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말이 될 때>는 크론병과 섬유근육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안희제, 이다울 두 사람의 편지로 이루어진 책이다. 두 사람의 각각의 책인 <난치의 상상력>과 <천장의 무늬> 모두 잘 읽었던 터라 두 책의 저자들의 편지로 이루어진 <몸이 말이 될 때>는 단박에 읽고 싶다고 생각한 책이었다. 각자의 아픈 몸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책들과는 또 달리 서로가 편지를 나누니까, 또 어떻게 아픈 몸의 세계가 넓혀질까,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하면서 말이다. (요즘 출판사 기획 책들에서 편지로 이루어진 책들이 보인다. 이 책 역시 동녘출판사의 편지 시리즈로 ‘맞불’이란 이름을 가지고 나온 책이다. 서평이벤트로 책을 받아서 감사히 잘 읽었다.)
외부에 내보이는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편지로 내보이는 글은 불특정한 독자라는 대상과 함께 그 전에 특정한 수신자와 발신자가 있기 마련이라 저자 안희제가 말하는 ‘편지란 실패하는 글쓰기’라고 한 것이 이 책의 시작부터 인상 깊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아픈 몸’과 비슷한 세대라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다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아픈 몸’이란 것만으로 동일함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름의 차이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편지는 오해의 지점을 만들기도 했지만, 또 그 오해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풀어나가며 조금씩 이해랄까.. 혹은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들을 만들어 가는데, 이런 지점 그 자체가 어쩌면 두 사람이 갖고 있던 것에서의 확장이 아닐까 싶어서 편지를 나누기 전에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 것으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안희제는 아픈 사람의 시간을 설명하는데도 주디스 핼버스탬이 말한 ‘퀴어의 시간’이 중요한 설명이 될 것이라고 했고, 동의한다. ‘이성애’ ‘정상 가족’ 규범 속에서 제도권 (이성애)결혼 전, 이루어야 할 청년기의 몫들, 가족의 모양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하나의 틀들에 대해서 폭로하는 ‘퀴어의 시간’처럼 아픈 몸으로 이루어진 서사는 조금 다른 시간을 갖게 되고, 그 조금 다른 시간은 ‘건강한’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갑작스레 쓰러져 병원을 가게 되고, 그 뒤 매일 약을 먹게 되고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왜?라고 물을 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음에 대해 경험하면서 아픈 몸이 사회에서 과학적/의학적으로 재단되기 쉽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데에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충분하지 않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 된 사람이지만,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아프기 전부터도 그랬지만, 더욱 잡히지도 않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계획하기보단 보이는 당분간의 계획을 생각하곤 한다. 그건 가난한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아픈 몸으로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여전히 쉽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함께 가야 할 길이라는 것만은 잘 안다. 그리고 그 질병/질환들을 설명할 언어들이 많이 없었던 ‘건강 최고’ 사회였음을 자각하며, 더욱 많은 몸들의 이야기, 질병의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드러나야 함에 대해 생각한다.
‘질병의 언어들’에 대해 만들어가는 두 사람의 편지로 이루어진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몸은 노곤하고 피로했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뭐랄까, 방전이 늘 예고되어 있는 몸이지만 오늘도 살아간다, 고 생각으로 이어졌고 거기에서 오는 것이 불안보단 받아들임의 태도를 취하고 싶단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공교롭게 최근 읽은 여러 책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에 대한 글귀가 나오는데, 단지 그 글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감각에 대해 더욱 알아가고, 만들어가고 싶다. 더 많은 몸들이 만들어낼 말들을 기대하며.
p35-36 주디스 핼버스탬이라는 학자는 에이즈가 미국의 게이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어서 게이들이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워진 시기에,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퀴어의 시간이 등장했다고 말하더라고요. 나아가 그 시간이 폭로하는 게 어릴 때는 공부하다가 청년의 시기에 취업해서 일하고, ‘적령기’가 되면 ‘이성’을 만나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꾸리며 늙어가는 기존 사회의 가족, 재생산중심적인 생애 주기라는 것도요. 저는 그런 점에서 퀴어의 시간이 아픈 사람의 시간을 설명하는 데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p46 왜 몸이 아픈지 이유를 모르는 것은 성가심을 넘어 커다란 공포로 작동했습니다. 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p48 아픈 사람들의 보편적인 언어가 차곡차곡 모인다면, 주류적 시간을 벗어난 시간 또한 조금씩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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