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 P90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과 글은 또 쓰임이 굉장히 달라요. 말은 발화자와 구체적인 맥락 모두를 담고 있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화사건 (speech event)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글은 구체적인 맥락이나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에요. 또 말은 호흡이 짧아요. 하지만 글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일종의 저장장치가 되죠. 외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역할을 한달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긴 스토리나 논리를 전개하는 게 가능한 겁니다. 예를들어, 순수하게 말로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쓸 수 있을까요? 이건안 되는 거거든요. 말로 《토지》를 풀어내는 것, 구술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대충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소설이 가진 정교함과 플롯, 그 정도의 스케일과 캐릭터를 말로써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이, 박경리 선생이 글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텍스트가 있었기에 세상을 바꾼 작품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쓰기라는 건 말을 그냥 옮겨놓는 게 아니에요. 말이 문자화되는 순간, 문자가 그 자체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예를 들면 길고 촘촘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거나,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 또 고도의 추상성을 갖춘이론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일 등이 있죠.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르크스나 헤겔, 도스토옙스키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향유하거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가 쓰기라는 겁니다. - P98
시스템을 짠다는 것은 사유로써 가능한 것이지, 말로써는 부분밖에 못 해내요. 글로 써놔야 이 부분과 저 부분을 이으면서 한편에서는 길이를 한편에서는 스케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거죠. 그냥 길이와 스케일만 늘려놓는 게 아니라 논리적 정합성, 인과적 정합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걸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소설 하나를 읽을 때도, 어떤 인물이 왜 등장했는지를 밝히지 못하면 잘 못 쓴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길게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게 하는 데서 텍스트 이상의 수단이 아직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P110
사실, 이렇게 매뉴얼화하는 것이 한국 글쓰기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뉴얼은 사유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죠. 매뉴얼은 그대로 수행하게 하지, 그것을 응용하거나 비판하거나 유연하게 활용하게 하지 않습니다. 관료조직 같은 곳에서는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것이 정석이겠습니다만, 글을 매뉴얼대로 쓰는 것은 사유하고 의견을 만들어 세상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 시민, 시민으로서 개인의 형성을 방해합니다. - P113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 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담보될 수 있는 거예요. 복수성에 대한 역량,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복수성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담론을 생산할 것인가를 가늠해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복수성에 대한 감각을 역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P113
텍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만 다양한 글을 접하고 자신에게맞는 책을 골라서 또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겠죠. 그런데 다양한 문자매체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의미 있는 지식을 뽑아내고, 나아가 자신의 문화자본으로 삼는 건 계급적으로 분배될 가능성이 높은 능력이에요. 오히려 진짜 잘사는 집에서는 자녀들한테 인문적인 소양, 과학적인 지식을 강조하죠.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모들도 노력은 하지만 물적으로, 시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자녀들이 택할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웹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재현될 기미가 보여요. 경제자본, 문화자본이 풍부한 가족의 경우에는 인터넷의 좋은 점을 잘 활용해요. 정보 습득, 학습, 엔터테인먼트 등을 위해 좋은 콘텐츠를 선별해서 활용하는 거죠. 그에 비해 ‘방치된‘ 아이들은 웹을 떠돌며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기 일쑤죠. 균형 잡힌 리터러시 경험 또한 이렇게 불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119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든 통속영화든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 P130
이건 좀 조심스러운 가설인데, 자주 접하는 매체에 대한 태도가 체화되면 사람들 간의 대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는 학생들이 강의가 재미가 없더라도 의미있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좀 참고 들어보자.‘ 하는 태도를 보였죠. 이제는 시작하면서부터 재미가 있지 않으면 그걸 들어낼 만한 의지력, 이게 안 생기는 거예요. 머리로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거죠. 선생님들은 ‘내가 무슨 엔터테이너도 아닌데, 애들을 웃겨야 돼?‘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몸은 동영상에 오래 익숙해져서 ‘몰입할 만한지 좀 보고, 아니면 만다‘는 태도에 젖어 있는 거예요. 재미가 없으면 의지나 집중력이 안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왜 그러냐고 하기가 힘들어요. 같은 텍스트를 읽을 때라도 종이책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와 모바일 기기에서 웹소설을 읽을 때 눈의 움직임이나 손가락의 까딱임, 책을 넘기기 위한 제스처가 다 다를 수밖에 없죠. 결국 다른 매체의 사용은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해가는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뇌가,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뀌는 거죠. - P14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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