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로 본 아파트는 벽장은 하나뿐이었지만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조그만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니 10월인데도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바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가 길 건너편에 보였다. 윌럼이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남자는 인사하지 않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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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필드는 언제나 이러한 관점에서 의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신발작은 의식의 흐름(혹은 의식된 현실) 가운데 일부분을 포착해서 경련을 통해 그것을 재생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C부인의 사례에서 특히 감동적인 것은, 간질을 통해 일어난 <회상>이 그녀의 의식에도 없었던 것을 꺼내어 경련을 통해 완전한 기억으로 되살렸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그녀는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거나 아니면 어떤 억압으로 인해 의식에 새겨질 수도 없었던 지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을 되살릴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생리학적으로는 문이 닫혔을지라도, 환자의 경험 그 자체는 잊혀진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인상으로 남아 치유 효과를 지닌 의미 있는 경험으로 느껴진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뇌졸중에서 회복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발작이 일어나서 행복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자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떠올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있었다는 것만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만족스럽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답니다."
- P245

"바가완디 양,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죽어가고 있어요. 전 고향으로 가고 있어요. 제가 왔던 곳으로돌아가는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게 귀향일지도 모르죠."
한 주가 지나자 바가완디는 이제 더이상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눈을감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연하게 띠고 있었다. 한직원이 말했다.
"바가완디 양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곧 거기에 도착할거예요."
사흘 후, 그녀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인도로 가는 여행을 이제 막 끝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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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바빌로니아를 떠날 것이다. 비엔나 여행에서처럼 그곳에도 미미나 유디트같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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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돌의 효과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법이다.처음에만 해도 그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병리학적으로 볼 때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투렛 증후군을 치료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고경제적으로도 불가능했다. 4세 때부터 투렛 증세로 고생한 레이는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한 생활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특이한 병에 심하게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 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해온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병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철저한 분석과 고찰을 시도한 3개월간의 집중적인 준비 기간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 병과 결별할 각오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74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 P187

그는 어떤 일이든지 몇 초만 지나면 잊어버렸다. 그의 착각에는 끝이 없었다. 그의 발밑에서는 기억상실이라는 심연이 언제나 입을 벌린 채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온갖 거짓 혹은 가짜 이야기를능숙하게 지어내면서 그 심연에 다리를 놓아 한시바삐 건너가려 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순간적으로 목격한 세계 혹은 그렇게 느껴진 세계였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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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인가 아닌가를 이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언이는 상실했지만 감수성이 특히 뛰어난 그들은 찡그린 얼굴, 꾸민 표정, 지나친 몸짓, 특히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박자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따라서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언어에 속지 않으며 현란하고 괴상한(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말장난과 거짓, 불성실을 간파하고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목소리의 표정과 음색에 대해서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인어상실증 환자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
면 언어상실증 환자와 정반대의 증상을 가진 환자의 경우에는 어떨까? 즉 단어를 이해하는 힘은 있지만 목소리의 표정과 음색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의 경우이다. 우리 병동에도 그런 환자가 몇 명 있었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언어 상실증이 아니라 일종의 인식불능증, 소위 음색인식불능증 환자이다. 말의 의미는 (나이가 문법구구조까지도)완벽하게 이해하지만 말투, 음색, 느낌, 음 전체의 성질 등 목소리의 표정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 P149

 고양 상태란, 단순히 건강하고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불안하고 도를 지나친 상태가 되기도한다. 이 때문에 기행과 추악한 행위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지나치게흥분한 환자는 통합과 억제를 잃은 상태, 어떤 종류의 과잉 상태에빠지게 된다. 그것은 충동과 이미지와 의지에 압도되는 상태이며 생리적인 광폭성에 사로잡힌(혹은 내몰린)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성장과 생명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이다. 성장은 지나치게 성장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생명은 생명과다‘가 될 수도있다. 모든 항진 상태는 왜곡되어 묘한 방향으로 나아가 기괴한 이상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과다운동증은 이상운동증(비정상적인동작과 무도병舞蹈病, 틱 증후군 등)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인지력의 항진은 ‘이상인지‘라고 부르며, 병적으로 항진한 감각의 도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항진상태의 격정은 폭력적 격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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