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라더니, 내 눈에 보이는 남자는 파란 LA 다저스 모자를 쓴 동양인이었다. 남자는 모하메드와 인사를 나눈 뒤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죠?"
남자의 눈에 확신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 박제이입니다."
나는 스스럼없이 내미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재이인가. 제이인가.
"제일, 제이, 제삼 할 때 그 제이."
제이는 내 머릿속 질문을 들은 것처럼 얼른 덧붙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손이었다. 여자로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내 손이 담쏙 싸안길 만큼 컸다. 슬쩍 마주 쥐었다 놓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경쾌하고 담백했다.
"이해상입니다." 나는 입이 자동문처럼 열리는 걸 느꼈다. "천상, 지상, 해상 할 때 그 해상."
제이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손의 느낌과 비슷했다.
생면부지 상대에게 갖게 되는 동물적 경계심을 단박에 허무는 힘이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봤다. 내 삶에 그가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기도 했다. 그놈이랑 눈 맞추지마. - P151

"왜?"
어쩌면 그때 내가 둘러멘 남자는 제이가 아니라 승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게 아니고는 내 안에서 폭발한 불가사의한 힘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넘어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심지어 다리 한번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캠핑 배낭을 멘 것처럼 몸을 통제하며 구보 속도로 산길을 내려갔다.
하산하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나 결국 끝이 나타났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던 담장 쪽문이 랜턴 빛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미끄러지듯 내려가 쪽문을 통과했다. 그때부턴 전력으로내리달았다. 식자재 창고와 흡연 구역을 지나 3동 비상구에 도착할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비상구 문을 밀고 들어서자 놀란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공달 카페입장을 기다리던 노인들이었다. 따뜻한 공기와 함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시야는 갑자기 흐려졌다. 지금껏 나를 끌고 온 광기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1동에서 나오는 랑이 언니를 알아본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복도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으며 랑이 언니를 불렀다. 팀장을 깨우라고.
귓가에선 제이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잠꼬대처럼 혹은 속삭임처럼.
"해상아…."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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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머뭇대지 않고 출발했다. 부르면 찾아가는 게 내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 어둡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고, 이정표가 알려주기로, 이 거리의 이름은 만경로란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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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어디나 군기, 텃세 같은 게 엄청 심해요. 그자리 하루만 일하고 그만둔 사람 엄청 많아요. 핫파트가 일도 힘들지만, 관리자가 옆에붙어서 그렇게 쪼니까 스트레스받아서 못 견디고 나가요."
"근데 제가 이해가 안 가는 게 사람들이 금방 그만둬서 힘들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몰아대는 거예요? 어떻게든 데리고 있으려고 애를 써야하는 거 아녜요?"
"아니죠. 어차피 그만둘 사람이면 그래서 막 대해도 상관없는 거고. 있을 사람이면 누가 서열이 높은지 확실하게 보여줘야죠. 주방은워낙 일이 많고 힘드니까 위아래가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아요. 여기선 핫파트가 제일 심해요. 저도 사람 없다고 해서 핫파트 몇번 불려간 적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핫파트 계속해야 하면 그만둔다고 해서 다시 콜드로 옮긴 거예요. 아마 지금 많이 힘드실 거예요."
인원 부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사람에 미련이 없는 데에는 주방 사람들의 자부심도 한몫했다.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은 ‘화‘가 중심에 자리잡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씨발 다 덤벼!!
류의 자신감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과로와 야근으로 점철된 주방생활을 ‘나 아니면 식당이 안 돌아가!‘ 하는 자부심으로 버텼다. 오래 일한 사람은 누구나 가슴 한편에 이 생각을 품고 일한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한두 달 지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뜨내기 한둘이 사라지는 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들이 있건 없건 어차피 내가 여기서 제일 힘들고 일도 제일 많이 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신입 직원에게 살갑게대할 이유도 없다. 결국엔 내가 다 하게 될 테니까. 겸손한 래퍼를 힙합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듯이 일당백이 아닌 요리사도 요식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 P213

"너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알바는 정말 몰라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가 없어. 내가 <동물의 세계> 이런거 보는 거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표범이 토끼나 새끼 가젤 같은거 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막 달려가, 그러면 조그만 동물이 눈에 핏발 세우고 도망을 친다고, 목숨을 걸고 도망가.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무슨생각이 드는 줄 알아? 쟤네들은 내 마음 알 거라고. 온 세상에서 딱 채네들만 지금 내 기분 이해할 거라고. 장사하는 사람 심정이 딱 그거야. 사자가 등 뒤에서 입 벌리고 쫓아오는데 어떻게든 안 잡히려고 도망치는 거. 인건비에 배달비에 재료비에 대출에 적자에 어? 어? 하다가 따라잡히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똥구멍에서 피가 나게 뛰어다니는 거지. 그나마 야생은 편한 거야. 사자는 한 5분 따라오다 안 된다 싶으면 포기라도 하지. 우리는 안 끝나.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서너덜거릴 정도로 도망을 치는데 그게 안 끝나. 계속 쫓아오고 계속 도망가. 그렇게 19년을 살아봐. 식당 하는게 그런 거야." - P244

"촬영하다 모여서 다들 그 얘기 하거든. ‘이렇게 찍어도 이거 어차피아무도 안 봐.‘ 나도 하다 보면 그런 생각 자주 드는데 그때가 제일 비참해. 진짜 그 기분은 말로 다 못 해. 이런 데가 오히려 돈은 꼬박꼬박 잘챙겨줘. 근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이런 현장 오래 있으면 진짜 폐인돼. 사람이 망가져"
나는 막연히 이들이 이 업계에서의 경력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들 쉬쉬하며 숨기고 싶어 할 거라고 말이다.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봐주기만 한다면, 보고서 즐거워한다는 확신만 든다면 그들은 더 적은 돈, 더 긴 시간도 얼마든지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는 철저히 낭비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노력이 이 세상 어디로도 어느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괴로워했다. - P248

논픽션은 공동체의 투병기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육체의 상처와 고통뿐 아니라 세대와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고백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역할은 고름이 질질 흐르는 환부가 되는 것이다.
그가 쓸모없다고 확신하는 종류의 책은 끝까지 읽고 나서 작가의 결점을(글의 결점이 아니라)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이라면 차리리 쓰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작가로서 정확해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에게 조언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조언과 교정은 이미 끝난것입니까?그래서 남을 지도할 여유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마음도 그렇게 비틀어지지는 않았네. 나 자신이 병이 들었는데 남을 간호하지는 않지. 마치 같은 요양소에 누워 있듯이 자네와 공통된 병고에대해 이야기하면서 치료법을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이네. 그러니 부디 들어주길 바라네."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 세네카, 김천운 옮김, 동서문화사, 2016. - P381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누이트족이 특별했던 점은 하나였다. 그들은 날씨가 더 추워질 수 있다는 걸 예상했다. 그것뿐이었다. 반면에 텍사스인은 지금 날씨가 어떤지만 생각했다. 텍사스인이 이보다 추워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때, 이누이트족은 더 혹독한 추위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날씨가 실제로 더 추워졌을 때 텍사스인은 무너졌고 이누이트족은 버텨냈다.
세상은 오늘도 날카로운 한기로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리라. 다가오는 시간은 지금보다 아주 아주 많이 더 추우리라는 사실을.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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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면 일당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잔고의 앞자리 숫자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루하루 레벨업을 하는 느낌이다. 물론 까대기가 성장시켜 줄 삶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몸의 관절을 박살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년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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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프라인 구인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 이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직업소개소의 소멸은 노동자 계층의 지역적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영국식 술집 ‘펍‘을 두고 비슷한 지적을 한다. 빈민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펍도 함께 철거되는데 이것이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한다는 것이다.

술집의 경우에는 이러한 단지에서 완전히 추방당했고 (중략) 하지만노동계급에게 술집이란 일종의 모임 장소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공동체의삶에 큰 타격을 입힌다.*

사람들은 꼭 일자리를 찾을 때만 소개소를 찾지는 않는다. 소개소의 의의는 공간 그 자체에 있다. 소개소를 이용하는 남성들은 40대 후반에서 국민연금 개시연령인 65세 정도까지가 대다수인데 이 연령대 남성들이 서울에서 돈 안 쓰고 모일 수 있는 곳은 소개소가 유일하다. 여기가 아니면 술집뿐이다. 내 눈에 비친 직업소개소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심 속 동네 사랑방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친분을 쌓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어떤 이는 여기서 이삿짐 옮기는 걸 거들어줄 사람을 구하고 어떤 이는 집수리를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 때로는 (대단히 드문 경우긴 하지만) 약간의 돈을 빌리기도 한다.
직업소개소가 사라져서 가장 불행한 대목은 바로 이런 결속력이 산산조각났다는 점이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 사회의 모습도 변하기 마련이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몇몇 산업 영역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뜻있는 사람들이 야생동물의 멸종을 슬퍼하는 이유와 같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없으면 이 세상은 더 가난하고 더 암울하고 더 쓸쓸한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9

상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럴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극도로 화가 난 고객이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이런 상황은 상담사에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인다. 침이 튀고 삿대질이 오간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상식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이 느낀 좌절감을 담아낼 수가 없다. 뒷일은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해소해야만 한다. 칼, 망치, 포크, 연필, 젓가락 무엇이든 상대를 한 방에 보내버릴 무기를 찾는다. 이 순간의 정적은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 상담사에게 휘두를 언어적 흉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 P55

콜센터에는 직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회식도 회의도 공동 업무도 없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팀원들과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지만 이곳에서 팀이란 서류상의 구분일 뿐 팀으로 해야 할역할도 공간도 없었다. 나는 퇴사할 때까지 2팀에 속한 사람이 누구라든지 그들이 앉은 자리가 어딘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팀과는 무관하게 배정되는 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점심은11시부터 3시까지 한시간 간격으로 4개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밥 먹는시간도 다 쪼개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도 여의치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아무리바뀌어도 바로 옆 사람과 같은 식사 시간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출근해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가 6시가 되면사무실을 떠났다. 팀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콜센터는 공유 오피스를이용하는 개인사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회사에선 한 달에 한 번꼴로 새 직원을 뽑았다. 저런 속도라면 늘어나는 인원을 어떻게 감당하나 싶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충원인력보다 퇴사자가 더 많아서 사무실 구석에는 항상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선지 직원들도 애써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려 애쓰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런 광경을 낯설어하던 이도 어느 날 갑자기 같은 방식으로 모습을 감춘다. 우리가 한 팀이라면 지하철 좌석에 우연히나란히 앉게 된 사람들도 한 팀이었다. - P61

돼지의 배설물은 따뜻한 물과 비누만 있으면 씻어낼 수 있지만 점잖은 사람들이 입으로 쏟아놓는 오물은 1년, 2년이 지나도 말끔히 사라지는 법이 없고 갑자기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한다. - P63

평소대로라면 하루에 90콜을 받아도 밀린 설거지를 끝낸 정도의 만족감조차 느끼기 힘들지만 이런 통화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의 감정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만 한다. 따뜻한 봄바람만이 봉우리 속의 꽃을 끄집어낼 수 있듯이, 상담사 내부의 열정과 친절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상냥한 말, 그것뿐이었다. 어떠한 친절 교육도 아무리 호된 질책도 따뜻한 말 한마디만 못했다. 우리가 보호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때,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찼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삶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 - P86

오늘날 사람들은 묻는다. "어떤 직업들이 사라질 것인가?" "어떤 직업들이 나타날 것인가?" "직업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콜센터를 떠날 때는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싶어졌다. "어떤 직업들은 사라지는 게 나은가?" 급여도 적고 처우도 열악하고 이렇다 할 만족감도 주지 않는 일이라면, 운영 상태가 엉망인 기업을 도산처리하는게 나은 경우가 있듯이 직업도 그렇게 정리하는 게 나을 수 있을까? 나는 콜센터를 떠올리며 그렇다고 이런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는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된 광경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에 없어지는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이 영하의 길거리에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을 리 없었다.
<죄와 벌>에는 도스토옙스키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입을 빌려 그 전설적인 사형 집행 직전 순간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 만, 살 수 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그래도 일하고 싶다. 생존에 있어 진실은 노동에 있어서도 진실이다. - P108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소설가 김훈의 유명한 말이다. 기후가 지표면의 풍경을 결정하듯 어떤 일을 하느냐는 피부 표면의 풍경을 결정한다.  - P113

막연하게 상자만 나르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던 일에도 그 나름대로방식과 절차가 있었다. 내가 일터에서 사랑하는 순간들이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될 때다. 너무나도 뻔하고 단순해 보이는 현상 속에서 다양한 체계와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조금의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 보잘것없던 존재들이 고통을 함께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단면들을 펼쳐 보여주는 순간들. - P124

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물류센터에서 불면증 클리닉을 병행해도 좋을 것 같다. 평상시의 잠, 11시 반쯤 불을 끄고 누워서 핸드폰 알람을맞추고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이다가 내일 뭐 입을지 고민하다가 12시가 넘어야 의식이 스러지는 잠이 일정한 격식과 절차를 갖춘 협상이라면, 까대기를 끝낸 후의 잠은 습격이자 납치다. 샤워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습관적으로 TV 채널을 돌리는데 갑자기 무의식의 검은 주머니가 머리 위로 뒤집어씌워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한나절이 지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쉽게 잠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잠은 많은 이들에게 골칫거리였다. 사오십 대 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잠이다 깨버려서 오히려 집에 있는 내내 깨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중년의 선배들이 나눴던 대화다.
"일 끝나면 잠자는 게 숙제야, 숙제, 가면 바로 자야하는데 날은 환하지 또 버스에서 조금 잤더니 잠이 더 안 와. 그렇다고 버스에서 깨어 있으려고 해봤자 소용도 없고" - P145

"일당 때문에 그러지? 늦지도 않고 빼먹지도 않고 바로 다음 날 딱딱꽂아주니까. 그것도 일부러 그러는지 딱 일하러 나가기 전에 받으니까 그 맛에 힘들어도 나오는 거잖아? 안 그래? 일당이 한 10만 원만 넘어가도 중독이 돼 농담 아냐. 그거에 맛들이면 다른 일 찾을 생각이 안 들어. 여기 다 그래. 나도 그렇고, 일당 15만 원 받으면 돈 많이 번 것 같지만, 아니야. 그거 계산해봤어? 그거 다 최저임금이야. 최저임금에서 10원도 더 준 것 없어. 여기에 야간수당이랑 연장수당이라 붙으니까 좀 커보이는거지. 우리가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 오래 일을 해서 돈이 많은 거야. 여기가 임금이 후하고 그런 게 절대 아니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일당은 힘이 없는 돈이야. 훅 불면 고꾸라질 돈이라고 얘네가 돈 안밀리고 주니까 이런 거는 깔끔한 거 같지? 절대 안 그래. 얘네들이 얼마나 치사하게 군다고. 일하다가 열두 달째가 되면 나오지 말라 그래"
"왜요?"
"딱 열한 달 채우면 업체에서 그만 나오라고 해. 일을 안 줘. 1년 일하면 퇴직금 줘야 하거든. 나한테도 그랬어. 한 20일 쉬다 오시라고. 여기업체들 다 그래."
"관리자들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업체에서 전화가 와. 내가 일을 하려고 해도 안 잡아줘. 그리고자기들도 알아 자기들이 퇴직금 때문이라고 까놓고 얘기해." - P154

"경고예요. 또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요"었다. 짐을그렇지만 사람을 몰아세우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놀랐다. 화를 내는 법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었다. 해야 할 말만 하되 반복해서 지시를 어기면 경고했던 바를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 워낙 칼같은 친구라서 다들 조장이나 반장보다 더 무서워했다. 그런데 작업이끝나면 이 친구가 출구 앞에 서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번다.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옷에는 허연 소금 자국이 밴 사람들을 향해 육사 생도만큼이나 깍듯한 태도로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금 끝난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 같은 일을 한 사람에게만 보일 수 있는 애정과 존경심이 담긴 목소리와 몸짓이었다.
그의 몸짓에서 세상이 나의 가치를 눈여겨봐 준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인생이 조금 덜 외롭고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한 시간을 통틀어 그 순간만큼 뭉클할 때가 없었다. 내게는 그 한마디가 삶의 의미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 안에서 나는 자신의 한계를 이겨낸 사람을 봤고 온전하게 자기 몫을 해낸 사람을 봤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은 사람을 봤다. 비록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긴 했지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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