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모코토 학살 소식이 키갈리에 돌기 시작하면서 만나는 르완다 정부관리마다 한결같이 분노했다. 그들은 내게 만약 자이르가 조상이 르완다인이라는 이유로 자국의 투치족을 추방했다면 르완다인을 조상으로 둔자이르 르완다의 후투족은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어째서 멀쩡하냐고 물었다. 이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이렇게 말했다. "제노사이드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이르가 앞장서서 우리 국민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나는 제노사이드 당시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가르완다로 무기를 실어 보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 오페라시옹 뒤르쿠아즈 기지를 내주는 등 르완다 애국전선과 싸우는 하비아리마나를지원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생각났다. 게다가 이제는 국경 난민촌에서 재기를 다지는 후투 파워 세력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엔의 한 조사팀이 전 르완다 정부군의 악명 높은 바가소라 대령이 자이르 군대의 신분증으로 세이셸(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있는 섬나라 옮긴이)에가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6년 초반 키부 북부에서의 전쟁이 격렬해지는 시기와 때를 같이해 자이르의 후투 파워 세력도 르완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침투 요원들을 보내 제노사이드 생존자 수백 명을 살해했다. ‘아프리카의 권리라는 단체의 말을 빌리면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국제 사회는 난민촌을 통해 자이르에 돈을 계속 쏟아부으면서 모부투가 제노사이드 주동자들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르완다 정부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 P341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최장기 집권을 자랑하는 독재자였다. 그는1960년과 1965년 사이에 CIA와 다양한 백인 용병 부대의 용의주도한 지원과 집권당인 콩고국민운동의 폭압 정치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장기 집권은 무엇보다도 이웃의 비극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는 탁월한능력 덕분이었다. 냉전 시대에 들어와 미국과 동맹 세력은 중앙아프리카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보루로 부랴부랴 그를 내세웠다. 그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모부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진작이 새로운 대세였다. 모부투가 다수당 체제로 개혁하는 척 흉내만 냈을뿐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하자 예전의 서구 후원자들은 그와 관계를 끊었다. 서유럽 전체나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과 맞먹는 그의 거대한 나라는 코발트, 다이아몬드, 우라늄, 금으로 넘쳐났다.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1993년 말 급료를 받지 못한 그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 살인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자이르는 만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했다. 모부투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비자를 받지 못해 파멸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바로 그때 르완다의 제노사이드가 그에게 다시 서광을 비춰주었다. 이번에는 난민 문제를 처리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로 그가 주목받았다. - P342
"댁들한테 우리는 전체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지요." 무궁가에서 나오는 도로 위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군중을 헤치며 르완다 쪽으로 며칠을 운전하고 난 뒤 만난 한 귀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민촌에 있을 때그들은 입만 열면 떠나올 때처럼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했다. 전체의 한 점이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경을 향해 돌진하는 숫양처럼 한 시간에 1만2,000명씩 (1분에 200명씩)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극단주의 후투지도자들이 오래전에 약속한 의기양양한 공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보다는 거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망명지에서의 철수였다. - P366
르완다에선 수천 명이 도로를 따라 몇 시간을 진을 치고 서서 자신들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밀려드는 인파를 지켜보았다.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 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 P367
하지만 생존자들이 살인자 옆집에, 심지어는 기루무핫세의 집에서처럼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와 맞서는 일을 뒤로 미룬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카가메 장군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앞선 나머지 무턱대고 모조리 싸잡아비난해선 안 됩니다. 우선은 안정된 분위기를 만든 다음에 그때 가서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해도 늦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차츰차츰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모른 척할 수도 있습니다." 카가메는이런 요구가 국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점을 인정했다. 귀환이 있고 나서 군인들이 성난 군중에게서 살인 용의자를 구출해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렸다. 정의에 대한 요구와 질서에 대한 바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카가메는 말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려면 국민의 정서라는 문제를 고려해야겠지요." - P374
생존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들이 ‘이전‘이라고 부르는 시절처럼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전‘의 세상은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제노사이드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 그 후에도 가장 많이 외면당한다면? 보나방튀르 은이비지는 나이어린 생존자들이 극단주의자로 변해가는 현실을 특히 우려했다. "가족을잃고 희망도 미래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만 명이라고 가정해봅시다.이런 나라에서 그들에게 ‘네 아버지와 네 형제 일곱과 네 누이를 죽였으니 너도 가서 네 이웃을 죽여라‘ 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체테를 들고 그렇게 할 겁니다. 왜냐고요? 희망이 없는 탓에 미래를 보지 못하니까요. 국민들에게 화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아이들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고는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이 아이들이 사회로 돌아와 미래를 보면서 ‘그래, 도전해보는거야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생존자프로그램은 전무했다. "아무도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카가메의 고문 클로드 두사이디는 해외 기증자와 원조 단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말했다. "돈을 주면 요긴하게 쓰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상무장관에 임명된 보나방튀르는 외국의 원조가 부족한 이유를 르완다의 부족한 투자 기회 때문으로 설명했다. "부자가 아니고서는 국제 사회에 기댈 수 없는데, 우리는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석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두사이디는 국제 사회가 제노사이드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우리가 그 일을 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잊으려면 먼저 생존자들이 정상 생활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잊는 과정은 그 다음 일입니다." - P383
내가 보기에 1990년대 중반의 중앙아프리카는 중세 후기의 유럽과 비슷했다. 그 시기의 유럽도 부족과 종교 문제로 인한 끊이지 않는 전쟁, 부패한 전제군주, 탐욕스러운 엘리트, 미신을 믿는 농부, 창궐하는 질병, 극심한 가난, 난무하는 약속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유럽에 더 큰 번영과 좀 더 건전한 정부를 가져다준 일등 공신은 물론 식민주의였다. 식민주의는 침략을 수출하고 부를 수입하게 해주었다. 식민지였던 나라들은현대 민족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독립한 국가들이 지속 가능한 정치 전통을 세우려는 갈등 과정에서 보여주는정치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는 과도기의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 P394
하지만 희망은 막연히 생각할 때보다 그 이름을 부르며 굳게 믿을 때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르완다에 과연 희망이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분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1997년 4월 30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거의 일 년째 되던 날 르완다 텔레비전은 이틀 전, 자신이 기세니의 한 기숙학교에서 여학생 17명과 62세의 벨기에 수녀를 살해한 제노사이드 주동자였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을보여주었다. 학교를 노린 그런 공격은 한 달 새에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ㅎ키부예의 학교에서 일어났다. 키부예에서는 학생 16명이 살해되고 20명이 다쳤다. 텔레비전에 나온 죄수는 학살이 후투 파워의 ‘해방‘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속한 민병대는 인원이 150명으로, 주로 전 르완다정부군과 인테라함웨가 그 구성원이었다. 그보다 먼저 키부예에 있는 학교를 공격했을 때처럼 기세니의 학교를 공격할 때도 민병대는 자고 있던 학생들을 깨워 후투족은 후투족끼리, 투치족은 투치족끼리 모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부했다. 두 학교 여학생들 모두 자신들은 르완다인일 뿐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무차별하게 매질과 총격을 당했다. 시체로 넘쳐나는 르완다인들의 상상력 안에는 순교자가 더 들어설여지도, 필요도 없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살수도 있었지만 대신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들을 르완다인이라고 부르는 쪽을 택했던 저 용감한 후투족 여학생들의 사례에서 조금만 용기를얻으면 안 될까? 1995년 5월 ~ 1998년 4월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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