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아무런 목적 없이저지르는 그 사소한 범죄 행위는 일상의 타락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기만족적인 삶의 일부로서 이렇듯 사소한 악행들을 저지르고 산다.
그가 정말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그릇된 사랑과 죄악을 자연스럽게 쫓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죄에 묘하게 매료된다. 우리는 유명인사가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결국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명되면 조금 실망하곤 한다. 귀여운 아이들도 아무할 일 없이 내버려두면 금세 말썽을 일으킬 방법을 찾아내곤 한다.(영국 작가 G. K. 체스터턴은 화창한 일요일 오후, 따분함을 참을 수 없게 된 아이들이 고양이를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죄악이 실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동지애나 우정 같은 아름다운 관례도 더 고귀한 소명과 연결되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다. 배를 훔친 일화도 타락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날 밤 혼자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날 소년들이 그런 일을 벌인것은 동지애를 나누고 싶은 욕망, 서로를 치켜세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패거리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상황에서라면 양심에 꺼린다고 생각할 일을 할 때가 많다. 올바른 목표와 연결되지 않은 집단은 개개인보다 더 야만적일 수 있다.  - P351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마니교와 절연하는 것으로 그 첫걸음을 뗐다. 세상이 칼로 자르듯 순수한 선과 순수한 악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선은 항상 악을 동반한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에는 자만심이, 정직함에는 무자비함이, 용기에는 만용이 따르는 식으로 말이다.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루이스 스메데스는 우리 내면세계의 얼룩진 본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며 아우구스티누스적 사상을 드러냈다.
「우리 내면의 삶이 밤과 낮처럼 구분되어, 한쪽은 순수한 빛만이,
다른 쪽은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영혼은 그늘진 곳과 같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차단하고,
내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경계에 살고 있다. (..) 우리가 늘 어디에서 빛이 끝나고 그림자가 시작되는지, 어디에서 그림자가 끝나고 어둠이 시작되는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354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죄를 더 크게 만들게 된다고 믿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만의 죄를 허용하는 것이다.
- P357

고대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는 말을 더듬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위대한 웅변가가 되었다고들 한다. 결함이 오히려 그와 관련된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영웅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존슨은 자신의 결함 때문에 위대한 도덕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이 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선이 악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존슨은 자신의 결점을 치유하기보다 완화할 방법을 모색한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결함과 영원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결함에도 연민을 가질 수 있었다. 존슨은 도덕주의자였지만, 인정 많은 도덕주의자였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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