹, 극단적인 기후까지 엄습한다. 그리고 그 해법을 상상하거나 실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정치의 기능 장애가 이 모두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중에서 처음듣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으므로 여기에서 굳이 장황하게 부연할 필요는 없겠다. - P15

‘식인[동족포식]cannibalism‘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가장 익숙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라는 것이다. 기나긴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이 말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는데, 실은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유럽 제국주의의 식인적 약탈의 희생자들이었다. 따라서 이책에서 ‘식인종‘을 자본가 계급을 묘사하는 말로 다시 불러내면서우리는 얼마간 복수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 집단이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좀 더 추상적인 의미도 있는데, 여기에는우리 사회를 둘러싼 더 심층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cannibal-ize‘‘라는 동사에는 ‘어떤 설비나 사업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이나 부서를 떼어내 다른 설비나 사업을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 쓴다‘는 파생적 의미도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자본주의 경제가 시스템 내부의 ‘비경제적‘ 주변 영역과 맺는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 관계란,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채우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 생활 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빨아먹어 버리는 현실이다. - P16

‘자본주의capitalism‘ 역시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단어다. 보통이 말은 사적 소유, 시장 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을 일컫는 데 쓰인다. 그러나 이정의는 너무나 협소하여, 시스템의 참된 특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모호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더 커다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 때 좀 더 쓸모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더 커다란 무엇‘이란, 이윤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 질서를뜻한다. 자연과 예속민subjects 으로부터 수탈한 부, 오랫동안 가치를 무시당해온 다양한 형태의 돌봄 활동, 자본이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감축하려 드는 공공재와 공적 권력public power, 노동 대중의 열의와 창의력 등이 그런 경제 외적 기둥에 해당한다. 이런 형태의 부는 기업 회계장부에 표시되는 이윤과 수익의 필수 전제조건이지만, 정작 회계장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축적의 핵심 기반인 이런 형태의 부 역시 자본주의 질서의 구성적costitutive 요소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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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진호그룹 회장 장남, 미국에서 숨진 채 발견
기사입력 20XX-08-29 14:31

(서울=연합뉴스) 재계 서열 6위인 진호그룹 박주영 회장의 장남인 선우(29·사진)씨가 24일 미국 필라델피아 자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그룹 관계자가 밝혔다.
이 관계자는 "박 회장 내외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MBA 유학 중이던 선우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급히 출국했으며 27일 현지에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우 씨의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선우 씨의 장례식에는 박 회장 부부와 장녀인 아영 진호C&I 상무보, 차남 병우 씨등 직계 가족들만 참석했으며, 주검은 화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 P9

찰스 맨슨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젊은이를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나그네들의 주장이 어설픈 추종자들을 낳은 원인에 대해 히피즘이라는시대적 배경을 지적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멀쩡한 젊은이들을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를 만큼 광적인 정신 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런 비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우리는 히피즘보다 더 거대한 정신적 유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월드‘를 살고 있다고.
그런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 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게 아닌가.

찰스맨슨보다 몇 배 더 교활하고 야심이 컸던 세연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순교자를 아무렇게나 고르지 않았다.
나와 휘영, 병권은 결코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사이비종교에 빠질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나는 20XX년 3월 A대학 경영학과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가 있던 날 밤, 세연을 처음 만났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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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술꾼들의 모국어

재작년에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내고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 P7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P26

김밥은 너그러운 음식이다. 김과 밥만 있으면 나머지재료는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김밥은 아름다운 음식이다. 재료의 색깔만 잘 맞추면 이보다 어여쁜 먹거리가없다. 그래서 김밥에는 꽃놀이와 나들이의 유혹이 배어있는지 모른다. 지참하기 간단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꽃밭을 닮아서.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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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가면서 독창적인 레시피를 아주 많이 만들고 싶다. 그중에서 괜찮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좋아하는 상대든 거북한 상대든, 만난 적 없는 상대는 상관없다. 그 사람도 리카의 레시피를 응용해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겠지. 자신이 느낀 마음의 흐름이나 기쁨을 누군가가 경험해준다면, 그것만으로 리카의 가슴은 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고안한 이름 없는 무언가가 색과 형태를 바꾸면서 세상에 파문처럼 번지면 좋겠다. 수프에 마지막으로 넣는 한 방울의 숨은 맛처럼, 그런 연쇄 작용을 마음 한편으로 희미하게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가지이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세상은 살아갈, 아니, 탐욕스럽게 맛볼 가치가 있어요, 라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신경써서, 음식으로 탈난 사람도 없이 끝까지 해냈다는,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성취감으로 몸이 기분좋게 가라앉았다. 이것으로 지난 나흘간의 수고를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리카는 자기 냄새가 밴 여름용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몇 개의 벽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재생해가는 부녀의 기척을 느끼면서.
전부 다 먹어치워서 이제는 뼈만 남았다.
리카는 눈을 감고 냉장고 안의 그 멋진 적갈색 뼈, 그리고 내일 아침에 할 요리 순서를 떠올리면서, 오랜만에 속이 꽉 찬 잠에 빠져들었다. -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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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말이야, 요리교실에 다니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콤플렉스 탓이 아닐까? 혜택받은 여자들이라는 이미지를 멋대로 떠올리면서 다들 질투한 거지."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런 편견이 있었을지 몰라. 뭔가 깨달은게 있어. 최근에 약간이지만 요리를 하게 된 뒤로 청소나 요리는 로큰롤이더라. 사랑이나 다정함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건 힘이랄까..... 일상을 무디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투지랄까......." - P469

"나는 ‘언젠가‘, 시간을 듬뿍 들여서 칠면조구이를 할 거예요. 나의 즐거움을 위해."
리카는 이제 공격을 멈추기로 했다.
"난 당신이 특별히 가엾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친구가 없는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생각해봤어요. 내가 만약 칠면조를 굽는다면 열 명이나 손님을 모을 수 있을까 하고. 교제 폭이 좁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사는 맨션에는 그렇게 큰 오븐이 없고, 열명씩 들어갈 만큼 넓지도 않아요. 의자도 그릇도 부족해요. 봐요. 나도 못 하잖아요. 간단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예요. 그러나내가 넓은 집을 얻게 된다면, 사람을 모을 수 있다면, 해볼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만약 당신의 혐의가 벗겨져 석방된다면."
잠시 머뭇거렸지만, 리카는 과감하게 말하기로 했다. 야마무라씨가 소개해준 공원 앞의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의 칠면조구이를 먹으러 와주세요. 꼭."
가지이 마나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그 일그러진 웃는 얼굴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도움닫기였음을 리카는 안다.
거짓으로 우는 게 아니었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연신 쏟아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붉게 충혈된 눈과 부은 눈두덩, 굵은 눈물이 뭉개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듯이 오열했다.
만약 아크릴판이 없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가방 속의 손수건을꺼내 주었을 것이다. 가지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타월지 손수건이라 아주 조금 부끄럽지만, 다음 휴일에는 백화점에라도 가서 가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우아한 꽃무늬 손수건을 몇 장 사야겠다.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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