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원(얼마 전 폐병으로 숨진 어느 중등학교 보조교사한테 얻음)

얼굴이 창백한 보조교사였다. 코트도 마음도 몸도 두뇌까지도 너덜너덜해진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는 언제나 낡은 사전과 문법책을내놓고, 세상에 알려져 있는 모든 나라의 화려한 국기가 요란하게 그려진 이상한 모양의 손수건으로 먼지를 떨어내고 있었다. 그는 낡은 문법책의 먼지를 떠는 일을 좋아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생각하는 듯했다. - P11

제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거나 장례 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서 따라갈 때, 특히 심기중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카토‘는 철학적 미사여구를 뇌까리면서 칼 위에 몸을 던졌지만, 나는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 P31

앞갑판에는 건강에 좋은 운동과 맑은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와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의 격언을 어기지 않는다면 앞에서 불어오는맞바람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훨씬 우세하고, 따라서 뒷갑판에 있는선장은 대부분 앞갑판의 일반 선원들이 마시고 뱉은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게 된다. 선장은 자기가 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사에서도 지도자가 모르는 사이에 일반대중이 지도자를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상선 선원으로서 여러 번 바다냄새를 맡아본 내가 이제 와서 고래잡이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은 무엇때문일까? 이 의문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의 여신들이 보낸 경찰관,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나를 미행하고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경찰관이다.
내가 이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신의 섭리에 따라 오래전에 작성된 웅대한 프로그램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것은 좀 더 긴 연극사이에 끼여 있는 일종의 짧은 막간극이자 일인극이었다. 그 연극 프로그램에서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 아무개의 고래잡이 항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을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알 수 없지만,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면 교활하게도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 앞에 나타나 그 역할을 맡게 한 여러 가지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알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것들은 나를 속여서, 내가 확고부동한 자유의지와 뛰어난 판단력으로 그 역할을 선택했다는 망상에 빠뜨렸다. - P36

하지만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유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그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게 분명하다. - P63

나는 엄격한 장로교회의 품에서 태어난 자란 어엿한 기독교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야만적인 우상 숭배자와 함께 나무토막을 숭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숭배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했다. 이슈메일, 너는 지금 하늘과 땅-이교도를 포함하여-을 주관하시는 관대하고 고결한 하느님이 하찮은 나무토막에 질투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숭배란 무엇인가? 신의 뜻을 행하는 것-그것이 숭배다. 그러면 신의 뜻은 무엇인가? 이웃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는 것-그것이 신의 뜻이다. 이제 퀴퀘그는 내 이웃이다. 나는 이 퀴퀘그가 나한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 나와 함께 장로교회의 특정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도 그의 예배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대팻밥을 태우고, 그 가련한 작은 우상을 세우는 것을 거들고, 퀴퀘그와 함께 태운 건빵을 우상에게 바치고, 우상 앞에서 두세 번 절을 하고, 우상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일이 끝나자 우리는 옷을 벗고, 우리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아무 거리낌 없이 침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약간의 잡담을 나누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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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네덜란드를 상대로 종교를 탄압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만든 조항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결정은 네덜란드의 경제 번영에 ‘신의 한수‘가 됩니다. 유럽 곳곳에서 신앙을 억압받던 이들이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모여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네덜란드로 모여든 종교적 난민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렀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주민의 대부분이 상인과 기술자였다는 겁니다. 이른바 전문직 이주민이 암스테르담, 델프트, 하를럼으로 속속 모여들면서 북부 도시는 단기간에 유럽 최고의 상공업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 난민과 이주민이 모여들면서 암스테르담은 1550년 3만 명에서1650년에는 20만 명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반대로 남부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은 같은 시기 8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급감합니다.

종교정책 때문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군요.

늘어난 인구에 힘입어 북부 네덜란드는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는 조치를 마련해 단숨에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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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자신의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자기를 둘러싼 어른들이 세파에 휩쓸려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 P179

그렇게 해서 교문을 나오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버렸는데 장미다발을 든 순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어서 이런 마중이 개가준비한 생일 이벤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황스러운건 내 마음이었다. 나에게는 심한 거부감, 당혹감 같은것이 일었다. 그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느라 순신이 입고 있는, 학교 이름이 또렷하게 박힌 교복 때문이었다는것을 지금도 아프게 기억한다. 그래서 웃으며 반겨주지못했다는 것을. 미소가 서서히 가시며 순신은 내 표정을 살폈다. 지금도 가끔 기억 속으로라도 손을 내밀어 안쓰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촌애라 공돌이랑 연애하네."
빽이 큰 소리로 말하며 지나갔고 나는 손을 뻗어 걔의 가방손잡이를 확 잡았다. 빽은 뒤가 들린 채 어어, 하다가엉덩방아를 찧었다. 리사는 가만히 서서 사태를 지켜볼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씨발년아, 말 곱게 해라."
그렇게 쏘아붙이고 돌아서자 당황한 순신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쫓아왔다. - P199

마리코 히메는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뛰었다. 여름 해도 다 졌으니 아홉시가 곧 다가올 것이었다. 쿠마 센세이를 끄집어내서 그 등을 타고 멀리멀리 가버릴 테다.
일단 우리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주어야지, 쌀만두를 쪄서 같이 먹어야지. 마리코 히메가 호미로 자물쇠를 내리치자 동물사의 동물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도망쳐!"
나 마리코 히메는 열심히 알렸다. 그 소리를 듣고 정작 갇힌 동물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경비원에게 마리코히메만 쫓겼다. 큰물새우리 근처에 숨었다가 쿠마 센세이에게 갈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모기 떼가 감히 나마리코 히메의 다리를 물어대는데도 기다렸다. 폐장한 창경원 안으로 총을 든 엽사들이 오가는데도 기다렸다.
이윽고 아홉시가 되었는지 고무장화를 비롯한 여러그림자들이 돌아다니며 동물 우리 안으로 고구마를 던졌다. 얼마 지나자 그것을 먹은 들소가 캥거루가 하마가 멧돼지가 타조가 사지를 떨며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왕의 마부였던 시절부터 길렀던 제주 말의 자손들을 죽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바로 죽지 않는 동물은 그림자들이 직접 들어가 해결했다.
"약이 모자란지 안 죽는데, 이봐, 창을 가져와 내가 찔러볼 테니."
쿠마 센세이 앞에서 오니 아이가 말했을 때 나 마리코 히메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대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기절해버렸다. - P232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던 곳이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의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별처럼 느껴지는 집. 나는 잎을 다떨구고 가지를 층층이 올려 나무로서 강건함을 띠는 벚나무를 올려다보다가 기쁘게 뒤돌아 다시 섬으로 향했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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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 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 개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본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 P156

"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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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의 글은 황교통(黃橋通), 곧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의 출근길을 회상하며 시작했다. 열여섯 소년은 냉맥주와 냉사이다를 파는 노점들을 통과해, 복숭아와 하귤을 문전에 늘어놓고 유람객과 총독부 의원의 손님들을 호객하는 장사꾼들을 지나 궁으로 들어온다. 가슴에는 이름표와 표찰이 달려 있고 갈색 작업복을 입었다.
출근부에 사인을 하지만 사무소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의 자리는 대온실부터 붉은사슴, 영양, 노루, 얼룩말들이 있는 동쪽 초식동물사까지 전체이니까. 궁에는 하루도 조용한 아침이 없었다. 홍화문을 들어서자마자 동물 소리가 포획하듯 귀를 덮었다. 귀 있는 사람이라면 듣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대만, 일본, 히말라야, 필리핀,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수십마리의 원숭이가 노는 소리, 제주 말과 요크셔 돼지들이 우는 소리, 삶과 늑대가 목적 없이 위협하는 소리, 동양 최대의 큰물새우리에서 들려오는 두루미와 흑고니, 왕관앵무와 펠리컨과 청둥오리, 가마우지 같은 새들의 지저귐, 노천방사장을 나는백여종 새 떼의 날갯짓, 그 모든 것이 동물사 냄새와 함께 아침을 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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