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도 사람‘이라는 대중의 너그러운 이해는 대개 남성에게만- 할리우드에서는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진다.
반면 대중은 앰버 허드와 같은 여성에게 ‘착하고 죄 없는 피해자‘ 혹은 ‘남자를 속이고 괴롭히는 소시오패스‘ 중 하나의 역할만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성은 독특한 면이존재하는 입체적 인물인 반면 여성은 평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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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허드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허드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허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고, 뎁과 허드 둘 모두 미성숙한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마하트마 간디의 경우 아내를 공개적으로 조롱했고 아들들을 학대했다. 아버지의 학대에 분개한 간디의 아들들이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간디가 그랬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소시오패스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부부가 서로 폭력을 주고받았음에도 사람들은 조니 뎁을 소시오패스라고부르지 않는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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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둘 사이의 일은 "쌍방 과실(mutualabuse)"이지만 <복스>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뎁은 다르보(DARVO)전략을 구사한 혐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르보란 ‘(사실을) 부인하고 공격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Deny, Attack, and Reverse Victim and Offender)‘ 행동을 가리킨다. 폭력, 성범죄 등의혐의가 있는 남성들이 무죄를 입증하는 대신 ‘사실은 내가 피해자‘라며 상황을 뒤집어 오히려 여성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즉 이미 영국 법원에서 폭력 사실이 인정된 조니 뎁이 미국에서는 거꾸로 피해자로 둔갑해 허드를 공격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인기를 끌어온 뎁과 달리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앰버 허드가 뎁이 요구한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뎁도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잘 아는사람들은 뎁이 건 소송은 돈을 받아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떨치고 전처를 ‘응징‘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해석한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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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구하기그렇다고 해서 식문화가 발달한 남미와 남유럽 사람들이 당시 미국에 없었던 게 아니다. 미국인의 문제는 문화적 폐쇄성이었다. 미국인들은 남미와 남유럽 문화를 영미 문화보다 뒤떨어진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의 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맵거나 향이 강한 음식을 ‘흥분제‘라고생각했고 이런 음식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고생각했다. 향이 강한 음식은 카페인이나 알코올의 연장선에 있는것으로 취급했고 그런 음식을 좋아하다보면 결국 코카인과 헤로인 같은 중독성 마약에 빠져들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20세기초만 해도 미국인들은 올리브를 기피했고 마늘과 식초가 반드시들어가는 피클 같은 음식도 피했다. 물론 지금 미국인들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갖고 있어서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것이 하나의 지위 상징이 되었다. 이런 태도가 과거 미국에도 퍼져서 남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같은 남유럽 문화에서 먹는것처럼 다양한 식재료와 향신료가 사용되었더라면 대기근과 대공황을 견디기 훨씬 쉬웠을 거라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이들에게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배려가 아니라 삶과 경험을 풍성하게 해주는 고마운 요소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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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미국인인 코니 청이 미국의 주요 방송사에서 앵커를 할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변화였지만 핀 황과 아이샤 라스코가 메이저 언론사에서 자신의 이름과 억양이라는 민족성, 즉 에스니시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방송사가 이제는 단순한 인종적 평등(racial equality)을 넘어 다양성의 가치를 이해한 덕분이었다. 나와다른 인종이나 문화를 ‘배려‘하는 것과 다양성의 가치를 아는 것은 다른 얘기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양성이 조직과 사회에 실질적인 이익임을 아는 것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내가 ‘베푼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힘들거나 반대에 부딪힐 경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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