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든 부부는 그날 밤에 제이미를 살피러 공동 생활 가정에 갔다. 그자리에는 샘을 혼자 욕조에 남겨 두었던 보모도 있었다. 세라가 말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충격으로 마냥 흐느껴 울었어요. 나는 그녀를 포옹해 주면서 <마르비카, 당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중 누구라도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었어요>라고 위로했어요. 물론 그녀는 샘을 혼자 욕조에 남겨 두지 말았어야 해요. 하지만 매 순간 조금도 방심하지 않기란 지극히어려운 일이에요.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질러요. 시도 때도 없이 실수를 저지르죠. 만약 샘이 계속 우리 집에 머물렀다면 나 역시 혹시 수건이라도가지러 가면서 샘을 혼자 남겨 두었을지도 몰라요. 환자를 직접적으로 보살피는 이런 지극히 고된 일을 할 적격자를 채용하고 그들을 계속 잡아 두기란 정말 어려워요. 보수도 형편없어요. 그런 사람들의 실수를 범죄라고 몰아붙여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나는 이처럼 상대적으로 생색도 나지않는 분야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을 수 있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게다가 우리는 제이미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공동 생활가정에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했어요.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밤낮으로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그 덕분에 우리도 살 수 있었어요. - P643
앨런 로스는 「가족의 이례적인 아이The Exceptional Child in the Familys에서 부모들이 하나같이 그들의 자녀가 부모보다 높은 수준의,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사회 문화적인 성취를 이루길 기대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자녀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 일반적으로부모는 현실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요컨대 《보통 아이》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와 《그들의 자녀》라는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설명한다. 대체로 이러한 갈등은 자녀의 장애 정도보다 부모의 대처 능력이나, 가족 내 건강한 구성원 간의 역학 관계, 부모가 그들 가족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 부여하는 중요도 등과 상관이 있다. 부모의 수입과 자녀에게 집중하는 데 할애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외부의 지원은 하나같이 중요한 요소다. 아마도 가장 은밀하게 찾아오는 스트레스는 친구들과 소원해지거나 또는 친구들의 동정이나 몰이해로 부모가 스스로 그들과 담을 쌓으면서 뒤따라올 수 있는 사회적 고립일 것이다. 건강한 자녀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사회적 인맥을 확대하지만, 장애가 있는 자녀의 탄생은 대개 부모의 인맥을 제한한다. - P647
중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극심한 건강 위기나 끔찍한 발작을 겪지만 그들을 보살피다 보면 대체로 주기가 생기고, 인간의 본성은 리듬이 있는 것에 언제나 적응하기 마련이다. 보살피는 일에 능숙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극단적이지만 일정한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덜 극단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스트레스보다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 노릇이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 자녀의 부모 노릇보다 더 수월한 이유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즉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는 그날그날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고, 부모에 대한 요구도 비교적 변화가 적은 편이다. 반면에 정신분열증 자녀의 부모는 자신이 장차 어떤 괴상함과 부닥치게될지 예측할 수 없다. 자폐증 자녀의 부모는 어떤 파국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부모의 허황되거나 무지한 기대는 독이나 다름없지만 장애에 대한 구체적인 진단은 큰 도움이 된다. 제롬 그루프먼 교수는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언어는 청진기나 메스만큼이나 의사가 의료 행위를 하는 데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의사가 하는 모든 말 중에서도 환자의 병에 부여하는 병명은 다른 어떤 말보다 큰 무게를 갖는다. 병명이 곧 환자의 정체성이 되는 까닭이다>"라고 주장했다. 섣부른 예측 때문에 빚어진 슬픔이 아무런 예측도 못해 빚어진 혼돈보다 훨씬 낫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명확하기만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 길을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아는 게힘인 까닭에 끔찍한 예측일지라도 예측이 가능한 증후군은 아무것도 알수 없는 증후군에 비해서 훨씬 고상하게 인내될 것이다. 정체성은 확신에의한 결과물이다. - P652
공감과 연민은 당신이 여전히 당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의미 있는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할 때 최선의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상태를,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 경로를 결정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내적 통제 소재internal locus of control〉20이며,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외부 환경과 사건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외적 통제 소재 external locus of control>가 있다. 내적 통제 소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 방식과 우선순위를 적극적으로 일치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자신의 생활 방식과 우선순위를 일치시키는 데 실패한 남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직장에서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한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흔히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그들에게 통제권이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상황이 통제된다는 느낌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보다 훨씬 커다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종교가 있지만 다른 방법도 많다. 신의 존재나 인간의 선의지, 정의등을 믿을 수도 있으며 단순히 사랑을 믿을 수도 있다. - P661
나는 건강한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환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가 영원히 상냥하고, 연약하고, 부모에게 적당히 의지하면서 사춘기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어른이 되어 부모에게 무심해지지 않는것을 최고의 바람으로 꼽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조언하건대, 당신의 바람을 경계할지어다. 장애 아동은 영원히 그들 부모의 책임이다. 지적 장애인의 85퍼센트는 부모와 함께 살거나 부모의 간접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살고, 부모가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같은 구조가 가장 보편적이다. 23 하지만 부모가 늙어감에 따라 이러한 구조는 부모에게 커다란 걱정거리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떤 부모들은 처음에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특별한 주의를 요구하는 자녀에게 점점 압도되고, 중년이나 그 이후에 가서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원래는 자녀를 포기하고입양을 보내려고 했다가 그 자녀에게 차츰 사랑을 느끼는 부모들도 있다. 한편 장애인의 기대 수명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1930년대에는 보호시설에 수용된 지적 장애인 남자의 평균 사망 연령이 대략 15세였고, 여자는 22세였다. 1980년에 이르러 이 수치는 남자의 경우 58세가 되었고여자는 60세로 급증했다." 다만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일찍 죽는다. 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일에 이력이 나기 전이고, 감정적인 유대가 형성되기 전이며, 애초에 상상했던 건강한 아이에 대한 환상이 아직 완전히 깨지기 전인 부모들에게 초기의 스트레스는 흔히 그들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지적 장애가 있는 성인 자녀의 노부모들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노부모들 중 거의 3분의 2가 보호자 역할이 그들에게 목적의식을 갖게 만든다고느꼈고, 성인 자녀와 함께 삶으로써 외로움을 덜 느낀다는 사람도 절반이넘었다. - P669
사람들은 상투적인 말로 우리를 위로하려고 해요. <하느님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주십니다>라는 말처럼요. 하지만 샘이나 줄리아나 같은 장애아는 애초에 부모에게 선물이 될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아요. 그럼에도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선물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 P677
그동안 중도장애 아동의 형제들에 대해서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결정적인 결과물은 없는 실정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도장애인 형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장애인 형제와 함께 삶으로써 보다 책임감 있고, 관대하고, 사람들의 장점을 보고, 멋진 유머 감각을 개발하고, 유연한 태도를 기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곤혹감이나 죄책감, 고립감, 장애인 형제의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을> 드러내기도했다. 장애 아동의 형제들을 조사한 또 다른 연구는 그들의 <평범하고 오래된 속상함>에 대해 우울증 진단을 내릴 수 있을지 검토했으며, 그들이 다른 또래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덜 행복하기는 하지만 어떤 진단을 내릴 만큼 정신적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님을 밝혀냈다. 대체로 장애가 보다 명백하거나 심각할수록 비장애인 형제의 입장에서는 대처가 훨씬 수월하다. 장애가 명백하거나 심각한 아동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애초에 정상적인 면을 기대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 처음에는 정상인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가서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요컨대 장애 아동의 형제에게는 최악의 장애가 최선의 적응 환경을 제공하는듯하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결과는 장애 아동의 두드러진 장애에대해 그 가족들만이 느끼는 명확성과 편안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였다. 한편 친구들에게 단순한 설명밖에 할 수 없는 어린 형제들 사이에서는 진단명이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 요컨대 명백한 진단명이 없는 장애 아동의 형제는 훨씬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 P677
애슐리 같은 사례들이 유발하는 윤리 문제는 지난 50년을 거쳐 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정체성을 바꾸려는 행위도 문제이고, 의학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무를 무시하는 행위도 문제다. 애슐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웹 페이지를 개설했다. 개설 이후로 지금까지 그의 웹페이지는 거의 30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시점에도 그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 일주일에 약 10시간 정도를 할애하고 있었다. 항의자들이 시끄럽기는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그와 아내가 받는 이메일 가운데 약 95퍼센트가 그들 부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뉴스 전문 채널인 MSNBC에서 7,000명 이상에게 실시한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 중 59퍼센트가 해당 치료법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슐리의 부모는 <베개 천사와 관련된 직접적인 경험이있는 1,100명 이상의 보호자들과 가족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서 이메일로우리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혀 왔다. 만약 애슐리 같은 자녀를 둔 부모들중에 이 치료법이 그들 자녀의 삶을 질적으로 개선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녀에게 이 치료법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성실하고 결연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논란 이후로 애슐리 치료법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건서 박사가 말했다. 자칫 오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치료법의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치료법을 이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위험한 비탈길>이다. 오용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가능한 치료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의술은 극히 적어질 것이다.」「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프린스턴 대학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애슐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고통을 겪지 말아야 하며, 그녀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녀가 소중한 이유는 현재의 그녀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둘러싼 고상한 대화가 애슐리 같은 아동들이 그들 자신과 가족 모두를 위한 최선의 치료를 받는 데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한다. - P693
애슐리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애슐리를 사랑하고, 애슐리 치료법에 대해 철석같은 믿음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책을쓰면서 나는 장애인 자녀가 성장하고, 보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덩치가 너무 커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족들을 수없이 만났다. 장애 인권 운동가들은 걸핏하면 애슐리의 존엄성 상실을 언급했지만, 나는 그녀와 비슷한상태의 다른 장애인들을 침대 밖으로 옮기기 위해 도르래를 이용해서 쇠사슬로 들어 올리거나, 근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쇠로 된 기립 자세 보조기구에 집어넣거나, 샤워를 시키기 위해 줄로 만들어진 장치에 의지해서 옮기는 모습들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어떠한 존엄성도 발견할 수없었다. 또한 아서 카플랜 교수나 다른 사람들은 장애인의 가족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애슐리의 부모가 그 같은치료법에 동의한 이유는 줄이나 도르래를 마련하거나 간호사를 고용할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슐리를 그들 스스로 직접 옮기면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아이든 어른이든 또는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든 없든 간에ㅡ은 기계적인 보조 장치보다 인간과의 접촉을 선호한다. 이러한 친밀감이 수술적 개입을 정당화하는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런 친밀감을 깎아내리고, 보조 장치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핵심을 비껴가는 행동이다. - P694
오스트레일리아의 장애 인권 운동가 크리스 보스윅이 쓴 글에 따르면, 윤리학자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숙고하는 것이, 즉 <《인간》이지만 인간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스윅은 의사에게 자신이 의식이 있다고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을 식물인간으로 간주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의식이 있음을 또렷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을 대체로 알 수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의학 전문지 「신경학 Archives of Neurology에 실린 <식물인간 상태>로 판명된 실험군 84명 중 거의 3분의 2에 달하는 환자들이 3년 안에 <의식을 회복했다>는 논문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저술가들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식의 해석이 가능한 것이 훤히보이는 데이터로부터 어떻게 영구성과 확실성 같은 특성을 추출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스윅은 설령 인격체가 아닌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판단하기에 비인격체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반짝이는 인간성을 보여 준 앤 맥도널드와 크리스토퍼 놀란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우리는 증거가 결정적으로 확실치 않은 사건에서 내려지는 사형선고를 개탄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당연히 명확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715
여왕개미의 딸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돌본다. 종(種)에 따라서는 상대적으로 일찍 태어난 어린 새들이 어미 새를 도와 더 어린 새들을기르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호 의존적인 양육 관계가 매우 드물다. 인간의 양육은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일시적 관계가 아닌 양방향으로 작용하는 평생에 걸친 관계다. 장년기에 이른 자녀가 무능력해진 노부모를 보살피는 궁극적인 180도 전환이 일어나기이전에도,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징후가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결정짓기도 한다. 또한 자녀가 흠모하는 시선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초기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인해서, 자녀의 의존성에 함축된 애정으로 인해서, 갓 말을 배운 자녀가 혀짤배기소리로 하는 달콤한 말들로 인해서, 그 같은 보상에 대한 전망이 흔히 묵살되기도 한다. 중도 복합 장애아동의 부모들에게는 초기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드물 수 있으며, 궁극적인 상호 의존적 관계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를 돌보는 기쁨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만 있지 않다. 예컨대 프랑스 작가 아니 르클레르는 <자녀에게 느끼는 심오한 맛>에 대해 언급했으며,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다프네 드 마르네프Daphne de Marneffe는 자녀에게 반응하는 어머니의 능력이 <자녀에 대한 어머니 자신의 인식뿐 아니라 즐거움과 효율성, 자기표현에도 기여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미 오래전부터 정신분석가들은 어머니의 초기 보살핌이 자가 치료의 한 형태라고 주장해 왔다. 프로이트는 <너무나 감동적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너무나 유치하다는 점에서 볼 때, 부모의 사랑은 마치 자신이 다시 태어난듯 느끼는 부모의 자기도취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 P717
평범한 자녀의 어머니에게 존재하는 모순성의 어두운 부분은 그 자녀가 개별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평생 독립적으로 살 일이 없는 중도 장애 아동에게는 부모의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따라서 그들의 상황은 감정적으로 완전히 순수한, 소위 불가능한 상태를 요구한다. 건강한 자녀를 둔 부모들과 비교하면서 중도 장애 아동의 부모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중도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절망을 모두 느꼈다. 모순성은 당사자가 보여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도 장애 아동의 부모들 중 대다수는 그들이 느끼는 모순성의 한쪽 측면에서 행동하기로 선택했다. 줄리아 홀랜더 역시 모순성의 또 다른 한쪽 측면에서 행동하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모순성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줄리아의 가족이 느낀 모순성과 다른 가족이 느낀 모순성이 달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중도 장애가 있는 자녀와 함께 살면서 그들을 위해 용감한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이 존경받는 시대이며, 나 또한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않다. 그럼에도 줄리아 홀랜더가 자신에게 솔직했고, 다른 모든 가족들이한 일을 하나의 선택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녀를존중한다. - P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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