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 P151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 P156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터러시 교육에 필요한 것이, 너무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잘 때까지 너무 많은 걸 읽어요. 짧고 난잡한 글들을 너무 많이 읽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을 알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지식까지 죄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전문가나 준전문가적인 앎에 이를 수 있는가,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교육이나 리터러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물론 "그 단체가 그렇게 얘기하던데......"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 "그 단체가 하는 말이 다 맞아?" 하고 물어볼 수 있어요. 그때 제가 할수 있는 말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나는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냐. 그 단체에 직접 물어보고 나한테도 얘기해줘." 아니면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물어볼게."예요. 이런 과정을 ‘매개된다‘고 표현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매개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전혀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만사 모든 것의 진리와 선악을 판단할 정도의 역량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거든요. 어떻게 의료부터 시작해 세상만사를 다 알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피곤함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여러 전문 영역에서 대중이 신뢰할 만한 중간집단, 직능집단의 권위가 회복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신뢰가 회복되면 그 집단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굳이 대중을 향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대중은 어려운 건알 필요 없다. 그런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마는, 소위 대중사회라고 하는게 사람을 굉장히 피곤하게 하고 뇌를 혹사시키는 거죠. - P158

리터러시가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리터러시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로 생각해왔지만, 중요한 점은 아는 것을 다룰 줄 아는가의 문제라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검색하면 세종대왕이 몇 년에 한글을 창제했는지는 알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하는 얘기인가, 학생들한테하는 얘기인가, 전문가들한테 하는 얘기인가, 이런 상황에 맞는 답을주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몇 년에 한글을 창제했다는 걸 아는 데서그치는 게 아니라 다룰 줄 알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 맥락과 관계, 지금 여기에서 의미화하려고 하는 것들 속에서 다룰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검색하면 다 다온다‘라는 말은 그 다툼을 삭제 내지 결여하고있는 거죠.
리터러시뿐만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 앎의 문제일 뿐아니라 앎을 다루는 것의 문제입니다.  - P166

선생님이 책을 읽는 걸 여행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메타포가 좋아요. 여행이라는 게 즐겁지만은 않아요. 길을 잘못 들면 하루 종일 땡별 아래 걸어서 탈진할 수도 있고, 혹독한 날씨에 야영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걸 통해 내가 살아왔던 환경에 대해 반추하고 낯설게 볼 수 있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리터러시 교육이 목표로 삼아야 할태도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갈급함을 갖게 하고,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걸어보려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나 자신이 가진 지식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개인적 호기심과는 다르게, 타자들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계속 계발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끈질기게 다름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 습속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기존 권력에 복무하게 돼버려요. 예를 들면, 2019년 여름에 모 대학 청소노동자 한 분이 돌아가신 일이 있었죠. 지병이 있으셨던 건 확인이 됐다고 하지만 어쨌든 36도가넘는 찜통더위 속에서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공간에 방치되었다가 돌아가신 거잖아요. 혹독한 노동 환경이 죽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거죠. 그런데 자기 세계가 너무 강력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그냥 예외적인 사건이에요. 그 사람 안됐다. 되게 불쌍하다. 그 정도만 생각하고 지나가는 거죠. 공사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고로 죽었다 해도 예외적인 사건으로 지나치는 거예요. 만약 그 세계에 열려있다면, 그 기사를 보고 나서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고, 그걸 통해서 ‘아, 이게 그냥 그런 얘기가 아니구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것을 알게 되겠죠.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을 따라가면서 보는데 쓰는 시간만큼 그런 이슈들에 계속 열려 있기 위해 노력해야 돼요. 그런 것들을 키워줄 수 있는 리터러시 교육이 시급합니다. - P179

그게 어떤 뜻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제가 서평을 썼던 서정식 선생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 다카하시 데쓰야, 2019)에나오는 건데, 식민주의에 대한 몇몇 일본 사람의 이해가 이렇답니다. 한국인, 그들에게는 조선인에 대해 ‘순결한 피해자‘라는 표현을 쓴대요. 그 일본인들이 너무 미안해한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이 순결한 이들을 피해자로 만든 것이 미안한 거죠.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피해자라고 다 순결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기꾼도있고, 도둑놈도 있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이런 사람들한테 왜 미안해해야 되지?‘ 그러면서 그 순간 자신의 모든 도덕적 죄책감에서 해방돼버리는 거죠. 서경식 선생은 이걸 "그저 송구스럽기만 하다가 갑자기 해방된다"고 표현했는데, 이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삶에 대한 입체적 이해가 없는 무지함인가요. - P183

저는 입시의 공정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배움의 공공성이라고생각해요. 누구나 탐구와 연구를 통해 배움을 지속시키기 위해 무엇을 참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공공성의 핵심은 바로 이 무차별성에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리터러시가 공정성을 넘어 모두의 것이 되는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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