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문을 닫자, 펄롱은 표면이 반들반들 닳은 화강암 디딤돌을 내려다보며 신발 바닥을 갈듯 그 위를 가로지르고는 고개를 돌려 어둑한 마당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둘러보았다. 마구간과 건초 헛간, 외양간, 말 여물통, 어릴때 펄롱이 놀던 과수원으로 나가는 연철 대문, 곡물창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뜬 돌길.
펄롱이 트럭에 올라타 문을 닫기 전에 마당 불이 꺼졌고공허함이 펄롱을 덮쳤다. 한동안 펄롱은 그대로 앉아 굴뚝통풍관보다 더 높이 솟은 헐벗은 나무 우듬지, 바람에 움찔거리는 나뭇가지를 지켜보다가, 갈색 종이로 손을 뻗어 민스파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거의 반 시간 정도, 어쩌면 더오래 그렇게 앉아서 여자가 한 말, 닮았다는 말을 곱씹어보며 생각 속에서 불을 지폈다. 생판 남을 통해서 알게 되다니. - P98

한참 뒤 위충 커튼이 움직이더니 어린아이가 밖을 내다봤다.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펄롱은 대화에 끼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다른 생각을 했고 상상에 빠졌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들이 더 왔고, 긴 의자에서 옆으로 이동한 펄롱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며 네드와 닮은 데가 있는지 찾았다.
닮은 데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윌슨네 집에 있던 여자가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고 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P110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월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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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있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그 애들 부모는 애들을 멋대로 풀어놨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모른 척 등을 돌려버렸겠지. 자식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펄롱이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랬다면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아일린이 말했다. "그 큰 집에서 연금 받으면서 편히지내는 데다가 농장도 있고 일은 당신 어머니하고 네드가 다 해줬는데.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아니었냐고."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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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 P11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 P20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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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모코토 학살 소식이 키갈리에 돌기 시작하면서 만나는 르완다 정부관리마다 한결같이 분노했다. 그들은 내게 만약 자이르가 조상이 르완다인이라는 이유로 자국의 투치족을 추방했다면 르완다인을 조상으로 둔자이르 르완다의 후투족은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어째서 멀쩡하냐고 물었다. 이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이렇게 말했다. "제노사이드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이르가 앞장서서 우리 국민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나는 제노사이드 당시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가르완다로 무기를 실어 보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 오페라시옹 뒤르쿠아즈 기지를 내주는 등 르완다 애국전선과 싸우는 하비아리마나를지원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생각났다. 게다가 이제는 국경 난민촌에서 재기를 다지는 후투 파워 세력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엔의 한 조사팀이 전 르완다 정부군의 악명 높은 바가소라 대령이 자이르 군대의 신분증으로 세이셸(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있는 섬나라 옮긴이)에가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6년 초반 키부 북부에서의 전쟁이 격렬해지는 시기와 때를 같이해 자이르의 후투 파워 세력도 르완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침투 요원들을 보내 제노사이드 생존자 수백 명을 살해했다. ‘아프리카의 권리라는 단체의 말을 빌리면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국제 사회는 난민촌을 통해 자이르에 돈을 계속 쏟아부으면서 모부투가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르완다 정부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 P341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최장기 집권을 자랑하는 독재자였다. 그는1960년과 1965년 사이에 CIA와 다양한 백인 용병 부대의 용의주도한 지원과 집권당인 콩고국민운동의 폭압 정치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장기 집권은 무엇보다도 이웃의 비극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는 탁월한능력 덕분이었다. 냉전 시대에 들어와 미국과 동맹 세력은 중앙아프리카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보루로 부랴부랴 그를 내세웠다. 그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모부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진작이 새로운 대세였다. 모부투가 다수당 체제로 개혁하는 척 흉내만 냈을뿐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하자 예전의 서구 후원자들은 그와 관계를 끊었다. 서유럽 전체나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과 맞먹는 그의 거대한 나라는 코발트, 다이아몬드, 우라늄, 금으로 넘쳐났다.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1993년 말 급료를 받지 못한 그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 살인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자이르는 만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했다. 모부투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비자를 받지 못해 파멸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바로 그때 르완다의 제노사이드가 그에게 다시 서광을 비춰주었다.
이번에는 난민 문제를 처리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로 그가 주목받았다. - P342

"댁들한테 우리는 전체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지요." 무궁가에서 나오는 도로 위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군중을 헤치며 르완다 쪽으로 며칠을 운전하고 난 뒤 만난 한 귀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민촌에 있을 때그들은 입만 열면 떠나올 때처럼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했다. 전체의 한 점이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경을 향해 돌진하는 숫양처럼 한 시간에 1만2,000명씩 (1분에 200명씩)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극단주의 후투지도자들이 오래전에 약속한 의기양양한 공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보다는 거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망명지에서의 철수였다.  - P366

르완다에선 수천 명이 도로를 따라 몇 시간을 진을 치고 서서 자신들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밀려드는 인파를 지켜보았다.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 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 P367

하지만 생존자들이 살인자 옆집에, 심지어는 기루무핫세의 집에서처럼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와 맞서는 일을 뒤로 미룬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카가메 장군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앞선 나머지 무턱대고 모조리 싸잡아비난해선 안 됩니다. 우선은 안정된 분위기를 만든 다음에 그때 가서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해도 늦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차츰차츰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모른 척할 수도 있습니다." 카가메는이런 요구가 국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점을 인정했다. 귀환이 있고 나서 군인들이 성난 군중에게서 살인 용의자를 구출해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렸다. 정의에 대한 요구와 질서에 대한 바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카가메는 말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려면 국민의 정서라는 문제를 고려해야겠지요." - P374

생존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들이 ‘이전‘이라고 부르는 시절처럼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전‘의 세상은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제노사이드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 그 후에도 가장 많이 외면당한다면? 보나방튀르 은이비지는 나이어린 생존자들이 극단주의자로 변해가는 현실을 특히 우려했다. "가족을잃고 희망도 미래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만 명이라고 가정해봅시다.이런 나라에서 그들에게 ‘네 아버지와 네 형제 일곱과 네 누이를 죽였으니 너도 가서 네 이웃을 죽여라‘ 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체테를 들고 그렇게 할 겁니다. 왜냐고요? 희망이 없는 탓에 미래를 보지 못하니까요. 국민들에게 화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아이들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고는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이 아이들이 사회로 돌아와 미래를 보면서 ‘그래, 도전해보는거야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생존자프로그램은 전무했다. "아무도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카가메의 고문 클로드 두사이디는 해외 기증자와 원조 단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말했다. "돈을 주면 요긴하게 쓰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상무장관에 임명된 보나방튀르는 외국의 원조가 부족한 이유를 르완다의 부족한 투자 기회 때문으로 설명했다. "부자가 아니고서는 국제 사회에 기댈 수 없는데, 우리는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석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국제 사회가 제노사이드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우리가 그 일을 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잊으려면 먼저 생존자들이 정상 생활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잊는 과정은 그 다음 일입니다." - P383

내가 보기에 1990년대 중반의 중앙아프리카는 중세 후기의 유럽과 비슷했다. 그 시기의 유럽도 부족과 종교 문제로 인한 끊이지 않는 전쟁, 부패한 전제군주, 탐욕스러운 엘리트, 미신을 믿는 농부, 창궐하는 질병, 극심한 가난, 난무하는 약속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유럽에 더 큰 번영과 좀 더 건전한 정부를 가져다준 일등 공신은 물론 식민주의였다. 식민주의는 침략을 수출하고 부를 수입하게 해주었다. 식민지였던 나라들은현대 민족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독립한 국가들이 지속 가능한 정치 전통을 세우려는 갈등 과정에서 보여주는정치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는 과도기의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 P394

하지만 희망은 막연히 생각할 때보다 그 이름을 부르며 굳게 믿을 때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르완다에 과연 희망이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분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1997년 4월 30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거의 일 년째 되던 날 르완다 텔레비전은 이틀 전, 자신이 기세니의 한 기숙학교에서 여학생 17명과 62세의 벨기에 수녀를 살해한 제노사이드 주동자였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을보여주었다. 학교를 노린 그런 공격은 한 달 새에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ㅎ키부예의 학교에서 일어났다. 키부예에서는 학생 16명이 살해되고 20명이 다쳤다.
텔레비전에 나온 죄수는 학살이 후투 파워의 ‘해방‘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속한 민병대는 인원이 150명으로, 주로 전 르완다정부군과 인테라함웨가 그 구성원이었다. 그보다 먼저 키부예에 있는 학교를 공격했을 때처럼 기세니의 학교를 공격할 때도 민병대는 자고 있던 학생들을 깨워 후투족은 후투족끼리, 투치족은 투치족끼리 모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부했다. 두 학교 여학생들 모두 자신들은 르완다인일 뿐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무차별하게 매질과 총격을 당했다.
시체로 넘쳐나는 르완다인들의 상상력 안에는 순교자가 더 들어설여지도, 필요도 없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살수도 있었지만 대신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들을 르완다인이라고 부르는 쪽을 택했던 저 용감한 후투족 여학생들의 사례에서 조금만 용기를얻으면 안 될까?
1995년 5월 ~ 1998년 4월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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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갈리의 남자 교도소에선 그곳 관리를 맡고있는 대위와 부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곡예단과 합창단, 정찰대, 만화책을읽고 있는 세 남자를 지나쳤다. 대위가 앞장서서 짧은 지휘봉을 휘두르며서로 엉긴 채 엎치락덮치락하는 죄수들을 뚫고 길을 열었다. 그러면서 대위는 계속 이렇게 소리쳤다. "미국에서 온 기자님이시다." 그러면 서로엉겨 있던 죄수들은 우리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절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 제노사이드의 이유를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그 유명한 군중 심리)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르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위계질서는 교도소 울타리 뒤에서도 볼수 있었다. 지식인, 공무원, 전문 직업인, 성직자, 상인은 불편하나마 그래도 감방을 차지했지만 농부와 노동자들은 지붕도 없이 뻥 뚫린 마당에나와 앙상한 몸을 서로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지내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지도자의 의견을 구했다. 그들은 어째서 그런 상황을 참았을까? 어째서 폭동이라도 일으키지 않았을까? 경비 체계가 그렇게 허술한데도 어째서 르완다에서는 탈출 기도가 거의 없었을까? 5,000명의 죄수가 들고일어나면 키갈리 중앙 교도소의 담을 무너뜨리고 수도를 위험에 빠뜨려 그들이 불신하는 정부에 큰 위기를 야기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고, 지원만 제대로 받는다면 전면적인 봉기에 불을 댕길 수도 있었다. 아무도죄수들의 복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들이 살아 있다는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오히려 국제 구호 단체 관계자와 기자와 외교관들이 찾아왔으니 꿈만 같지 않았겠는가. - P299

르완다의 지명 수배자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던 곳은 자이르와 케냐였다. 부패로 악명이 높던 그 두 나라의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와 다니엘 모이는 하비아리마나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미망인 아가트 여사를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모부투는 하비아리마나가 살아 있을 때 그를 ‘막내동생‘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의 유해는 아무도 모르게 집단 탈주자들틈에 섞여 국경을 넘어 고마로 운반된 뒤 모부투의 사유지에 있는 묘지에묻혔다. 유엔이 르완다에 파견한 검사팀 책임자였던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오노레 라코토마나나에게 자이르나 케냐 사람을 기소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두 나라 모두 국제 조약 가맹국들입니다." 하지만 1997년 해임되기 전까지 거의 2년 동안 라코토마나나는자이르 조사관을 파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1995년 10월 케냐 대통령 모이는 유엔 재판소를 ‘날치기 기구‘ 라고 매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소환장을 가지고 케냐에 들어와우리 국민들을 데려가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 만약 그들이 이곳에온다면 모두 체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누구든우리를 괴롭힌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카가메는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인맥을 형성해 서로를 보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프리카 형제들한테도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산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바로 자기네 나라에서도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건대, 그런 일이 일어나면그들은 우리 땅으로 도망쳐 올 것입니다. 당장 내일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 P312

하지만 불명예를 안고 쫓겨났어도 신디쿠브와보는 후투 파워 권력층에게 희생양으로서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고마 서쪽 10마일 지점의 키부호 북단에 계속 사령부를 두고 있던 전 르완다 정부군 지도자들은 시간이지나자 망명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새로운 정치 전선 조직을 속속 만들었다. 조직의 수뇌부는 세상에 ‘깨끗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제노사이드와 관련이 없다고 알려진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런 조직 가운데 르완다민주공화당이 가장 눈에 띄었다. 르완다 민주공화당은 난민 위기를 애국전선 탓으로 돌리면서 귀환의 선결 조건으로 전면 사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선전 전략에 힘입어 르완다 민주공화당은 구호 단체와 언론관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유엔 난민기구 직원들은 난민촌을 방문할 때마다 일부러 르완다 민주공화당 지도자들을 내게 소개하곤 했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신디쿠브와보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도 인도주의 단체들은 그들이 사려 깊고 정당하며 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BBC는 자이르, 케냐,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르완다 민주공화당 대변인들을 ‘난민의 대표자라고 보도했다. 르완다 민주공화당이 제노사이드 주동자들과 연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은 그랬다. 고마의 전르완다 정부군 사령부가 조종하는 그림자 후투 파워 정권과 르완다 민주공화당 요원들은 자이르의 난민촌을 완전히 장악한 채 가구 단위로 매달 현금 또는 배급받은 구호식량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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