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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평점 :
내가 망설임없이 양자 물리학에 관한 책을 선택한 이유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다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이 위안의 방편이 아닌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임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불교철학이 말하는 공사상을, 이 세계가 환영이라는 사실과 공명한다. 양자 세계를 통해 존재의 부재를, 궁극적 실재의 공함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하고 있고, 나의 본질,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그 어느책보다 친절하게 이해시킨다. 세상은 고전 물리학이 설명하던 그런 게 아니었다. 개념적 명료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미래가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불확정성의 세계인 것이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p055
책은 이 세계가 정해진 실재가 없다는, 무엇이 있는지 알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들, 그리고 의식의 본질까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관찰'할 때에만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관찰하는 '나'도 관찰될 수 있는, 그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도 명료하게 밝힌다. 좀 더 풀어 말하면 나무, 돌, 꽃, 가족, 학교, 나라.. 즉, 대상은 개별적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두 대상과의 상호작용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세상을 설명하는 최선이라고 책은 말한다. 대상이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때에도 속성을 갖는다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대상은 관계적이라는 것! 이 세상에 절대적인 속성을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론이 말하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인지하지 못한다. 세상은 늘 확정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양자 세계의 무수히 많은 불연속적인 변수들은 연속적이고 잘 정의되어 매끈하게 보여진다. 그렇기에 양자적 세계와 일상적 경험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우리 머릿속의 세상과 실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음이 확실해졌다. '나'라는 존재도 자연의 일부일 뿐,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 '나'라는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
실재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경험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죠.
과거에 우리가 해왔던 일반화를 절대적 진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p163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절대적인 세상같은 건 없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실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맞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내가 관찰할 때, 개입하고 상호작용할 때 세상은 만들어진다. 때문에 지금껏 믿어 왔던 세계관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래야 가볍게, 소중하게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이미지일 뿐,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기에.
정말 탁월한 책이다. 오랜만에 곁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과학과 철학을 함께 아우르는 존재의 사유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