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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 - P7

이진오가 한달 전 깊은 밤중에 기어오른 이곳은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아파트 십육층과 엇비슷할 것이다. 요즘 아파트 건물이 보통 이삼십층 높이라서 그에 익숙했던 탓인지 이 굴뚝 위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간이 좁고 사방이 휑하니 열려 있어서 처음에는 난간 너머 허공으로 걸어나갈 뻔했다.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이고 주위를 두른 둥근 테라스의 폭은 일 미터, 그리고 원둘레를 걸으면 이십보쯤 될 것이다. 아니, 거기서 그가 잠자는 공간을 빼야 하니까 열여섯걸음쯤 될 게다. 이미 다른 도시의 크레인에 올라갔던 이들이 있어서 생존하는 방법은 학습이 되어 있던 터였다. 이진오도 잘 아는 용접공 영숙이누나는 농성할 때 크레인의 운진실을 숙소로 삼았고 철탑 기둥들사이에다 토마토며 화초를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 거대한 조선소의 철탑이 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거대한 쇳덩어리에 올라앉은 작고 여린 살아 있는 몸을 쇠의 부속품처럼 물질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건너편 다른 크레인들이 모두 활엽수로 변하고 바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진오는 그녀처림이 굴뚝을 무엇인가 근사한 조형물로 바꾸지는 않았다. - P8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연둣빛 어린 떡잎으로 자라나 쑥쑥 커진 잎사귀들은 녹색이 짙어지고 윤이 나면서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 P31

올라온 저녁밥을 텐트 안으로 상반신만 들이밀고 먹었다. 우비의 모자에서 떨어진 빗물이 밥과 찌개 위로 흘러내렸다. 밥 바구니를 내려주고 난간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천천히 걸음을떼어놓으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 P33

갑자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철도 연변의 드넓은 논밭과 삼림과 마을이 갑자기 징발되었다. 일본과 한국 정부가 협정을 맺었다지만 이미 국권을 잃기 시작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거의가 일본의 앞잡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철도회사는 철도 연변의 땅들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을 철도의 부속 대지로지정했다. 처음에는 거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보상을 해주는 척하다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군대가 직접 정발하기 시작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기사들과 그 아래 청부를준 일본의 토건회사들과 철도 노동자가 일본군을 앞세우고 공사에 필요한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삼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경부철도를 놓는과정 자체가 개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본의 열악한 자본의 열세를 철도부지의 약탈로 만회해갔던 과정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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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가지 선물은 자살하신 할머니 사진이었어요. 나는 그 선물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할머니는 아름다우셨어요. 시선을 내리깐 옆모습이었죠. 삼십대 초반의 모습일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흑백사진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사진을 연푸른색 대지에 붙이고 은색액자에 끼워 내게 선물하신 거지요. 어머니께서 내가 앉아 있는 의자로 다가오시더니 왜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때문에 우느냐고 하셨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할머니는 나와 같은 병을 앓으셨어요.‘ 난 지금도 울고 있어요. 슬퍼서가 아니라 감격해서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수술 덕분에 살고 있는 거니까. 부모님과 의사들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항상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지만요." - P271

만일 인간 게놈이 3만 개가량의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면(점점 더 많은 유전자들이 발견되면서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각 유전자마다 열 가지 정도의 중요한 변이들이 있다면 질병에 대한 유전적인 취약성을 유발하는 후보자 수는 100,000 개가된다. 일부 유전자를 밝혀내는 시점에서 그 유전자들이 상이한 환경적 자극들에 대하여 상이한 단계들에서 상이한 조합들을 이룰 때 어떤 상이한 결과들을 내는지 모두 밝혀내는 시점까지는 얼마나 먼길일까? 모든 조합의 가능성들을 확인하려면 무지막지한 분량의 작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다양한 외부 상황들에 적용해 보는 절차도 필요하다. 컴퓨터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이 모든 것을 밝혀내려면 아직 요원하다. 인간의 모든 질병들 중에서 우울증은 지나치게 속단된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나는 유전학자는 아니지만 우울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자 수는 최소한 수백을 넘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유전자들이 외부 자극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울증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우리 몸에 유익한 기능들도 수행할 것이므로 파괴해 버린다면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될 것이다. 유전자 정보가 특정한 종류의 우울증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겠지만 유전자 조작을 통한 우울증의 근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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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서양 사람들이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그들과 함께 곳곳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그때 문득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북쪽 방향을 향해 설치되어있는 커다란 위성 수신 접시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는 미국 방송의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일하는 관계자들을 위한 일종의 휴게실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 사람들의 현재 삶은 여러가지 퍼포먼스로 보여 준 전근대적 삶과 같다고 말할수 있을까? 그보다는 글로벌화의 영향권에 들어와 혼종문화를 만들어 가는독특한 삶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근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하기 쉬운 지구 한구석의 토착민들도 자본주의 경제의 글로벌화에 편입되어 우리와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순수한 자급자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던 전통문화는 사실상 거의 사라져 버렸고, 시장경제가 지구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이제 그들도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아마존 원주민들이나 뉴기니의 토착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문화 퍼포먼스를 택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옷을 벗고 때로는 진지하게또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조상들의 과거를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하며 자본주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P161

소림 말고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객들의 생각과 행동은 인공조미료를 싹 뺀, 투박하면서도 담백한 자연의 맛과 같았다. 장거리 여행에 익숙한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멍하니 시간 때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또 표피적인 웃음기를 뺀 무뚝뚝한 표정과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절제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관심사가 통하기라도 하면, 마음속 깊은 곳의 친절과 호의를 꾸밈없이 표출했다. 이런 그들과 대화할 때는 더들더듬 짤막한 러시아어와 영어를 섞어서 주고받아 보지만 한계가 있기는 했다. 오히려 각자의 언어로 조잘거릴 때 신기하게 소통이 잘 됐다. 눈빛으로, 손짓으로, 살가운 어깨동무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훈훈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이는 그동안 그런 방식의 친절과 호의에 익숙하지 않던 내가 느끼는 부담감일 뿐이었다.
열차는, 특히 야간열차는 사람 냄새를 맡고 서로 소통하며 이해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객차 안 개방된 공간에서 며칠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각별하고도 편안한 느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자석처럼 붙었다가 천천히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는 차창 밖 풍경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것도, 시베리아 벌판을 붉게 물들이는 어슴새벽이나 해거름을 보며 쓸쓸한 마음을 느끼는 것도 모두 선택 사항일뿐이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함께하고 있어 이 세상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 P176

아프리카에도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희한한 지명들이 많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잠비아 짐바브웨접경지대의 빅토리아폭포Victoria Falls는 유럽인으로는 처음 그곳에 도착한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이름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엄연히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마치 하얀 도화지같이 비어 있는 땅으로 인식했다. 그러니 처음 도착한 땅에자기 마음대로 지명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 원주민인 칼롤로로지족에게 그 폭포는이미 신성한 ‘모시-오야툰야‘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이었다. 참으로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지명이 아닌가?
지도를 펼쳐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기니Guinea 만도 살펴보자. ‘상아해안‘ ‘설탕 해안‘ ‘후추 해안‘ ‘노예 해안‘ 등 희한한 지명들이 붙어 있다. 이곳에 있는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라는 이름의 국가는 또 어떠한가.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이 국가명을 영어로 옮기면 ‘상아 해안‘을 뜻하는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가된다. 상아해안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별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중동이니 극동이니 하는 지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유럽 중심적인 지명이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를 볼때 가장 가까운 곳인 터키반도 일대가 근동Near East, 중간쯤은 중동Middle East, 가장 멀리 우리가 속해 있는 동북아시아 일대가 극동Far East이기 때문이다. 유럽으로부터의 거리를 기준으로 붙인 그들 중심의 지명들이 지금도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 P188

여행지는 현지인의 삶의 터전이지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현지인은 여행자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터를 소중하게 품고서 열심히 살아간다. 여행자가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를 일탈의 행복과 새로움의 추구를위한 대상으로 잠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현지인은 일상의 행복을 가꾸면서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으로써 그곳을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소중한 곳에서 여행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여행지와 현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예의가 필요하다. - P199

그런데 이내 나는 그 아름다운 피오르의 마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 속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부풀어 오른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페리가 속도를 늦춰 아름다운 마을 레이캉에르Leikanger의 선착장에 정박하자, 곧이어 마을 주민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목적을 이루고자 베르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배는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용 페리인 동시에 대중교통, 즉 우리로 따지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완행 시외버스였던 것이다.
물론 탑승객의 수를 비교해 보면, 관광용 페리로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대중교통용 여객선으로 이용하는 주민보다 훨씬 큰비중을 차지했다. 더군다나 여행자들은 큰돈을 들여 먼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지인이 누리는(누려야 할 ‘삶터‘에서의 권리보다 여행자들이 누리는(누려야 할) ‘여행지‘에서의 권리가 더 크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는 숫자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또 비용 지불의 여부와 상관없이 여행지에서 늘 손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잠시 방문하는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 잘 유지되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여행자들의 책무다. - P201

그러나 수용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관광객이 몰려오면 그곳을 삶터로 삼고 있는 주민들은 전에 없던 불편함을 겪게 된다. 이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혹은 과잉관광이라고 한다. 관광객의 증가로 인한 소음 증가, 쓰레기 증가, 교통 및 주차 혼잡, 환경파괴, 물가와 주거비 상승, 지역정체성 혼란 등이 주민들의 삶터를 열악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때로는 관광혐오, 즉 투어리즘포비아 tourism phobia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외래투기 자본의 유입으로 주거지와 상가의 임대료가 과도하게 높아져 원래의 주민들이 자신의 삶터를 떠나기도 하는데, 이를 투어리스티피케이션 touristification이라고 한다. 도시 내 특정 지역이상업화되고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현지인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삶터를 떠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과도한 관광지화touristify와 관련해 발생할 수도 있음을 나타낸 용어다. - P203

이처럼 도움의 손길에 어려움이 해소되는 경험을 할 때마다나는 여행자야말로 정말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지인들 역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면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장소에서만큼은 어리숙한 이방인 여행자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여행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 않다면 현지인에게 공손한 자세로 마음을 열어 보자. 그들은 우리의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여행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들 역시 경계를 풀고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다. - P212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지인과 여행자 간의 오가는 시선이 서로 불편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이 내가 원하지 않는 혹은 예상치 못한 시선이라면 불쾌한 감정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현지인도 같은 시선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불쾌한 감정을 갖는다.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을 향한 선진국 사람들의 응시의 권력, 즉 위험한 식민주의적 세계관은 그들에게 커다란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 P216

여행 중에는 몸으로 전해지는 다채로운 느낌들 그리고 순간순간 번득거리는 앎의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몸속에서 과포화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크고 작은 느낌과 생각은 정제되지 않으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느낌과 생각이 소중하다면, 그래서 몸속에 오래 붙들어 두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면 부지런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 P233

일상을 떠난 경계 너머로의 여행은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기간 동안에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여행은 인생의 긴 여정과 비교해 본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여행이주는 재미와 의미는 한순간의 거품처럼 일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것들이 아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되어 화석처럼 남겨지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거름이 된다. 그래서나는 오늘도 떠남의 설렘을 안고 지리를 공부한다. 그렇게 항상 여행을 준비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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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05년 5월 2일 월요일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칼손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 곡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그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사실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날 알란은 백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백회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양로원 라운지에서 한 시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시장도 초대되었고, 한 지역 신문도 달려와 이 행사를 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노인들은 모두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기다리는 중이었고, 성질머리 고약한 알리스 원장을 위시한 양로원 직원 일동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파티의 주인공만이 불참하게 될 거였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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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처음 정신약리학 전문의를 찾은 후로 나는 약 게임을 펼쳐 오고 있다. 나는 정신 건강을 위해 졸로프트, 파실, 나반, 이펙서, 웰부트린, 세르존, 부스파, 자이프렉사, 덱시드린, 자낙스, 발륨, 암비엔, 비아그라를 다양한 혼합과 복용량으로 먹어 왔다. 처음 시작했던 계열의 약들이 반응이 좋았으니 나는 운이 좋은 셈이다. 그렇지만 실험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증언할 수 있다. 다른 약들을 시도하다 보면 자신이 다트 판이 된 듯한 기분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요새는 우울증도 완치될 수 있어요. 당신은 두통이 날때 아스피린을 먹듯이 항우울제를 먹는군요." 그건 틀린 말이다. 아직 완치는 시기상조이며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은 암 환자가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것과 같다. 그런 치료들은 어쩌다 기적적인 결과를낼 수도 있지만 치료 과정이 쉽지도 않고 결과도 일정하지 않다. - P194

우울증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연구는 네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예방 치료로의 전환인데 정신 질환의 경우에도 문제를 조기에 발견할수록 치료가 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약의 특수성 강화다. 뇌에는 최소한 열다섯 가지 이상의 세로토닌 수용체가 존재한다. 항울 효과는 이 중 단 몇 가지에만 의존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며 SSRI 계열 약들의 많은 부작용들은 그 외의 수용체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는 효과가 더 빠른 약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생리적 위치보다는 증세에 대한 특수성을 높여서 약을 고르기 위해 시험적으로 써 볼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울증의 유전적 아류형을식별할 수 있는 표지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각 아류형에 맞는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 몸담은 적이있는 윌리엄 포터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치료 약물들은 작용 방식이 너무 간접적이기 때문에 통제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수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분장애는 단일한 유전자의 단일한 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들이 조금씩 위험성을 보태다 외적인 상황에 의해 그 총합적인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 P195

작가인 마사 매닝은 우울증과 ECT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놀라울 정도로 유쾌하고 아름다운 저서 「암류(Undercurrents)』에 담았다. 현재 그녀는 웰부트린과 소량의 리튬과 데파코트, 클로노핀, 졸로프트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약들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지개를 손에 넣은 것 같다. 나는 만기일도 없는 과학 연구물이다." 그녀가 농담처럼 한 말이다. 그녀는 우울증이 극에 달했을때 장기간 강렬한 ECT를 체험했다. 그녀는 자살을 하려고 총포사주소를 뒤지다가 치료를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를 증오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 고통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기에 죽고 싶었다. 나는 날마다 욕실 문에 기대어 서서 딸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딸은 그때 열한 살이었는데 샤워할 때면 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면 하루 더 자살을 미룰 수 있었다. 문득 내가 자살한다면 그 아이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게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음은 딸아이를 침묵하게 할 것이다. 바로 그날 ECT를 신청했다. 그건 나를 쓰러뜨린 상대에게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몇 주 동안 ECT 치료를 받았다. 숙취감과 두통에 시달리며, 다이어트 콜라를 찾으며." - P197

그녀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약의 도움 없이 해냈지."
함께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건 완전히 미친 짓이야. 나는 그렇게 미친 소리는 처음 들어, 자기 인생에 그런 짓을 하다니 너는 미친 게 분명해." 그가 한 말이었다. 당신을 미치게 하는 행동들을 피하는 것이 미친 짓일까? 아니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삶을 견딜 수 있도록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미친 짓일까?
나도 삶의 질을 낮추고 하는 일을 줄일 수도 있었다. 여행도 줄이고,
아는 사람들도 줄이고, 우울증에 관한 책도 쓰지 않고..  그런 식으로 살았다면 약물치료가 필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견딜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살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우선적으로 선택한 방법이 아니었지만 분명 합리적인 방법이다. 우울증을 안고 사는 것은 염소와 춤을 추며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균형 감각이 뛰어난 상대를 선호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모험과 복잡한 일투성이인 내 삶이 너무도 만족스러우며 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친구들을 반으로줄이느니 차라리 약을 세 배로 늘리겠다. 유나바머 [20여 년간 연쇄폭탄 테러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한 극단적인 문명 혐오론자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별명]는(그의 표현 방식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기계 문명의위험성에 대한 통찰은 훌륭하다.)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들을 강요한 다음 불행한 느낌을 제거하는 약들을 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항우울제는 환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내면의 상태를 조절하는 수단이다." - P203

우울증에 빠졌을 때는 자신이 잿빛 베일을 쓰고 저조한 기분이라는 베일을 통해 세상을 보는 거라는 생각은 못 하지. 오히려 행복의 베일이 벗겨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진실은 고정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실을 핀으로 꽂아 놓고 분석해 보려고 하지만 진실은 살아 움직이는 거야. 자기 안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붙은 악마를 쫓아내 줄 수 있지.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은 다루기가 더 힘든 것이, 자기가 진실을보고 있다고 믿거든. 하지만 진실은 거짓말을 해.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이혼했어.‘라고 생각하면 그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일처럼 여겨지지. ‘나는 이혼했어!‘라고 생각하면서 근사한 해방감을 느낄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 고통 속에서 정말 도움이 된 말이 있었지. 한 친구가 한 말인데 바로 이거야. ‘앞으로 계속 이렇지는 않을 거야. 그걸 기억할 수 있는지 봐. 지금은 이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렇지는 않을 거야.‘ 그 친구는 이런 말도 했지. ‘그건 우울증이 말하는 거야. 우울증이 너를 통해 말하는 거야.‘ 이 말도 도움이 됐어." - P210

이렇게 우울증을 예방하는 식품들이 있는가 하면 우울증을 유발하는 식품들도 있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밀 알레르기를 갖고 있고 많은 미국인들이 옥수수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음식 박사의 저자 비키 에지슨의 설명이다. 음식 알레르기도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물질들이 뇌의 독소가 되어 온갖 종류의 정신적 고통을 촉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과 탄수화물의 과잉 섭취로 인한 만성피로 증후군의 일환으로 우울증 증세들을 겪고 있다. "단것과 정크 푸드 [칼로리는 높고 영양가는 낮은 식품]로 끼니를 때워 종일 혈당량이 아래위로 요동친다면 당신은 수면 장애를 겪게 된다. 이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능력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인내심과 아량까지도 제한한다. 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늘 피로하고 성욕도 잃게 되며 온몸이 아프다. 신체 조직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셀리악병 [소장에서 발생하는유전성 알레르기 질환]을 일으키며, 일반적으로 성장 장애가 일어난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커피가 에너지를 준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실 커피는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불안 반응을 자극한다. "물론 알코올도 인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우울증은 우리의 몸이 그만 혹사시키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몸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 P228

우울증의 주요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수면 장애여서 우울증이 심각한 사람들은 깊은 잠을 전혀 자지 못하거나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울증 때문에 수면장애가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우울증의 한원인이 되는 것일까?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슬픔도 수면 장애를 일으키고, 조증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랑에 빠지는 현상도 다른 방식으로 수면을 방해합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 토머스 웨어의 지적이다. 우울증이 아닌 사람들도 한밤중에 공포에 휩싸여 잠이 깰수 있으며 대개 금세 지나가는 그 공포와 절망의 상태는 건강한 사람의 가장 근접한 우울증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침에는 상태가 악화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진다. 토머스 웨어는 통제된 수면 박탈로 우울증의 일부증세들을 완화시켜 주는 일련의 실험들을 실시했다. 이 방법은 장기적인 용도로는 실용성이 없지만 항우울제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환자들에게는 유용할 수 있다. "수면을 억제함으로써 시간의 경과에 따른 호전 현상을 연장시킬 수 있어요. 우울증 환자들은 잠의 망각을 추구하지만 사실 우울증은 잠 속에서 유지, 강화되지요. 밤중에 어떤 마귀들이 찾아와 그런 현상을 초래하는 걸까요?"
토머스 웨어의 말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붕괴라는 작품에 이렇게 썼다. "새벽3시만 되면 소포 하나를 깜빡 잊은 것이 사형 선고처럼 심각해진다. 약도 듣지를 않는다. 날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영혼의 칠흑 같은 밤이 찾아든다. "‘ 그 새벽 3시의 악마가 내게도 찾아왔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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