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완의 전집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비열한 자는 누구

  

나는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 너무 젊었던가 너무 늙었다. 나는 스무살이었다. 기묘한 나이였고 완전히 지쳐 있었다.”(기묘한 아르바이트, 12)

 

  오에 겐자부로의 데뷔작이라고 할 만한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매력은 150여 마리의 개를 죽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물 간의 대화에 있다. 이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하면서 나름 이유들을 끌어다 붙인다. 생물학과 공부에 의의가 있을 것 같다거나 각기병에 좋은 약을 사먹겠다는 것이다. 사자의 잘난 척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 이유만으로는 살육의 현장에 버티고 앉아 있다는 이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대학원생과 여자 대학생, 화자인 나와 개백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상대방이 비열하다고 비난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 비난은 곧바로 부정되는데, 가령 대학원생이 개백정에게 괜한 가식적 동정심을 베풀지 말라고 하자 개백정은 그에게 개를 죽이지도 못한다고 공격하고, 이어 대학원생이 몽둥이로 개를 내려치는 장면이다. 그러나 대학원생은 결국 개를 죽이지 못한다. 화자인 내가 개를 죽이자 또다시 비난이 잇따른다. 공격도 하지 못할 만큼 엉망이 된 개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적인 대화들이 맞물리면서 조용한 분노들이 곳곳에서 끓어오른다. 사자의 잘난 척기묘한 아르바이트의 문제 의식을 보다 더 예리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층위가 다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인물들은 타인을 비열하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 또한 그 비열한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앞 작품이 고발이라면, 뒤의 작품은 재판 후를 말한다. 이는 오에 겐자부로가 삶의 습관이라고 제목을 붙인 후기에서 밝힌 바, 일종의 시대 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시대 정신이라고 말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자결을 택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두 작품은 전후 일본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게 된 이들의 입장에서 쓰이고 있다. 그들은 희망할 기운조차 없다. 작품에서 번복되서 나오는 묘사와 감정 표현은 지쳤어라는 고백이다.

  사자의 잘난 척에서 죽은 이들은 완전한 사물이 된다. 사물은 영속한다. 화장한 이들은 가루가 되어 흩날릴 뿐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유영하거나 가라앉고, 혹은 화자에게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들은 산 사람들을 속박하는 모든 관계와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죽은 군인은 화자에게 다음 번 전쟁은 너희 차지라고 말한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은 패전국 아니면 승전국이라는 판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교수는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돈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아니라 죽은 소녀의 클리토리스를 힐끔힐끔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비열함은 곳곳에 있고, 그 비열함을 무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고발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애꿎은 희망들을 저지하는 것이다. 희망하기에 그들은 너무 지쳤고, 절망하기에도 지쳤다. 교수는 그들에게 절망을 요구하지만 늙은 스무살들은 절망할 기운조차 없다. 결국 그들은 죽은 이들이 잘난척한다고 여길 만큼, 속박에서 풀려난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수행했던 죽음이나 작업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들은 또다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려고 애쓴다. 결국 모두가 비열하다고 서로를 비난할 때, 그들 스스로 비열하다는 비판을 되돌려 받는 셈이다.

 

 

 

  사악함의 보존

    

 이요의 여동생 마짱은 이 세상을 두려워한다. 세상은 이요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저주받은 이로 여긴다. 이요를 피해자로 만들고 장애가 있는 오빠를 잘 챙기는 선량한 여동생이나 누나로 만든다. 하지만 마짱에게 이요는 짐이 아니다. 마짱은 이요를 감당할 수 있을만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마짱이 다른 이들보다 더 선량하기 때문일까? 마짱은 선량하지 않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세상은 이요가 얼마나 깔끔한 지 모르고, 이요가 얼마나 에 난감해하는지 모른다. 그저 이요를 한 마리의 훈련된 개처럼 여길 뿐이다. 때문에 마짱은 이요의 야뇨증이 나은 걸 기뻐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녀에게 곤란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마짱은 곤란하지 않게 된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마짱의 믿음이 늘 견실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정신지체아인 오빠를 돌보는 어린 여동생의 미담으로 끝날 것이다. 마짱은 이요를 지켜주려는 한편, 이요에 대해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심을 무마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요가 다니는 길목을 쫓아다니며 치한과 유사한 행동을 했을 때 이요를 강아지 부르듯이 대한다.

  세상은 이요를 방사능 유출로 인해 태어난 돌연변이처럼 대한다. 이요는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 난해함은 러시아의 백치 유로지비처럼 계급의 상층부로 올리는 대신, 사회적인 소통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동물과 비슷한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마짱은 이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요의 이해할 수 없음이 세상에서는 사악함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안다. 그 사악함에 대해 부정하고 싶더라도 그녀 자신이 갈등을 겪지 않고서는 이를 부정하겠다는 의식조차도 느낄 수 없게 된다.

  마짱, ‘가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안내인의 아내가 하는 고백 장면이다. 안내인의 아내는 절망하면서도 황금색 스카프로 아이의 머리를 가리며, 그들을 떠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한다. ‘는 이요 때문에 괴로워한다. ‘는 자신의 부모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요가 정말 사악한 존재라면, 마짱은 그를 벌레 대하듯 대해야 하는가?

  이요에게 는 마짱이다. ‘는 이요에게서 떨어져서 그를 돌연변이로, 장애아로 대하는 다수의 사람들 편에 서는 대신 사악함으로 치부되는 이요의 편에 선다. 그 이유는 나의 희생정신 때문만이 아니라, 이요 또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요는 발작하면서 보이는 환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세계는 문명화되면서 논리가 아닌 비논리적인 이분법을 가했고, 이요는 사악하므로 계몽되거나 훈육되어야 할 존재다. 하지만 이요가 그렇게 된다면, 이요가 당할 폭력들은 마짱이 사랑하는 이요를 훼손시킬 것이다. 마짱은 이요를 사랑하며, 믿는다. 그녀가 믿는 것은 혈육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아니라 이요를 믿는 그 자신의 보존이다. 마짱은, 나는 이요를 뿌리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악한 존재로 남기를 선택한다.

 

 

  삶의 습관, 습관의 삶

    

  신곡의 벨락콰는 차근차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중도에 머무른다. 그의 행동을 죄악으로, ‘게으름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 원래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유리에가 발걸음을 멈춘 건 그 중간이었다. 단테가 벨락콰의 유혹을 받았듯이, 유리에 또한 상상임신에 가까운 상황에서 멈춤의 유혹을 받는다. 중간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모순된 위치다. 유리에는 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며 붙든다. ‘는 유리에에게 긴급 피난처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는 유리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벨락콰의 게으름은 그의 삶이 가지는 습관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습관예술이 이미 습관이며, 그 예술 행위는 삶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습관은 우리에게 하여금 익숙해진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한편 그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습관은 고쳐 쓰는 것이다. 그는 어떤 결론을 곧장 내는 대신, 계속 유예한다. 유리에는 그에게 10분 늦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재치있게 10년이나 늦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부터 유리에를 계속 유예해 왔다.

  사람들의 수많은 편견 중 하나를 들자면, 작가의 초기와 중기에 속한 작품들만 보고 후기 작품은 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 있다. 초기에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중기에는 노련해지며, 후기에는 이미 익숙해진 방법으로 익숙한 메시지를 말하는데 그 익숙함이 곧 지루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는 후기 작품까지 다다르면서 계속 중간에 머물러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시대를 마주한다. 자폐아인 그의 아들과 소통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그를 규정짓는 세계로부터 맞서 싸우고자 한다. 그의 싸움은 어떻게 본다면 아들을 지키기 위한 부정이자 세상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는 소통 욕구에서 기인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그가 내내 삶의 지침으로 믿고 살았던 시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상 해석의 정확함은 일종의 모순을 지닌다. 텍스트는 수많은 해석을 낳으며, 그 해석들은 제각기 다 정당성이 있다. 다만 어떤 한 해석만이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오에에게 남은 것은 어떤 회한이다. 그는 나의 영혼의 공유를 믿으면서 친구를, 아들을 마주 보았지만 친구는 죽고 아들은 휘파람 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의 영혼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일까. 그는 온몸을 던져 아들을 구했을 때, 그리고 아들을 진정시킬 때 느낀다. 그는 분명히 아들에게 닿았다’. 그건 어떤 나의 영혼의 복사판이라기보다는, ‘나의 영혼이 가닿는 순간일 것이다.

  그는 쉽게 어떤 희망을 포기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과정들을 고쳐 쓰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희망을 버리는 한편, 절망이라는 논리적 계단의 끝까지는 다다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여정은 투쟁이고, 계속 중간에 머무르는 것이며, 단편집의 굵기에 애석하게도-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