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정의의 집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 자리잡았다. 곧 수많은 책과 1500편 이상의 기록 문서로 가득 채워질 긴 탁자 좌우 양편에는 법정 속기사들이 앉아 있다. 판사 바로 아래에는 피고인과 변호인, 그리고 법정 사이에서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도와줄 통역사들이 있다.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어, 독일어를 쓰는 피고측 사람들은 대부분의 방청객들과 마찬가지로 무선 동시통역 장치를통해 재판 진행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 P49

 심지어 검사는 법정 건물 안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다(그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을 대질신문하는 데 신물이 났던 것이다). 법정에서 자주 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정의는 이런 어떤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란다우 판사가 재판 직후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 방문을 담당한 유대인 기구들 외에는 알려지지않았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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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80

에이드리언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공표해줄 것을 부탁했고, 검시관은 그의 말대로 했다. 마침내 나는 물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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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공적 담론에서 뉘앙스 이해력이 사라져버렸다는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와 정책을 흑 아니면 백으로 제시하고, 또 그렇게 판단한다. 미묘한 차이와 복잡성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이 범유행이 앞으로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이 있고, 각각 성공 확률은 어떠하니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가 쉽지 않다. 맹목적으로 신뢰할 이유도 없지만, 무턱대고 겁먹을 이유도 없다. 짤막한 문구와 영상으로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과학자들도 이제 조금씩 파악해가고 있는 복잡한 바이러스에 사회가 대처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전염병은 늘 그러듯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며 정책결정자들을 당황하게 했으니, 결과적으로 대중의 대응은 늘 한발 늦곤 했다.
물론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시기에는 단순하고 확실한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기 마련이니, 정치인과 장사꾼들의 거짓말과 거짓 약속이 횡행할 여지가 커진다.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을 비롯해전국 각지의 정치인들이 애초부터 과학적으로 명백히 거짓인 정보를 퍼뜨렸다. 그들의 말과 달리, 무증상 전파는 가능했고 비약물적개입 조치가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코로나19는 독감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예기치 않은 효과 중 하나로, 바이러스의 위협과 씨름하는 사회에서 앞으로는 과학자뿐 아니라 과학적 정보를 점점 진지하게 대하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P409

코로나19 범유행 중에 유전학자들은 혹시 일부 유전자가 SARS-2바이러스에 잘 감염되거나 저항력을 갖는 효과가 있는지 탐색에 나섰다. 그런 유전자를 찾아내면 어떤 환자가 특히 위험한지도 알 수있고, 유전적 차이를 참고해 효과적인 약리학적 전략을 발견하고 치료약 후보를 물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초기연구 결과 코로나19 증상이 극히 심한 환자들에게서 몇몇 특정 유전자가 이례적으로 빈번히 발견됐다. 또 환자의 혈액형이 A형이면 산소 흡입 조치와 인공호흡기 착용이 필요해질 확률이 다른 혈액형보다 50% 높았고, 혈액형이 O형인 사람은 감염이 더 잘 안 됐다(묘하게도 콜레라 생존율은 혈액형 관련성이 그 반대로 나타난다). 3번염색체에서 코로나19 증상 악화와 연관된 유전자 6개도 발견됐다. 그중 한 유전자는 ACE2 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 유전자는 기도 감염에 대한 면역반응에 관여하므로, 생리학적으로 타당한 결과다. 또한 이 6개의 유전자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현생 인류에 전해졌으며, 특히 동남아 지역 사람들이 흔히 보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 P439

고대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비극 작품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즉, 기술)을 선물한 죄로 바위에 사슬로 묶이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선물은 하나가 더 있었다. 인간이 자기 죽음을 내다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사례를 보고 자신도 고통받고 죽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그런 무지와 불확실성은 인간을 괴롭힌다. 기술의 힘을 빌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만, 예측이 정확하면서 암울하다면 그것도 문제다. 연극의 코러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들의 괴로움을 낫게 할 치료법이 무엇이오?"라고 묻는다. 프로메테우스는 "가슴에 맹목적 희망을 단단히 심어주었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맹목적 희망은 우리 역경의 동반자로 삼기에는 미덥지못하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희망은 요긴한 구실을 한다. 고개를 들어 미래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날을 준비하게 한다.
미생물은 인류 탄생 이래 인간의 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유행병은 수만 년 동안 우리의 진화에 기여했다. 신화 속 아폴론의 화살처럼, 인류 역사와 늘 함께해왔다. 우리는 이전에도 우리 손에 쥔 생물학적·사회적 수단으로 번번이 유행병을 이겨냈다. 우리는 일상을 되찾을 것이다. 역병은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역병처럼, 희망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인간과 함께한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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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허기를 폭넓게 정의했고, 여자의 섹슈얼리티, 야망, 경제적 삶, 법적 자유 모두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페미니즘이 지나간 자리에 등장해 풍경 전체를 휩쓸며 시대의 풍조로 떠오른 소비주의는 허기를 가장 좁은 의미로, 요컨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해결책, 외적인 해법,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정의했다. - P246

우리가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식이나 옷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할 때처럼 우리의 성적욕구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할 수 있도록 양육되었다면, 신체 부위나 가슴의 모양이나 허벅지 사이즈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적인 몸 자체를, 그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만져질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검토하고 이해하도록 격려받았다면 우리의 느낌은 어땠을까? 이런 종류의 사고 틀은 당시 우리 의식 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중 다수에게 30대나 40대 한 여자의 인생에서 행위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오랜 세월의 분투 끝에 마침내 뼛속에 자리 잡게 되는 시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계속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우리 자신의 몸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고, 섹슈얼리티는 유혹적인 만큼 두렵기도 한 자유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그 안에 살면서도 다 같이 모르는 척하는 지뢰밭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 지뢰들의 이름이 지뢰는 공포, 그 지뢰는 힘, 저 지뢰는 순전한 호르몬의 에너지라는 식으로- 구별할 줄 몰랐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우리에게 그 지뢰의 뇌관을 제거할 도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는 느낌인데, 이 느낌은 제기되지도 대답되지도 않은 그 모든 질문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그것은 마치 여자의 섹슈얼리티, 나의 섹슈얼리티는 어째선지 뒷전에 내팽개쳐진 채 논의되거나 탐사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궁극적으로 남자들의 섹슈얼리티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257

이 점은 특히 ‘남자 만족시키기‘ 전선에서 더욱 그렇다. <글래머>는 "그 남자가 오늘밤 해보고 싶어 안달하는, ‘계속해줘‘라고 외칠 마흔세 가지 기술"이라는 글을 실었다. <코스모폴리탄>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섹스 파트너가 되어라-그를 무자비하게 자극하고 서서히 유혹하고 그가 꿈에 그리던 방식으로 그의 세계를 뒤흔들어라!"라고 제안한다. 이상하게 섹스뿐아니라 숫자에도 집착하는 <레드북>은 "당신의 섹스 라이프를 더 뜨겁게 달궈줄 여섯 가지 동작" "모든 여자가 알아야 할 다섯 가지의 끝내주는 섹스 기교" "더 좋은 섹스를 위해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열 가지 방법" "당신 남자의 몸에서 만져줘야할 섹시한 부위 서른다섯 군데를 알려준다. 이런 것이 언제나 등장하는 표준적인 이야기-그 남자, 당신의 남자, 그가 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나는 이 이야기들이 나의 성장기에 여성의 성적 욕구를 에워싸고 있던 침묵과 불확실성의 강과 똑같은 강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 아닐까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 이야기들이 다 똑같은 해결책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알 수 없고, 논의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딱히 허용되지도 않는 욕구를 잘모르겠다면 그의 욕구에 집중하라. 바른 방향을 보고 (더 중요하게는) 바른 방식으로 행동하라.‘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해결책에는 성에 관한 지식이란 쌍방이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 여성의 쾌락은 남성의 쾌락을 자극하는 능력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 P264

나는 이것이 매우 강력한 조합이자 또한 매우 강력한 상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현화하는 소비주의 사고방식-구매하라. 쇼핑하라, 지출하라의 폭발적 확산과 페미니즘의 가시성과 추동력 감소가 어쩌다 발을 맞추어 진행된 것이다. 그로인해 거짓 약속이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고, 욕망의 정의들이 가장 바로잡기 어려운 방식들로 왜곡되었다. 또한 시각까지 왜곡되었다. 페미니즘에 낀 짙은 망각의 안개에 가려 권리와 전인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시기를 회상하면 굶기가 만들어주던 구조와 통제감을 포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안정감을 뿌리 깊이 뒤흔들었는지 떠오른다. 내 몸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일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그 세상은 굽이를 돌 때마다 욕망과 필요에 대한 의문이 솟아오르는 곳이었다. 협상해야 할고용주들이 있었고, 친밀해져야 할 남자들 혹은 그러지 말아야 할 남자들이 있었으며, 이제는 풀어놓아야 할, 평생을 짊어지고 살았던 욕구에 관한 부담감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상사앞에서 젊거나 초조하거나 귀여워 보이지 않고 전문적이고 진지하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인정에 대한 욕망에서 성적 욕망을 섬세하게 분리해낼 수 있을까? 여성의 권위, 사이즈, 행위 주체성, 야망에 관한 문제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아니 애초에 그런 문제들은 어떤 틀로 구성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이 여자들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너무나 최근의 일인것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그 의미에 관해,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관해, 그것이 제기한 도전들에 관해 말하기를 별안간 뚝 그만둬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길잡이를 찾겠다고 신문이나 여성 잡지의 라이프 스타일 섹션을 뒤적이면 더없이 얄팍한 조언들을 찔끔찔끔 발견할 뿐이었는데, 대부분은 1980년대에 걸핏하면 입에 올리던, 요점에서 어긋날 뿐 아니라 한심할정도로 부적절한 ‘성공에 어울리게 차려입어라‘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었다. 까다로운 감정의 풍경은 잊어요. 머리와 가슴의 관계도 잊어요. 힘이니 보상이니 껄끄러운 문제들이 도사리고있는 직업의 세계도 잊어요. 초대형 어깨 패드가 들어간 이 파워 수트를 입어보세요. 배와 엉덩이를 잡아주는 고탄력 팬티스타킹을 입어보세요. 문제를 외현화하고 쇼핑을 하세요.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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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거리두기와 자택대피의 핵심은, 여기에 참여하는 주된 목적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점을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범유행 초기에는 평소처럼 일상을 영위하고 바이러스 따위 겁내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용감하고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듯했다. 일부 정치인도 그런 자세를 취했다. - P309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행동이 곧 선행이라고 설득하는 건 좀 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체적 거리두기의 주목적이 타인 돕기라는 걸 알게 되면 더 기꺼이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초월할 줄 아는 도덕적 행위자니까. 한 예로, 어떻게 하면 공중보건 메시지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지 살펴본 연구가 있다. ‘이렇게 하면 코로나바이러스에 옮는 걸 피할 수 있다‘와 ‘이렇게 하면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걸 피할 수 있다‘, 둘 중 어떤 메시지가 더 효과적일까? 공공의 이익을 강조한 메시지가 개인적 위협을 강조한 메시지 못지않게 효과적이고, 때로는 더 효과적인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사익 추구뿐 아니라 공익 침해 우려가 예방접종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연구 결과와도 부합한다.  - P311

하지만 극도의 혼란과 이기심의 횡행은 일반적이라기보단 예외적 현상이다. 재난 생존자들은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돕고, 연대의식이 더 강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현상을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 교수자밀 자키 lamil Zaki는 ‘재난 동정심catastrophe compassion‘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게 이런 단결심과 선행 욕구가 있기에 재난 구역 바깥에서까지 기부와 자원봉사의 손길이 쇄도하기도 한다.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정체감을 더 많이 공유하게 되는 경우가 매우 흔하고, 이는 협력 행동과 선의를 낳는 강력한 원천이 된다. 그렇게 되는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같은 위험에 놓이면 기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이 ‘우리‘의 범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문제를 맞닥뜨린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의 역경 속에서, 어쩌면 무엇보다 중요한 구분이 생겨난다. 나와 같은 위협을 직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다. 그러면 같은 집단의 일원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본능적 성향이 발동되고, 자연히 그들에게 잘 대해주려는 마음이 일게 된다.
범유행 시기에 흔히 나타나는 또 한 가지 경향도 동질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서로 비슷하게 느끼는 두려움, 부정적 감정, 취약감 등을 터놓고 이야기하려는 경향이다.  - P313

그러나 코로나19의 경우는 노동 연령 인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페스트나 천연두처럼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기에 과거 전염병처럽 자본과 노동의 세력 균형점이 이동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그렇긴 하나 정치적 요인이 임금 인상의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코로나19는 미국 경제가 저임금 필수 노동자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노동 연령 성인의 사망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포스트 범유행기에는 노동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법규가 제정될 가능성이 크다. 앞서 살펴봤듯이유급 병가와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더 나아가 보육료 지원 등의 분야에서 개선이 이루어질 만하다. 범유행 초기에 주목받았던 마트 점원, 배송 기사, 요양보호사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반짝 관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 정치 운동으로 이어진다면 더 그렇게 되기 쉽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코로나19가 닥친 시점은 우연히도 미국의 소득 불평등이 한 세기 동안 심화하면서 많은 국민 사이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던 때였다. 또한 필수적이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직업 종사자들 덕분에 일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국민이 절감하면서, 임금 인상 요구에 더 공감하는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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