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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ㅣ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평점 :
『살인자의 기억법』은, 25년 전 연쇄 살인범이었던 70대 노인 김병수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기억의 왜곡을 겪게 되는 대혼란극이다. 그는 동네 인근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마 '박주태'로부터 딸 은희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필요에 의한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 하지만 마음가짐과 달리 그의 기억은 온통 오류 투성이다. 재편돼 버린 그의 기억속에는 어떤 진실들이 감춰져 있던 것일까. 소설의 결말 부분에는 현실을 부정해버린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분량 만큼이나 가벼운 추리소설이라 단정했지만, 불쑥 치고 들어오는 우발적인 독백들, 뜻밖의 위트와 함께 무심코 내지른 잠언과 문장들이 한데 모여 삶의 본질과 죽음을 철학적 논의로 확장한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p8
그를 살인으로 추동한 힘은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었고, 살인은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이 70이 된 그는 살인의 과정과 느낌을 냉철하게 복기하기 위해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에 다녔다. 시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는 '칼과 뼈'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저지른 살인 과정을 정직하게 썼다. 강사는 그의 글을 보고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상상력으로 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드러낸 메타포라 고평했다.'
살인은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다섯까지 이어졌다. 대숲이 있는 임야를 사들여 대나무 아래 무수한 시체들을 묻었다. 단 한 번의 체포나 구금도 없었고, 엉뚱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잡혀 들어갔다. DNA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베개로 눌러 죽인 아버지가 창세기였고, 마지막 제물은 은희 엄마였다. 그녀를 묻고 오던 길에 차가 전복됐고 뇌수술을 받았다. 사고의 충격으로 돌연한 정적과 평온이 찾아왔다. 뇌 충격이 살인에 흥미를 잃게 만든 요인이었다. 은희 엄마는 딸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었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p129
<반야심경>의 글귀가 극의 초반과 종반부에 등장한다. 그 중심사상은 공(空)이니, 자꾸만 비워져 가는 그의 기억와 더불어 온통 비워져 있던 그의 삶을 지칭한 것이 아닐까. 불확실한 그의 기록은 자기 자신과도 불일치하며 서서히 붕괴해간다. 잘못된 인식과 고집으로, 종국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채 소실되고 만다. 결국 '이 모든 게 치매 노인의 망상이었을 뿐'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