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빈 같은 궁벽한 시골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꽤 규모가 큰 지하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일 항전이그들이 가장 먼저 내세운 강령이었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이 중국본토까지 점점 잠식해가는데도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다는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오직 공산주의자들을 말살하는 데 온 힘을경주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중국인이 중국인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과 싸우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장제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1936년 12월, 장제스는 자기 휘하의 두 장군에게 납치되었는데, 그를 납치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은 만주에서 쫒겨온 소원수 장쉐량이었다.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 데 공산주의자들도 한몫을 했다. 장제스가 대일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석방을 도왔던 것이다. 장제스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통일전선 형성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대일 통일전선 형성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되면 공산당이 살아남아서 세력을 키우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일본은 피부병이지만, 공산당은 심장병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연합하기로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전히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다. - P181

1942년 마오쩌둥은 "정풍운동(整風運動)"을 시작했다. 그는 옌안에서 일이 처리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왕스웨이를 우두머리로 한, 아버지 등 아카데미의 젊은 연구원들이 그들의지도자들을 비판하고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더욱 신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내붙였다. 그들의 행동이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마오쩌둥 자신도 그 대자보를 읽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그 대자보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정풍운동을 마녀사냥으로 바꿔버렸다. 왕스웨이는 트로츠키주의자요 스파이라고 고발되었다. 중국 내 마르크스주의의 최고 권위자 아카데미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이쓰치는 아카데미의 가장 젊은 연구원인 아버지가 "매우 순진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전에 아이쓰치는 "명석하고 날카로운 지능을 가졌다"고 아버지를자주 칭찬했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가차없는 비난을 받았고, 그후 몇 달 동안 회의에 나가 강도 높은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들이 옌안에 혼란을 일으켰고, 당의 단결과 기강을 약화시켰다고 했다. 당의 단결과 기강이 약화되면 일본의 침공과 가난과 불의로부터 조국을 구한다는 대의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 지도자들은 대의의 완수를 위해서 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그들에게 주입시켰다. - P183

아버지 일행이 옌안의 권위를 내세워 정부를 인수했고, 그로부터한 달 이내에 인구가 약 10만 명인 차오양 전역에서 제대로 된 행정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차오양의 부현장이 되었다. 새 정부가 맨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모든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모든전당포를 폐쇄한다는 등의 정책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었다. 전당포에 잡혔던 물건들은 빌려간 돈을 받지 않고 되돌려주기로했고, 사창가도 폐쇄하기로 했다. 창녀들에게는 포주들이 6개월간의 생활수당을 지급하도록 했다. 모든 곡물 창고의 문을 열고 거기에 저장된 곡물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했다. 일본인들과 일본 부역자들의 재산은 몰수하고, 중국인 소유의 산업체와 가게들은 보호하기로 했다.
이런 정책은 매우 인기가 높았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차오양 사람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정부조차 가져본 경험이 없었다. 군벌 시대에는 서로 다른 여러 군부대에 의해서 분탕질을 당했고, 그 후에는 일본에 점령당해 10년 넘게 착취를 당해온 고장이 바로 차오양이었다.
아버지가 새 정부의 일을 시작하고 몇 주일이 지났을 때, 마오쩌둥은 공산군에게 취약한 모든 도시와 주요 병참로를 버리고 농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간선도로를 버리고 그 양편의 땅을 점령하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이었다. 아버지일행은 차오양에서 철수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야생 풀과 간간이보이는 개암나무와 야생 과일 외에 식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지역이었다. 밤이 되면 살을 에는 강풍이 휘몰아쳐 온도가 영하34도까지 내려갔다. 밤에 제대로 된 덮개 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식량은 거의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그들의지배지역이 단숨에 북동부의 넓은 땅으로 확대되자 기쁨에 들떴던 공산당원들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던 승리가 몇 주일 만에 흔적도없이 사라지자 깊이 상심했다.  - P186

게릴라들은 무기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총을 지역 경찰로부터 얻거나 무장 지주들로부터 "빌려서" 써야 했다. 무기를 구할 수 있는또다른 중요한 출처는 전에 만주국의 군대나 경찰에 속했던 사람들이었다. 공산 게릴라들은 이들 만주국의 군인이나 경찰을 특히 높이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 경험까지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있던 지역에서 공산당이 특히 중점을 두었던 정책은 농민들이 지주들에게 바쳐야 하는 지대와 이자를 낮추는 것이었다. 공산 게릴라들은 지주들로부터 곡물과 옷가지를 빼앗아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처음에는 게릴라들의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수수가 완전히 자라 수확을 기다리고, 또 높이 자란 수숫대가 게릴라들을 숨겨주는 7월이 되자 서로 다른 게릴라 부대들이 루자춘에 모여 회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마을의 사당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회의를 열었다.  - P188

어머니는 여성연맹의 일부 상사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들은여러 해 동안 게릴라들과 어려운 생활을 했던, 나이가 더 많고 보수적인 농민 출신 여자들로서 금방 공산당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어머니같이 예쁘고 교육받은 도시의 젊은 여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어머니는 당원이 되겠다고 신청했지만, 그들은 어머니가 당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물리쳤다.
어머니는 집에 갈 적마다 "가족에게 너무 애착을 가진다"고 비판을 받았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부르주아적 습관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기 어머니도 자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혁명가는 토요일 외에는 자신의 사무실을 떠나서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할당된 숙소는 여성연맹 안에 있었다. 그 숙소는 아버지의 숙소와 낮은 토담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밤에 어머니는 그 담을 넘어서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가 이튿날 날이 새기 전에 당신 방으로 돌아오곤했다. 어머니의 그런 행동은 곧 발각되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모임에서 비판을 받았다. 공산당은 제도의 급진적 개편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 특히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의 생활까지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도 모두 정치적인 일이라고생각했다. 사실 그때부터 "개인적 또는 사적(私的)인 것은 없어지고 말았다. 하찮은 일에도 "정치적"이라는 거창한 딱지가 붙곤 했다. 회의는 온갖 종류의 개인적 적의(意)를 토로하는 토론장이 되였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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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 P151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 P156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터러시 교육에 필요한 것이, 너무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잘 때까지 너무 많은 걸 읽어요. 짧고 난잡한 글들을 너무 많이 읽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을 알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지식까지 죄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전문가나 준전문가적인 앎에 이를 수 있는가,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교육이나 리터러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물론 "그 단체가 그렇게 얘기하던데......"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 "그 단체가 하는 말이 다 맞아?" 하고 물어볼 수 있어요. 그때 제가 할수 있는 말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나는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냐. 그 단체에 직접 물어보고 나한테도 얘기해줘." 아니면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물어볼게."예요. 이런 과정을 ‘매개된다‘고 표현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매개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전혀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만사 모든 것의 진리와 선악을 판단할 정도의 역량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거든요. 어떻게 의료부터 시작해 세상만사를 다 알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피곤함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여러 전문 영역에서 대중이 신뢰할 만한 중간집단, 직능집단의 권위가 회복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신뢰가 회복되면 그 집단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굳이 대중을 향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대중은 어려운 건알 필요 없다. 그런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마는, 소위 대중사회라고 하는게 사람을 굉장히 피곤하게 하고 뇌를 혹사시키는 거죠. - P158

리터러시가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리터러시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로 생각해왔지만, 중요한 점은 아는 것을 다룰 줄 아는가의 문제라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검색하면 세종대왕이 몇 년에 한글을 창제했는지는 알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하는 얘기인가, 학생들한테하는 얘기인가, 전문가들한테 하는 얘기인가, 이런 상황에 맞는 답을주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몇 년에 한글을 창제했다는 걸 아는 데서그치는 게 아니라 다룰 줄 알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 맥락과 관계, 지금 여기에서 의미화하려고 하는 것들 속에서 다룰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검색하면 다 다온다‘라는 말은 그 다툼을 삭제 내지 결여하고있는 거죠.
리터러시뿐만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 앎의 문제일 뿐아니라 앎을 다루는 것의 문제입니다.  - P166

선생님이 책을 읽는 걸 여행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메타포가 좋아요. 여행이라는 게 즐겁지만은 않아요. 길을 잘못 들면 하루 종일 땡별 아래 걸어서 탈진할 수도 있고, 혹독한 날씨에 야영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걸 통해 내가 살아왔던 환경에 대해 반추하고 낯설게 볼 수 있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리터러시 교육이 목표로 삼아야 할태도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갈급함을 갖게 하고,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걸어보려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나 자신이 가진 지식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개인적 호기심과는 다르게, 타자들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계속 계발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끈질기게 다름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 습속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기존 권력에 복무하게 돼버려요. 예를 들면, 2019년 여름에 모 대학 청소노동자 한 분이 돌아가신 일이 있었죠. 지병이 있으셨던 건 확인이 됐다고 하지만 어쨌든 36도가넘는 찜통더위 속에서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공간에 방치되었다가 돌아가신 거잖아요. 혹독한 노동 환경이 죽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거죠. 그런데 자기 세계가 너무 강력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그냥 예외적인 사건이에요. 그 사람 안됐다. 되게 불쌍하다. 그 정도만 생각하고 지나가는 거죠. 공사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고로 죽었다 해도 예외적인 사건으로 지나치는 거예요. 만약 그 세계에 열려있다면, 그 기사를 보고 나서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고, 그걸 통해서 ‘아, 이게 그냥 그런 얘기가 아니구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것을 알게 되겠죠.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을 따라가면서 보는데 쓰는 시간만큼 그런 이슈들에 계속 열려 있기 위해 노력해야 돼요. 그런 것들을 키워줄 수 있는 리터러시 교육이 시급합니다. - P179

그게 어떤 뜻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제가 서평을 썼던 서정식 선생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 다카하시 데쓰야, 2019)에나오는 건데, 식민주의에 대한 몇몇 일본 사람의 이해가 이렇답니다. 한국인, 그들에게는 조선인에 대해 ‘순결한 피해자‘라는 표현을 쓴대요. 그 일본인들이 너무 미안해한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이 순결한 이들을 피해자로 만든 것이 미안한 거죠.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피해자라고 다 순결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기꾼도있고, 도둑놈도 있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이런 사람들한테 왜 미안해해야 되지?‘ 그러면서 그 순간 자신의 모든 도덕적 죄책감에서 해방돼버리는 거죠. 서경식 선생은 이걸 "그저 송구스럽기만 하다가 갑자기 해방된다"고 표현했는데, 이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삶에 대한 입체적 이해가 없는 무지함인가요. - P183

저는 입시의 공정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배움의 공공성이라고생각해요. 누구나 탐구와 연구를 통해 배움을 지속시키기 위해 무엇을 참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공공성의 핵심은 바로 이 무차별성에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리터러시가 공정성을 넘어 모두의 것이 되는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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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겨울부터 1948년 사이에 경제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식량 부족과 물가 폭등에 대한 항의가 빈발했다. 진저우는 진저우이북에 있는 국민당 군대에 대한 주요 보급기지였는데, 1947년 12월 중순 2만 명의 군중들이 2개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잘되는 장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린 소녀를 사창가에 팔거나부자들에게 종으로 파는 장사였다. 도시는 거지들로 넘쳐났는데, 이 거지들은 자녀들을 식량과 교환하기 일쑤였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학교 밖에 절망적인 표정의 야윈 여인이 누더기를 걸치고 언 땅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 바로 옆에 열 살쯤 되어보이는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소녀의 목깃 뒤에 막대기가 하나 꽂혀 있고, 막대기 끝에 서툰 글씨로쓴 다음과 같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쌀 한 말에 딸을 팝니다." - P151

국민당의 형편은 늦여름 내내 계속 악화되었다. 비단 군사작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부패가 더 큰 피해를 내고 있었다. 인플레가 기승을 부려 1947년 말까지 물가가 1,000배 이상 올랐다. 국민당 지역에서 1948년 말 물가는 2만8,700배로 치솟게 된다. 이용할 수 있는 주식 곡물인 수수 값이 진저우에서 하룻밤 사이에 70배나 치솟았다. 더 많은 식량이 군인들에게 공급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형편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지역사령관들은 군인들에게 공급된 식량의 상당 부분을 암시장에 내다팔았다.
국민당 최고지휘부는 전략을 놓고 분열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만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펑톈을 포기하고 진저우를 지키는 데 군사력을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일사불란한 전략을 따르도록 그의 휘하 최고위 장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미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줄 것이라는 기대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듯했다. 그의 최고참모들 사이에는 패배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9월쯤에 국민당군은 만주에 단 3개의 거점 펑톈, 창춘(만주국의 옛 수도 신징), 진저우 과 그 도시들을 잇는 철도 480킬로미터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그 3개 도시를 동시에 포위했다. 국민당군은 주공격이 어디에 가해질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주공격 대상은 3개 도시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진저우였다. 일단 진저우가 떨어지면, 다른 두 도시는 보급이 끊길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은 탐지당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국민당군은 병력 이동을 끊임없이 공격을당하는 철도에 의존했고, 그 외에는 소수의 병력을 항공기로 수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P166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한 사람은 누구나 처형하지 않고 모든 포로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공산당의 방침이었다. 이런 방침이 대개 가난한 농부 출신의 일반 병사들의 인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공산군은 포로수용소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간 및 고급 장교들만을 가두고 나머지 장병들은 금방 놓아주었다. 공산군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고충을 털어놓는" 모임을 개최하곤 했다. 그 모임에서 병사들은 토지 없는 농부로서 그들이 해온 어려운 생활에대해서 이야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혁명은 그들에게 토지를 주는데 주목적이 있다고 공산당원들은 말했다. 병사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즉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이 경우 여비가 지급되었다). 아니면 공산군에 남아 국민당을 쓸어버리는 일을 도울 수도 있었다. 국민당을 쓸어버려야 아무도 다시는 그들의 토지를 빼앗아가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대다수는 기꺼이 그곳에 남아 공산군에 합류했다. 물론 그중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한 고향으로 돌아가는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오쩌둥은 옛 중국의 전사(戰史)를 보고 사람들을 정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을 정복하는 것임을 배웠던 것이다. 포로들을 대하는 이 방침은 엄청난 효과를 내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히 진저우 전투 이후로 점점 더 많은 국민당군 병사들이 자진해서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다.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175만 명 이상의 국민당군 장병들이 공산군으로 투항했다. 내전 마지막 해에 전투 중 사상자는 국민당군이 잃은 총병력의 2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 P173

포로가 된 최고위 사령관 하나는 그의 딸과 함께 붙잡혔다. 그 딸은 만삭의 몸이었다. 포로가 된 국민당군사령관은 공산군 지휘관에게 자기도 딸과 함께 진저우에 머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공산군지휘관은 아버지가 딸의 해산을 돕기는 불편할 테니 자기가 "여성동지" 한 명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공산군 지휘관이 자기를다른 곳으로 이송시키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뒤에 그는 자기 딸이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보내주겠다던 그
"여성 동지"가 그 공산군 장교의 아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포로들에 대한 이 같은 정책은 정치적 계산과 인류애적 배려가 미묘하게 합성된 것으로 공산군의 승리를 가져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적군을 공격해서 괴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적군이 와해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은 화력에 의해서라기보더은 스스로 사기가 저하됨으로써 패배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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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0명의 소련군이 진저우에 주둔했다. 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일본인들을 쫓아내는 데 도움을 준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항복하면서 학교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개인교습을 받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로가에 주차된 트럭이 보였다. 몇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그 옆에 서서 직물을 내주고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 직물은 엄격하게배급되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 보려고 가까이 갔다. 그 직물은 어머니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서 일했던 공장에서 나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그 직물을 손목시계, 괘종시계, 장신구 등과 교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 옷장 밑바닥에 낡은 시계가 들어있던 것을 기억하고 집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 시계가 고장났음을 알고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러시아 군인들은 그것을보고 좋아하면서 섬세한 분홍 꽃무늬가 있는 피륙 한 필을 어머니에게 내주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들은 쓸모없고 낡은 고장난 시계와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물건들을 탐내는 그 이상한 외국인들이야기를 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소련인들은 공장의 물건들만 꺼내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공장 전체를 아예 뜯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진저우에 있던 2개의 정유소도 해체해서 그 장비들을 소련으로 실어갔다. 그들은 그것들이 "전쟁 보상금"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이것은 산업의 마비를 뜻했다. - P122

소련도 공식적으로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정부로 인정했다. 11월 11일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진저우 지역을 떠나 북만주까지 물러났다. 승전 후 3개월 이내에 이 지역에서 철수하겠다고 한 스탈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단독으로 이 도시를 통제하게 되었다. 11월 하순의 어느날 저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는 많은 군인들이 서둘러무기와 장비를 챙겨들고 남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도시주변의 시골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는 거라고 짐작했다.
이 퇴각은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국민당군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할 도시를 버리고 농촌지역으로 퇴각하라는 것이 마오쩌둥의 전략이었다.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서 궁극적으로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이 마오쩌둥이 새로 내린 지침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진저우에서 철수한 다음 날, 새로운 군대가 진주했다. 4개월 동안에 네 번째 군대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 군대는 깨끗한 제복을 입고 있었고, 번쩍이는 새 미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국민당 군대였다. 사람들은 집에서 뛰어나와 좁은 흙길 거리에 모여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어머니는 흥분한 군중들을 헤치고 맨앞줄로 나갔다. 문득 어머니는 자신이 두 팔을 내두르며 큰 소리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군대야말로 일본군을 무찌른 군대 같아 보인다고 어머니는 혼자 생각했다. 어머니는 매우 흥분된상태로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에게 그 멋진 새로 진주한 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P126

그제야 어머니는 영화관에서 있었던 사건이 후 청년의 비밀 임무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와 화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팠다. 어머니는 그들의 집에 세들어 사는 위우 역시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우가 후청년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은 그를 그곳에 숨기기 위해서였다. 후 청년과 위우는 그날 저녁까지 서로의 신분을 몰랐다. 두 사람은후 청년이 그곳에 머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와 어머니의 관계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요원들이그를 찾기 위해서 그 집에 온다면, 위우마저 발견될 위험이 있었다. 그날 밤 후 청년은 도시경계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공산당 통제지역까지 탈출하려고 했다. 얼마 후, 봄의 새싹이 돋아날 무렵, 위우는 후 청년이 도시를 떠나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안내하던 사람은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얼마 후 후 청년이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어머니는 국민당에 점점 더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가아는 유일한 대안은 공산당이었다. 어머니는 여성 차별을 없애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약속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열다섯 살이었던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직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에 투신할 준비가 되지않았다고 느꼈다. 후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공산당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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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 P90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과 글은 또 쓰임이 굉장히 달라요. 말은 발화자와 구체적인 맥락 모두를 담고 있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화사건 (speech event)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글은 구체적인 맥락이나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에요. 또 말은 호흡이 짧아요. 하지만 글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일종의 저장장치가 되죠. 외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역할을 한달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긴 스토리나 논리를 전개하는 게 가능한 겁니다. 예를들어, 순수하게 말로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쓸 수 있을까요? 이건안 되는 거거든요. 말로 《토지》를 풀어내는 것, 구술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대충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소설이 가진 정교함과 플롯, 그 정도의 스케일과 캐릭터를 말로써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이, 박경리 선생이 글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텍스트가 있었기에 세상을 바꾼 작품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쓰기라는 건 말을 그냥 옮겨놓는 게 아니에요. 말이 문자화되는 순간, 문자가 그 자체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예를 들면 길고 촘촘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거나,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 또 고도의 추상성을 갖춘이론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일 등이 있죠.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르크스나 헤겔, 도스토옙스키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향유하거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가 쓰기라는 겁니다. - P98

시스템을 짠다는 것은 사유로써 가능한 것이지, 말로써는 부분밖에 못 해내요. 글로 써놔야 이 부분과 저 부분을 이으면서 한편에서는 길이를 한편에서는 스케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거죠. 그냥 길이와 스케일만 늘려놓는 게 아니라 논리적 정합성, 인과적 정합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걸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소설 하나를 읽을 때도, 어떤 인물이 왜 등장했는지를 밝히지 못하면 잘 못 쓴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길게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게 하는 데서 텍스트 이상의 수단이 아직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P110

사실, 이렇게 매뉴얼화하는 것이 한국 글쓰기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뉴얼은 사유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죠. 매뉴얼은 그대로 수행하게 하지, 그것을 응용하거나 비판하거나 유연하게 활용하게 하지 않습니다. 관료조직 같은 곳에서는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것이 정석이겠습니다만, 글을 매뉴얼대로 쓰는 것은 사유하고 의견을 만들어 세상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 시민,
시민으로서 개인의 형성을 방해합니다. - P113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 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담보될 수 있는 거예요. 복수성에 대한 역량,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복수성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담론을 생산할 것인가를 가늠해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복수성에 대한 감각을 역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P113

텍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만 다양한 글을 접하고 자신에게맞는 책을 골라서 또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겠죠. 그런데 다양한 문자매체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의미 있는 지식을 뽑아내고, 나아가 자신의 문화자본으로 삼는 건 계급적으로 분배될 가능성이 높은 능력이에요. 오히려 진짜 잘사는 집에서는 자녀들한테 인문적인 소양, 과학적인 지식을 강조하죠.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모들도 노력은 하지만 물적으로, 시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자녀들이 택할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웹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재현될 기미가 보여요. 경제자본, 문화자본이 풍부한 가족의 경우에는 인터넷의 좋은 점을 잘 활용해요. 정보 습득, 학습, 엔터테인먼트 등을 위해 좋은 콘텐츠를 선별해서 활용하는 거죠. 그에 비해 ‘방치된‘ 아이들은 웹을 떠돌며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기 일쑤죠. 균형 잡힌 리터러시 경험 또한 이렇게 불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119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든 통속영화든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 P130

이건 좀 조심스러운 가설인데, 자주 접하는 매체에 대한 태도가 체화되면 사람들 간의 대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는 학생들이 강의가 재미가 없더라도 의미있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좀 참고 들어보자.‘ 하는 태도를 보였죠. 이제는 시작하면서부터 재미가 있지 않으면 그걸 들어낼 만한 의지력, 이게 안 생기는 거예요. 머리로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거죠. 선생님들은 ‘내가 무슨 엔터테이너도 아닌데, 애들을 웃겨야 돼?‘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몸은 동영상에 오래 익숙해져서 ‘몰입할 만한지 좀 보고, 아니면 만다‘는 태도에 젖어 있는 거예요. 재미가 없으면 의지나 집중력이 안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왜 그러냐고 하기가 힘들어요. 같은 텍스트를 읽을 때라도 종이책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와 모바일 기기에서 웹소설을 읽을 때 눈의 움직임이나 손가락의 까딱임, 책을 넘기기 위한 제스처가 다 다를 수밖에 없죠. 결국 다른 매체의 사용은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해가는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뇌가,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뀌는 거죠. - P14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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