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 첫 해외여행은 중국이었다. 모두가 진로를 모색하던 4학년 2학기까지 나는 학생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11월이 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겨울방학의 초입에 학생처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당시는 학생회의 힘이 대단해서 학생처는 그저 커다란 말썽 없이, 즉, 운동권들이 총장실을 점거한다거나 하는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가기만을 바랄 때였다. 나는 가끔 학생처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바로 튀어나와 나를 진정시키고 사태를 해결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회 간부들에게 지급되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그 장학금 대상이나 액수가 줄어든다거나 할 때가 있었다. 그 장학금은 개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나 운동 정파 내부의 비자금으로 쓰였다. 공식 예산으로 근거를 남기면서 할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 장학금으로 문건도 인쇄하고 수배자의 도피 자금도 제공하고 전단지도 만들어 뿌렸다. 그런 돈을 줄인다는 것은 바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했고 그럴 때가 바로 내가 학생처 문을 손으로 여는 대신 발로 차고 들어가야 할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 P30

중국에서의 나는, 그리고 나와 함께 여행한 운동권의 ‘동지‘들은 어떤 면에선 유럽에서 열심히 필기만 잔뜩 해온 나의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사회주의 중국에 뭔가를 배우러 간다고 생각했다. 천안문 사태의 진실도알고 싶었다. 국내 언론들이 사회주의 중국을 폄훼하기 위하여 진상을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확신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였을 뿐이었다. 자신이믿고 있던 것들이 아직은 건재하리라는 희망.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 태도였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P35

후배와 나는 토플 같은 것은 공부해본 적 없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라 믿었고,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생각해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국의 엘리트들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몇 달 전에 있었던 천안문 사태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애매한 미소만 짓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의 해체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대신그는 우리에게 미국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없다고 대답했고 그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주제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회주의 중국에 환상을 가진 서울의 대학생과 자본주의 미국으로유학 가는 게 꿈인 베이징 대학생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 P41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P51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 P58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지금 와서 읽어보면 의미심장하다. 저 소설을 쓰던 2013년에 나는 막연하게나마 내가 어떻게 이렇게 진득하게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 왜 다른 일로 달아나지 않았는지 감을 잡고있었던 것이다. 소설 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비록 내가 창조했지만) 낯선 세계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 P62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데이비드 실즈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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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길 원하는 소수 집단의 구성원들은 다수 집단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다수 집단이 소수 집단을 폭넓게 수용하면 할수록 소수자들은 보다 엄격하게 자기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다수 집단의 세계로 순순히 통합될 경우 독립된 정체성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는 모든 사람이 획일적으로 미국인다워야 한다는 1950년대의 세계 비전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소중한 독특함을 물려받았다는 비전을 채택한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그의 훌륭한 저서 「스티그마Stigma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주변인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진정성과 정치적 믿음을 갖도록 해준 어떤 요소에 대해서 긍지를 갖고 이를 천명할 때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사회 역사가 수전 버치 Susan Burch는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서 〈사회화의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어떤 집단을 동화시키려는 사회적인 시도는흔히 그 집단이 그들의 특이성에 대해 보다 큰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한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중반에는 <장애가 있는disabled〉이라는 표현 대신에 <다른 능력을 가진 differently abled>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남달리 만족스러운 differentlygruntled>이나 <남달리 알맞은differently agreeable>이라고도 말했다. 오늘날에는 만약 자폐 아동의 경우라면 그가 <전형적인> 아이들과 다르다고, 왜소증이 있는 아이라면 <평균적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정상normal>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의심의 여지없이 <비정상abnormal>이라는 표현도 허용되지 않는다. 장애인의 권리를 다룬 방대한 논문에서 교수들은 어떤 질환의 신체적 귀결을 의미하는 <기능장애impairment)와 사회적 맥락의 어떤 결과를 의미하는 <능력 장애 disability>의차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는 기능장애지만 공공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능력 장애다. - P63

일부 인권 운동가들은 휴먼 게놈 프로젝트가 마치 완벽한 게놈, 즉 유전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암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프로젝트 전체를 비난한다." 게놈 프로젝트가 이런 식으로 이해된 원인에는 프로젝트 입안자들이 웰빙의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금 제공자들에게 이 프로젝트가 만성적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홍보한 것도 한몫을 차지했다. 장애 인권 옹호론자들은 현실적으로 변화야말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학과 문화학을 가르치는 도나해러웨이 Donna Haraway는 게놈 프로젝트가 일종의 <시성(諡聖) 행위)이며, 유례없이 편협한 기준을 마련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전체 지도 작성이 아직 불가능한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지식과 권력의 완전한 연결망이 확립되는 순간 비정상적인 개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설명했다. 요컨대 권력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공고히 할수록 정상성의 스펙트럼은 경직된다고 주장했다. 푸코의 관점에 따르면 정상성의 개념은 <사회체의 육체적인 강건함과 도덕적인 청결함을 요구했다. 또한 결함이 있는 개인들 즉, 퇴화되고 질이 낮은 인간집단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생물학적이고도 역사적인 절박함의 이름으로 국가의 인종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력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도록 부추겼다. 푸코 본인도 주장했듯이 만약 <인생이 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실수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역사를 구성하는 근간>이라면, 실수를 금지하는 행위는 진화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실수를 통해 태고의 진흙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66

사회 경제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인지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더욱 힘들어 한다. 프랑스의 한 직설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하위 계층이 중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훨씬 관대하다> 저소득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상호의존이 강조되는 반면에 고소득 가정에서는 <자립과 자기 계발이 강조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미국의 연구 결과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을 위탁 시설에 맡기는경향이 두드러지고, 이런 경향은 소수 인종 가정보다 백인 가정에서 더욱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충격적으로 많은 수의 소수 인종 부모들이 위탁 양육에 자식을 빼앗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저기능성 자폐를 앓는아들이 있는 부유한 백인 여성과 이 여성의 아들과 상당 부분 동일한 증상을 보이는 자폐증 아들을 둔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을 잇달아 인터뷰했다.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던 여성은 아들의 상태를 호전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 년간 부질없는 시간을 보냈다. 상대적으로 덜 유복한 여성은 여태껏 자신의 삶도 개선하지 못해 왔기 때문에 자신이 절대로 아들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할 일이 없었다. 첫 번째 여성은 아들을 대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느꼈다.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아들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숴요.」 두번째 여성은 아들과 비교적 행복하게 지냈다. 그녀가 말했다. 부서질 수있는 건 이미 오래전에 다 부서졌어요.」 고치려는 태도는 질병 모델이고, 수용하려는 태도는 정체성 모델이다. 어떤 가족이 어떤 길을 가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전제와 자원을 반영한다. - P77

다문화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동화(同化)정책이라는 용광로에 꼭 필요한 해독제였다. 이제는 소규모 공국(公國)들이 집단적인 힘을찾아야 할 때다. <상호 교차성>은 다양한 유형의 억압이 서로를 먹여 살린다는, 이를테면 인종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성차별 문제를 없앨수 없다는 이론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인권 단체인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회장 벤저민 젤라스는 백인 마을에서자라는 것이 얼마나 화나는 경험이었는지 이야기하면서 그와 입양되어 온그의 동생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조롱을 당했는지 설명했다. 더불어 인종 문제로 그들을 경멸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마저 게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동생을 괴롭힐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설명했다. 그가 말했다. 어떤 집단의 편견을 그대로 용인할 경우 우리는 다른 모든 집단에 대해서도 편견을 그대로 용인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내 동생이든 또는 다른 누구든 상관없어요. 나는 어떤 사람을 배제하는 조건이 전제된 인간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모두 똑같은 자유를 가졌습니다. - P90

달라이 라마의 추종자이면서 중국인에 의해 수십 년간 감옥살이를한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냐는 질문에 자신을 가둔 포획자들에 대한 연민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고 대답했다. 부모들은 흔히 그들이 작고 연약한 어떤 존재를 포획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조사한 부모들은 자식의 팡기나 천재성, 특별한 외모에 오히려 포획되고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식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으려는 목표가 존재한다. 한번은 불교학자가 내게 많은 서양 사람들이 열반이란 번뇌가 없어졌을 때 도달할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잘못 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그런 더없는 행복은 과거의 아픔에 의해서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따라서 불완전해질 것이다. 열반이란 미래의 환희를 고대할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절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기쁨의 씨앗을 찾을 때 마침내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되돌아보면 명백할 수 있다.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아동의 부모들 가운데는, 그들이 희망을 잃은채 극심한 비극적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던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히 알지못해서 미처 원하지 않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중이었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수용이 절정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부모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매 단계에 아이에게 쏟았던 사랑이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방식과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방식으로 그들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는지 깨닫는다. 루미의 말에 의하면 빛은 상처 난 곳을 통해 들어온다." 이 책의 수수께끼는 소개된 대부분의 가족들이 피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마다하지 않았을 경험에 대해 결국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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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둥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는 공항에서 항공권을, 더더군다나 편도는 사지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추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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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딸을 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딸을 단지 키가 작을 뿐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키워야 할지, 난쟁이로서 롤 모델을 찾도록 해야 할지, 아니면 외과 수술로 팔과 다리를 늘려 줄 방법을 찾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익숙한 전형을 보았다. 나는 청각 장애인과 나의 공통점을 깨닫고 놀랐으며 이제는 소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반가운 무리에 합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동성애가 질병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할 수있다면, 청각 장애가 질병이 아닌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왜소증이 명백한 장애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면, 이불편한 틈새 영역에 속하는 수많은 다른 범주들이 있을 터였다. 그야말로급진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극소수자라고 생각했지만 불현듯 엄청나게 많은 동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차이>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차이에 의한 각각의 경험이 해당 경험을 가진사람들을 고립시킬 수도 있지만 그들이 모이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의 투쟁은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 준다. 이례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히려 완벽하게 정상인 것이 드물고 고독한 상태다. - P23

부모님이 나의 정체성을 잘못 생각했듯이 다른 부모들도 그들의 자식을 끊임없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수평적 정체성을 모욕으로 느낀다. 가족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두드러진 차이를 가진 아이는 평범한 어머니나 아버지가 적어도 처음에는 제공할 수 없는 지식과 능력,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 아이는 대다수 다른 또래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고 따라서 이해를 받거나 잘 섞이지 못한다. 아무리 폭력적인 아버지도 자신의 외모를 닮은 자식한테는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이다. 혹시라도 불량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부디 아버지와 닮은 외모를 가졌기를 빌어야 할 것이다. 가족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수직적 정체성을강화하려고 하는 반면, 수평적 정체성은 대체로 거부하려 든다. 요컨대 수직적 정체성은 흔히 유사성으로 존중받고 수평적 정체성은 결함으로 간주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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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북서쪽 항구도시의 ㅎ동, 언덕으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들 사이를 부두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휘감고 지나던 그 동네의 초입에는 내가 여섯 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던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좁은 땅에 심긴 벚나무다. 언제나 봄이면 담장 너머로 꽃잎을 떨구던, 그 집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벚나무. 그리고 백구도, 할아버지는 백구를 좋아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집에 살던 식구 중에서 할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유일한 존재는 백구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이제부터 나는 그 집에서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몇 개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할머니와 보냈던 한때의 이야기지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 P9

 가끔 집 밖을 나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교생활을 하느라바쁜 친구들을 매번 불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 되뇌긴했지만 그 무렵 나는 내 자신이 실패자이자, 낯선곳을 표류하는 낙오자가 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해진 일상이 있는 사람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을 반복해 만날 때마다 누구나 속해 있는 현재라는 국가의 불법체류자가 된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다. - P23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했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던그 무렵의 나는 알 수 없는 조바심에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내가 발목이 삐면 노른자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반죽을 부은 자리에 붙여주고, 감기에 걸리면 파뿌리와 생강을 달여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간 후 병원에서 지어준 가루약을 먹기 좋게 물에 개어주던 사람. 오랜시간이 지난 후 가끔씩 나의 아이가 아플 때, 열이 40도 가까이 오른 아이의 이마를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주거나 체한 아이의 배를 오랫동안 문지를 때,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생각나는 밤이면 나는 이제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 P25

전화를 받은 할머니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ㅎ동 집으로 왔다. 유리그릇에 파김치와 열무김치를 덜어 담고, 삼계탕은 사기그릇에 담아 할머니들 앞에 하나씩 놓고는 나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들이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 닭의 살을 발라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들은 수십 년째 복날이면 같이 삼계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복날에는 삼계탕을 나눠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함께 먹는 사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할머니였는지도 모르겠다. - P91

"봐라, 인아야,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 P99

"할머니, 죽었어?"
복도의 저쪽으로는 아직 거동이 가능한 노인들이 모여서 뉴스를 보고 있고 다른 쪽으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면회 온 어린 손주들이 큰 소리를 치며 뛰어가다가 간호사에게 혼나고 있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마른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나갔다. 겨울의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암전 직전의 무대처럼 복도가 잠시 환하게 장미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후에 할머니는 얇게 미소를 지으며 졸린 듯한 음성으로 아주 천천히, 몇 번이고, 대답한다.
"아니, 아직은."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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