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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평점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작가를 잘 모른다. 그녀의 전작 6권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이끌린다. 표지도 예쁜 이 책에는 20권의 책을 통해 만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아주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의 주인공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묘사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아울러 썼다. 흔들리는 고난 앞에 어떻게 자신을 지켜냈는지 끝까지 버틴 힘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마치 훌륭한 서평가의 책 같다.
“세상은 대개 내 생각보다 너그럽다. 내게 가장 가혹하고 엄격한 사람은 보통 나 자신이므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면 다른 일도 편해진다.”p92
독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책속 인물을 궁금해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작전은 성공이다. 나는 특히 ‘플롯시’시리즈의 근사한 ‘플롯시’에게 관심이 간다. 삭제된 소녀 시절을 애도하며 쓴 글답게 나의 소녀시절을 스스로 애도하기에 이른다.
“무의식이 원하는 거죠. 짧은 스커트 입고 다리 꼬고 앉아 껌 짝짝 씹는, 그런 사람이 돼보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청소년기에 연예인에도 빠져 보고, 유행하는 옷도 입어보고, 물건을 탐내고 사본 사람이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하다는 걸, 그런 것들이 삭제된 사춘기를 보내면 나이 들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한마디로 그 나이에 어울리는 것들을 무시 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스무 살에 만난 인연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이십대의 현란한 욕망을 단 한 번도 표출해보지 못하고 살았더니 할머니를 목전에 둔 지금 흔적 없는 청춘을 애도한다.
내 영혼의 단짝 빨강머리 앤은 도저히 빼놓을 수 없다.
“손을 맞잡고 영원한 친구가 되겠다며 서약하는 장면”을 서른이 되어 읽었지만 때문에 서른 살에 영혼의 단짝을 만나 드디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완성한 내가 빨강머리 앤을 삶의 모토로 삼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마침내 작가와 내가 닮은 점을 찾아냈다. “난 너만큼 편지 자주 하지 못해 미안했었어, ‘어떡해! 오늘도 아람이가 열장 앞뒤로 채워서 편지를 보냈어’.”
학창시절 수 십 장의 편지를 이틀이 멀다하고 주고받는 친구가 있었다. 불행히도 편지질이 필요하지 않는 시기를 거쳐 우리는 뜸해졌지만 고향집에서 아직도 땅 파먹고 사는 그녀는 영원한 나의 앤이다. 그걸로 되었지. 나는 앤과는 닮은 점이 없어서 자주 무너지고 느리게 일어나지만 이런 책을 만나면 발딱 일어날 힘을 얻는다.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또 한명의 현대여성 ‘긴즈버그’는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당당히 올랐다. “I dissent (나는 반대한다).” 그녀는 ‘반대’의 아이콘이었다. 보수적인 대법관들 사이에서 소수의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다. 남자 학생만 받던 버지니아 군사 대학교에 여성이 지원할 기회를 열어주고 남성보다 임금이 적었던 여성 노동자를 위해 싸웠다.p259
독서가 중년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하다. 시간은 남고 자기애는 소멸하고 미래는 점점 또렷하게 다가온다. 이때에 다시 읽어도, 새로 읽어도 좋은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것들이 세세히 포진되어 있다. 고단한 남성이든 쓸쓸한 여성이든 당분간 매우 윤택한 정신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아함은 교양의 영역에 있다. 부유함이라든가 도회적인 것과는 다른 문제로 어느 정도의 천성과 어느 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독서란 교양을 쌓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면서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훈련법이다.” p207



*출판사의 지원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