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같은 공안당국적 시각(視角)은 지극히 명백한 한 가지 사실. 즉 이 젊은이들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태어나서 우리 사회에서 자라난 우리의 아들딸이요 형제자매라는 사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동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들이 ‘운동권‘에 뛰어들고 ‘위장취업자가 되게 된 것은이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병폐 이 젊은이들의 순결한 양심으로 하여금도저히 소리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온갖 불의와 비리, 억눌린 사람들의아픔, 그리고 그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도덕적 결단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의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래의 경제성장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고서도 그 성과로부터는 철저히 소외되어온 대다수 노동계층의 현실, ‘선진조국‘을 운위하게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기본급 10만원 미만짜리가 허다한 살인적 저임금과 세계적으로 가장 혹심한 장시간 중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면서 멸시와 천대 속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 남들이라면 한창 부모 품에서 재롱을 부릴 나이인 열세살의 어린 소녀시절부터 소음과 먼지로 뒤덮인 숨막히는 작업장 원단더미 속에 파묻혀 십년여일하게 눈이 오나 비가오나 변소 갈 틈도 없이 잔업에 철야에 뼈빠지게 노동을 하였으나 남은 것은 병든 육신과 지칠 대로 지친 영혼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스물세살 미싱사의 눈물,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해고를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구로공단의 뒷골목을 힘없이 배회하는 해고노동자들의 탄식, 기본급 10만원을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회사폭력배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각목과 발길질로 집단폭행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구속된 구속노동자의 분노, 그리고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인간다운 삶의 꿈 때문에,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꽃다운 젊은 목숨을 스스로 불길 속에 던져넣는 분신노동자들의 잇따른 참혹한 죽음 - 바로 이런 것들이 보다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이 젊은이들, 어쨌거나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던 행운을 타고난 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더이상 그 행운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도록, 더이상 그 부모들이 기대하는 대학졸업의 경력에 걸맞는 안일하고 안전한 삶의 길을 갈 수 없도록 만들고 그 대신에 ‘운동권‘과 ‘위장취업‘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이라는 사실, 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젊은이들은 우리사회에서 오랜 동안 기성세대가 보여주지 못했던 놀라운 도덕적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제 36년의 이민족지배와 외세에 의한 분단의 쓰라린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도덕적 건강성은 심대하게 훼손되었고 사회적 양심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우리의 최근세사는 불행하게도 권선징악의 교훈에 친하지 못합니다. 반민족적 • 반민주적 · 반사회적 행위에 대하여 응당한 응징이 가해진 일이 없었고 한편 수많은 항일투사와 그 자손들의 불우한 생애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듯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애정과 헌신에 대하여 그 어떤 정신적 보상조차도 주어진 일이 없었습니다. 이같은 왜곡된 역사 속에서우리들 대다수의 기성세대는 일찍부터 부모들과 선배들과 사회로부터 힘 앞에 순종하고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자기만의 안일을 추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 비겁하며 왜소한 인간이 되도록 교육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 P113

이같은 기성세대의 눈으로 볼 때, 오늘의 젊은이들이 대학출신자에게 보장되어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하여 일생을 걸고노동현장에 취업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로 비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기성세대는 우리들의 척도로 이 젊은이들을 판단하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이제 우리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세대,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대, 그들의 양심을 스스로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젊은 세대가 자라났다는 사실입니다. 이새로운 세대는 민주화의 국민적 갈망을 불러일으킨 4.19의 감격으로부터 시작된 60년대와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일깨운 전태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70년대, 그리고 광주사태라는 엄청난 민족적 참화로부터 시작된 80년대의 시련을 거치면서 서서히 회복되어온 우리 민족의 도덕적 원기와 사회적 양심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젊은이들 중 일부가 일시적으로나마 현실의 벽 앞에 부딪쳐 절망한 나머지 파괴적 충동에 휩싸일 위험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부작용은 우리 사회가 이 젊은이들의 항의와 비판을 경청하고 거기에 대하여 성실하게 대응할 자세를 갖추게 될 때, 그리하여 민주적 기본질서가 확립되고 사회정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이 기울여지며 사회의 도덕적 건강성이 회복되게 될 때에, 자연히 치유되고해소될 수 있는 문제이고, 또 반드시 그같은 과정을 통하여서만 치유되고 해소될 수 있는 문제라고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며, 그같은 부작용이 일어날 우려가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젊은이들이 노동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탓하거나 억압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말해두고자 합니다. - P115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 혼탁하고 타락한 세대의 신화가 되어버린 권양의투쟁에서, 일찍이 김수영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흐르는가"를 배웠습니다.
권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권양이 이미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현실적으로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은 만천하에 낱낱이 공개될 것이며, 그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들었던 모든 어리석고 비겁한 책동은 하나도 남김없이 타파될 것입니다.
이 진실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선 우리 모두는 권양이우리에게 바친 헌신에 만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도록 각자의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제 저 잔혹하였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권양은 이 법정에 섰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눈물로써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이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순결무구한 처녀는 이 시대의 모든 죄악과 타락과 불의를 속죄하는 제물로서 역사의 제단 앞에 스스로를 바쳤으며, 우리들 중 누구도 이 시대에서 가장 죄가 없는 이 처녀를 더이상 단 한시라도 차디찬 감옥 속에 갇혀 있게 하는 죄악의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1986.11.21. - P133

 ‘김근태씨 고문사건‘에 관해서 재작년 연말에 대한변협 인권위원•들이 관련경찰관들을 검찰에 고발한 일이 있는데, 만 1년이 지나 검찰이 "증거가 없다"고 하는 이유로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우리를 새삼스레 막막한 절망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고문이란 성질상 밀실범죄이다. 고문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 같은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가 없는 노릇이고, 피해자 본인의 진술과 경우에 따라서는 고문 직후 신체에 남아 있는 상처 등 고문흔적 정도가 고문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의 전부이게 마련이다.
김근태씨의 경우 본인은 1, 2심 공판과정을 통하여 시종일관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상하게 진술하였고, 그 내용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이에 대하여 그의 주장이 날조라고 하는 적극적인 반론은 제기된 것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김근태씨는 검찰에 송치된 직후 신체에 남아있는 고문흔적에 관한 증거보전신청을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신청을 기각하여 결국 증거보전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후 1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검찰은 "고문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무혐의 결정이 타당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항고나 재정신청 등 법절차내에서 따져야 할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정도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또 그런대로 증거자료가 풍부했던 고문사건에 있어서조차 고문경찰관에 대해 무혐의 결정이 내려진 이상, 우리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고문경찰관이 처벌되는 일을 좀처럼 보기 어렵게 될 것이고 따라서 고문이 근절되는 것을 희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민주화를 입에 올릴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백 가지를 다 못하는 일이있을지언정 최소한 고문을 근절시키는 일 하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점에서 김근태씨 고문경관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결정은 우리로 하여금 정부·여당의 민주화 의지를 좀체로 신뢰하기 어렵도록 만들고 있다.
••••••
붓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서울대학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하였다는 참혹한 소식을 들었다. 아아, 무엇을 더 말하랴. 눈앞이 캄캄하고 손발이 떨려 더이상 붓을 옮길 수가 없다. 슬프다.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천도(天道)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신동아, 1987.2)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피부는 진동하는 물체와 접촉하면 그 진동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몸 어느 부위의 피부든 마찬가지다. 이것이 촉각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이다. 자연선택의 결과 이 기능은 점진적으로 발달하여 아주 미세한 진동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민감한 촉각이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킬 때 이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또는 소리가 작더라도 진동원이 충분히 가까우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더욱 민감해진다. 자연선택은 이제 공기를 진동시키는 진동원이 점차 멀어져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기관(귀)을 진화시키도록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적인 발전을 거쳐 완전한 귀로 진화하는 연속적인 경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반향 위치 결정 기술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모든 동물은 청각을 갖고 있고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맹인들은 종종이 메아리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러한 초보적인 형태의 기술이 고대의 포유류에서 시작했을 것이고, 이것은 박쥐가 완성한 고도의 기술에 단계적으로 접근해 가는 데 필요한 기초로서 충분하다. - P157

이처럼 피상적으로 유사한 귀결점에 수렴하는 예 중에 종종 기막힌것이 있다. 그것들 중 몇 가지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 장을 마치려고 한다. 이것들은 자연선택이 얼마나 뛰어난 기관을 설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예들이다. 피상적으로 닮은 그 기관들 역시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독립적인 진화의 역사와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기본 원리는 이렇다. 일단 어떤 설계가 진화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라면 똑같은 설계 원칙은 동물계의다른 영역에서, 다른 출발점에서 다른 진화 경로를 거쳐 재차 진화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뛰어난 설계를 보여 주는 실제의 예를 기술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것은 바로 반향 위치 결정법이다.
반향 위치 결정법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박쥐(그리고 인간이 발명한 도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박쥐와 관련이 없는 다른여러 동물 집단 또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조류 중에 최소한 두 그룹이이 방법을 사용하며, 돌고래와 고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정교한 반향 위치 결정법을 사용한다. 또한 이 방법은 최소한 2개의 서로 다른 박쥐 집단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견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 P164

그 세 대륙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맞춰 공룡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을때, 거기에 있었던 원시 포유류는 모두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야행성이었을 것이며, 그 전에는 공룡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 지역에서 전혀 다른 진화의 길을 걸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멸종된 남아메리카의 자이언트 그라운드나무늘보를 닮은 동물이 구대륙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포유류에는 멸종된 자이언트기니피그가 포함된다. 이 동물은 지금의 코뿔소만 한 크기였지만 쥐와 같은 설치류이다.(지금의‘ 코뿔소라는 말을 쓴 이유는 구대륙의 동물군에는 한때 이층집만한 거대한 코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3개의 대륙에서 각기 독특한 포유류가 진화했지만 진화의 일반적인 형태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3개의 지역 모두에 포유류가 있었고, 그것들이 진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결과각각의 생활 방식에 알맞는 전문가들이 탄생했으며 다른 대륙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각각의 생활방식. 이를테면 땅파기, 대형 초식 동물 사냥, 풀 뜯어먹기 등은 분리된 2개 혹은 3개의 대륙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수렴 진화하는 대상이었다. - P175

초식 동물도 마찬가지로 생활 방식을 더 세분화할 수 있다. 다른 생활 방식도 마찬가지다. 초식 동물은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포식자를 경계한다. 그리고 대개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어서 포식자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개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진화 과정을 통해 특별히 길고 단단해진 발가락 끝으로 달린다. 이 특별한 발가락의 끝에 달린 발톱은 크고 단단하게 변해서 이른바 발굽이 되었다. 들소는 네 다리 모두 발 끝에 2개의 커다란 발가락이 있다. 이른바 갈라진발굽이다. 말도 마찬가지로 발굽을 가지게 되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있다. 그들은 2개의 발가락 대신 1개의 발가락으로만 달린다. 이것은 아마 말의 진화사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일 것이다. 말의 조상은 원래발가락이 5개였다. 나머지 4개는 진화 과정에서 완전히 퇴화되었다. 가끔 발가락이 5개 달린 기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대형 초식 동물은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동물이 바로 캥거루이다. 캥거루도 마찬가지로 빨리 달릴 필요가 있는데 이들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말처럼 (그리고 아마 리톱턴스처럼) 네 다리로 뛰는 방법을 완벽한 수준까지 발전시키는 대신, 캥거루는 두 다리로 뛰고 커다란 꼬리로 균형을 잡는 고난이도 기술을 완성했다.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는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신체를 최대한 활용할 수있는 방법을 발달시킨 것이다. 말과 리톱턴스는 네 다리로 달리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거의 똑같은 다리 모양을 갖게 되었다. 캥거루는 두 다리로 뛰는 방법을 사용했고 그 결과 그들만의 독특한 (최소한 공룡 이후로는) 굵은 뒷다리와 꼬리를 갖게 되었다. 캥거루와 말은 동물 공간에서 전혀 다른 종착점에 도달했다. 이것은 아마 출발점이 서로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 P177

 흰개미는 이름에 개미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개미가 아니라 바퀴벌레와 유연관계가 있다. 사실 개미는 꿀벌이나 말벌과 유연관계가 있다. 흰개미는 겉모습이 개미를 닮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했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의생활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개미와 흰개미의 생활 방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이들은 모두 각각 독립적으로 그생활 방식들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다른 수렴 진화의 예와 마찬가지로이들에게서도 유사성뿐만 아니라 차이점도 발견된다.
개미와 흰개미는 커다란 집단을 이루고 살며 이 집단의 대부분은 생식 능력 및 날개가 없는 노동 계급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 노동 계급은날개가 달린 생식 계급을 효과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생식 계급은 무리를 떠나 새로운 집단을 건설한다. 재미있는 것은 개미의 경우는 노동 계급이 모두 생식 능력이 없는 암컷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흰개미의 경우는 수컷도 있고 암컷도 있다는 것이다. 개미나 흰개미나 모두 집단 안에 한 마리(어떤 경우는 여러 마리)의 커다란 여왕개미‘가 있다. 이 여왕개미는 (개미와 흰개미 모두) 대개 몸집이 거대하다. 개미와 흰개미 모두 노동 계급에 병정개미와 같은 전문화된 계급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들은 커다란 턱을 무기로 갖고 있으며 (흰개미의 경우는 화학전을 치를 수 있는 ‘소총‘을 가진 종류도 있다.) 대개 물불을 안 가리는 싸움꾼이다. 이들은 혼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병정개미가 아닌 일개미가 먹여 줘야만 한다. 개미의 특정 종이 흰개미의 특정 종에 대응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곰팡이를 기르는 습성은 (신대륙의) 개미와 (아프리카의) 흰개미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생겨났다. 그 개미(또는 흰개미)는 자신들이 소화시킬 수 없는 식물로 곰팡이가 자랄 수 있는 퇴비를 만들고 그 퇴비에서 자란 곰팡이를 먹는다. 두 경우 모두 그 곰팡이는 개미의 집이나 흰개미의 집 말고는 어디서도 자라지 않는다. 곰팡이를 기르는 생활 방식은 개미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딱정벌레도 (한 번 이상)독립적으로 수렴 진화시킨 습성이다. - P182

개미들은 서로의 몸을 마치 땅을 밟듯이타고 넘으며 내 옆을 행진해 갔다. 나는 2시간이 넘도록 여왕개미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개미가 나타났다. 여왕개미의 모습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몸뚱이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단지성난 노동자들의 물결 (개미들의 행렬이 가두시위하는 군중의 모습과 흡사하며 또한 대부분이 일개미, 즉 노동 계급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다. 옮긴이)이 여왕개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일개미들이 여왕개미를 보호하기위해 서로서로 다리를 걸고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맥동하는공처럼 보였던 것이다. 여왕개미는 일개미들로 이루어진 그 공의 중심 어딘가에 있었다. 그 공을 둘러싸고 있는 병정개미들은 여차하면 물어뜯을 듯이 바깥쪽으로 턱을 내놓은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모두들 여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싸우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왕을 보고 싶은 내 호기심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여왕을 끄집어낼 헛된 욕심으로 일개미로 이루어진 그 공을 긴 막대기로 찔러 보았다. 곧바로 20마리가량의 병정개미들이 집게와 같은 강력한 턱을 내막대기에 박아 넣어 막대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붙들었다. 그러는 동안열댓 마리가 막대기를 타고 올라왔고 나는 놀라서 그만 막대기를 놓고말았다.
여왕개미는 결국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맥동하는 공의 중심 어딘가에는 중앙 정보 은행이자 개미 집단 전체의 마스터 DNA를 저장하고 있는 여왕개미가 있을 터였다. 그 위협적인 병정개미들은 여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충성심을 갖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뇌와 그들의 턱이 여왕개미가 가지고 있는 원본으로부터 복제된 유전자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여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병정개미를 만들 수 있는 여왕개미와 그 유전자가 살아남았고 이유전자가 병정개미에게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용감한 군인처럼 행동한다. 옛날의 병정개미들이 옛날의 여왕개미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듯이 내가 건드린 병정개미들도 지금의 여왕개미로부터 같은 유전자를 받았다. 병정들은 원본을 지키라는 지시가 들어 있는 바로 그 원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의 지혜, 즉 모세의 십계명을 지키고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그다 언니는 남자와 연애를 한다. 죽음의 손짓에 답하는 언니만의 방식이다. 마그다 언니는 파리에서 온 프랑스인 남자를 만나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무슨 거리에 살았다고 한다. 나는 이 주소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학반응이 있다. 눈부시게찬란하고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들은 화창한 여름날에 쨍그랑거리는•작은 접시를 사이에 두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듯이 대화를 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성스러운 맥박을 공포와 부딪히는 부싯돌로 사용해 불꽃을 만들어낸다. 영혼을 망가뜨려서는 안 돼. 횃불을 들 듯 영혼을 높이 들어야 해. 프랑스인 남자에게 언니의 이름을 말하고 그의 주소를 챙겨. 그리고 빵을 먹듯 그것을 음미하고 천천히 씹어먹어. - P127

예전에 이러한 순간-강제수용 생활의 끝, 전쟁의 끝을 상상할 때나는 환희가 가슴에서 넘쳐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목청껏 외치리라고 상상했다. "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목소리가 없다. 우리는 침묵의 강물이다. 군슈키르헨의 묘지로부터 근처의 마을을 향해 흐르는 해방자들의 물결이다. 나는 임시로 만든 수레에 타고 있다. 바퀴가 끼익 소리를 내며 삐거덕거린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한다. 이 자유에는 어떠한 환희도 안도도 없다. 우리는 숲에서 느리게 걸어 나온다. 멍한 얼굴을 하고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든다. 자유는 잘못된 종류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게 하는 위험이다. 자유는 상처, 이, 발진티푸스, 잘린 배, 힘없는 눈이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이처럼 조용하게 또 고통이 덜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사람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인도적‘인 일이 될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일에 그것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한다면, 칼날 아래 목이 잘려 죽거나 총알에 맞아죽는 대신에 밧줄에 목매달려 죽는다고 하여 더 ‘인도적‘이며 덜 ‘야만적‘인 처우를 받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에 우리가 끔찍한 공개처형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 죽음에 대하여 갖게 되었던 깊은 관심을, 이제 더는 우리 눈앞에는 그같은 끔찍한 장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여버리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인도주의의 탈 아래 은폐된 국가의 야만은 오히려 더욱더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자들, 특히 사형수들은 흔히 사회의 쓰레기처럼 여겨진다. 보통사람들은 대개 사형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사형수를 본 일도 없기 쉬우며, 이웃이나 친척, 친지 중에도 사형수가 있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자. 사형수들에 대한 문제는 경찰, 검찰, 법원 또는 교도소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억울한 사형수‘의 문제에 대하여는 ‘인권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있지않은가, 병은 의사에게 맡기고 교육은 학교에 맡기듯이 재판은 판사에게 맡겨두면 되지 않는가, 검사, 판사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제도에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다. - P91

우리나라 헌법의 이념에 입각하여 판결을 내린다면 지극히 간단하다. 이개는 무적이다. 죄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이 개를 걷어찬 신사에게 있다. 걷어차인 개는 "저 신사가 날 걷어찬 것은 부당한 일이고 걷어차인 나는 아프고억울하다"고 생각할 권리즉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나아가 그 신사를 향하여 "당신이 날 걷어찬 것은 부당한 일이고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라고 짖어댈 권리즉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 신사의 ‘불안‘은 그가 개를 까닭 없이 걷어참으로써 자초한 것이지 아프기 때문에 짖어댄 개에게 책임이있는 것은 아니다. 개를 침묵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질서‘ 그것은 민주주의가 원하는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부당하게 걷어차인 개는 마땅히 시끄럽게 짖어대야 하고 그같은 소란을 통하여 신사와 개 사이의 올바른관계가 회복되어가는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바라는 역동적인 질서 즉 ‘민주적 기본질서‘이다.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침묵 위에 자리잡아 유지되는 평온 그것은 죽음의 질서이며 사이비 질서이며 반(反) 질서이다. 그같은 불의의 질서를 위하여 약한 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 개는 명백히 무죄이다. 너무나 쉽다. 대체 무슨문제가 있는가? - P95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집시법‘ 제3조 제2항 제4호의 ‘현저히 사회적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에 관한 처벌규정과 경범죄처벌법제1조 제44호의 ‘유언비어 날조 · 유포‘에 관한 처벌규정을 들 수 있다. 위처벌규정들은 어느 것이나 ‘사회적 불안의 야기‘ 또는 ‘사회의 안녕 질서 저해‘ 등을 그 구성요건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 불확정개념들을 구체적 사안에 관하여 어떻게 해석,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법령에 더이상 참고할 만한 세부규정이나 정의규정 (定義規定)이 마련되어 있지 아니할 뿐더러 판례 · 학설상으로도 아직 이렇다 할 만한 뚜렷한 원칙이나 기준이 확립된 바 없다. 이같은 상태 아래서는 법집행자의 의도 여하에 따라 이 불확정개념들이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로서 남용될 위험이 존재하며, 작금의 상황이 그러한 위험의 존재를 실증하고 있다.  - P101

‘표현의 자유‘는 그토록 무력한 것인가? ‘사회질서‘란 그토록 고요한 것,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 죽음에 가까운 것인가? 그같은 침묵의 ‘질서‘가옹호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옹호되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는 것인가? - P111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있는 이름없는 유명인사, 얼굴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양의 투쟁‘ 저 처참하고 쓰라린, 그러면서도 더없이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성에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올 ‘권양의 승리‘, 우리 모두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해맑은 연꽃처럼 오늘 이 법정을 가득히 비추고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 그 백설 같은 순결, 어떤 오욕과 탄압으로도 끝내 꺾을 수 없었던그 불굴의 용기와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법정에서 이룩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물은 그렇지 않다. 진화에는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없다. 먼 미래의 목표, 선택의 기준이 될 궁극적인완벽함 따위는 없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 인간이라는 믿음은터무니없는 인간 허영심의 산물에 불과하다. 실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항상 단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체의 생존이거나 아니면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공적인 번식이다.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이 어떤 머나먼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단기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러 세대에 걸친 우연적인 결과이다. ‘시계‘, 즉 누적적인 자연선택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 P96

 유전자의 성질은 그들이 자리 잡은 신체의 발생 과정에 참여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신체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다음 세대로 전해질 가능성이 영향을 받는다. 컴퓨터모델에서 발생과 번식이라는 2개의 과정을 2개의 독립된 프로그램으로작성하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번식이 발생을 통해서 유전자의 값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또한 발생 과정 동안 성장 규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과정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발생은 절대로 유전자값을 번식에 되돌려 주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라마르크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 P105

2개의 프로그램에 각각의 기준들을 정리하고, 거기에 발생과 번식이라고 표시를 하자. 번식은 돌연변이가 일어날 확률과 함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 발생은 번식을 통해 주어진 유전자들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는 동작으로 번역한 다음 컴퓨터 화면상에 신체의 그림을 나타낸다. 이제 2개의 프로그램을 진화라는 더 큰 프로그램에 합칠 때가되었다.
진화는 기본적으로 번식의 끝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세대에서 번식은 앞 세대로부터 유전자들을 받아 무작위적이며 조그만 실수인 돌연변이와 함께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유전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값에 단순히 +1 또는 -1을 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한 번에 하나씩 작은 변화들이 쌓이게 되고 결국 유전적 변이의 총량이 원래 조상과 비교하여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축적되는 변화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한 세대의 자손은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부모와 달라진다. 그러나 그 자손들 중 어느 것이 선택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인지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다원의 자연선택 이론이 도입될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선택의 기준은 유전자들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들이 발생을 통해 영향을 미친 신체의 형태다.
각각의 세대에서 유전자들은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발생으로 넘겨진다. 발생은 고유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화면 위에 적절한 신체의 모양을그린다. 매 세대의 ‘자손들‘ (즉 다음 세대의 개체들) 전체가 화면에 나타난다. 자손들 모두는 같은 부모에서 나온 돌연변이들로 부모와 유전자하나가 다르다. 이러한 매우 높은 돌연변이율은 컴퓨터 모델에서나 볼수 있는 것으로 명백히 비생물적인 양상이다. 실제 세계에서 하나의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킬 확률은 대개 100만분의 1보다 작다. - P106

컴퓨터를 가지고 재미있게 자연선택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는 로코코 양식 따위나 시각적으로 정의된 다른 모든 성질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대신 선택적인 죽음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바이오모프들은 컴퓨터 속에 조성된 혹독한 환경 조건과상호 작용을 해야 한다. 그것들이 가진 형태의 어떤 특징이 그 환경 조건에서 그것들의 생과 사를 결정할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그 혹독한 환경 조건에는 다른 바이오모프, 즉 ‘포식자‘, ‘먹이‘, ‘기생체‘, ‘경쟁자‘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먹이가 되는 바이오모프의특정한 모양은 특정한 형태의 포식자 바이오모프에 붙잡힐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한 판단 기준은 프로그래머가 설정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형태의 바이오모프들이 저절로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판단 기준들도 저절로 생겨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에서 일어나는 진화는 진정으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진화를 닮아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생겨나는 조건들은 결국 먹이와 포식자 모두가 스스로를 강화하는 ‘군비 확장 경쟁에 접근할 것이기 때문이다. - P113

이것이 바이오모프의 나라를 빌려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독자들이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9개의 유전자를 가진 바이오모프가 아닌, 각각 수만 개의 유전자를 가진 세포 수십억 개로 이루어진, 살과 피를 가진 동물들로 가득 찬 수학적인 공간이 있다. 이것은 바이오모프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의 유전자공간이다. 지구에서 과거에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동물들은 이론적으로 존재가 가능한 수많은 동물들 중 작은 소집단에 불과하다. 이 실제동물들은 유전자 공간을 통과하는 아주 적은 수의 진화 경로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 공간에 있는 다른 많은 이론적인 경로를 통하면 상상을초월한 괴물들이 나오게 된다. 실제 동물들은 그 가상의 괴물들 주위 여기저기에 점으로 표시되며, 각각은 이 유전자 초공간에서 고유의 위치를 차지한다. 각각의 실제 동물들은 이웃들이라는 작은 집단으로 둘러싸인다. 그 이웃들의 대부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몇몇은 그들의조상이거나 자손이거나 사촌이다.
이 거대한 수학적인 공간의 어느 곳에 인간과 하이에나, 아메바와 개미핥기, 편형동물과 오징어, 도도새(인도양 모리셔스 섬에서 살았던 날지못하는 새로 지금은 멸종되었다. 옮긴이)와 공룡이 자리 잡고 있다. 만약 유전공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우리가 생물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다룰 수있다면, 이론적으로는 동물 공간의 한 점에서 다른 어떤 점으로든 자유롭게 옮겨 갈 수 있다. 시작하는 점이 어디든 우리는 미로를 찾아 헤매어 도도새, 티라노사우루스, 삼엽충 등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단지 어떤 유전자를 수선해야 하는지, 그리고 염색체의 어떤 부분을 복제하고 뒤집고 삭제해야 하는지 알기만 한다면 말이다. 인류가 그 정도로 충분히유전공학에 능통하게 될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 친애하는 멸종된 동물들은 그 거대한 유전자 초공간 속에 있는 그들만의 고유한 장소에 언제까지나 잠복해 있으면서 (우리가 미로 속에 있는 정확한 경로를 찾아항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되었을 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비둘기를 선택적으로 번식시킴으로써 도도새를 정확하게 재창조하는진화를 이루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실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우리 인간이 100만 년 동안 살아남아야 하지만...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