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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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학계 실증주의나 합리성에 의거한 연구 스타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역추적하여 그 스스로 역진화하는 에세이. 이건 디디에 에리봉이 정식으로 학계의 과정을 온전히 마치지 않은 채 교수가 된 케이스라서 가능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대륙 특유의 사유 방식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영미권 스타일의 연구에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굉장히 왜곡된 방식으로 오남용하는 한국 학계에서는 꿈도 못 꿀 에세이이다. 한국 인문학 연구자들 중에는 사회과학으로,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화연구의 방식으로 예술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치들이 상당수이고 주류인데, 그런 이들의 시선으로는 거꾸로, 오히려 사회과학적 현상으로서의 게이 성장사를 오롯이 파악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자연과학적 객관성은 인문과학적 객관성과 다르고, 따라서 실증의 방식마저도 다르기 때문인데, 이것을 사회과학에서도 수학이나 통계의 사고관에 의거한 접근법으로 시도하려는 치들이 많으니까 그런 우려가 발생하는 것이다. 에리봉은 그런 답답한 전개 방식 따위는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자기 자신의 역사를 들여다 본다.

에리봉이 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직시할 때 그것은 쓸데없는 감상성으로 자기 연민을 하지 않고, 냉철하고 정밀하되 직관적이며 원초적으로 내부까지 깊게 들어가서 샅샅이 살펴본다. 그래서 자신과 같거나 유사한 입장이라고 동정하거나 찬동하느라 어중이떠중이들에 휩쓸리는 우매한 짓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페미니즘의 틀에 의해 일방적으로 채색된 시각 때문에 현실의 일부가 가려져선 안 된다(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하게 해주는 페미니즘이 일종의 인식론적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어머니는 상당히 폭력적이었고, 실상 아버지보다 더했을 것이다. [...] 그때 어머니는 [...] 사용하고 있던 전기 믹서기 손잡이를 아버지에게 던진 것이다. 충격은 상당해서, 아버지의 갈비뼈 두 개에 금이 갔을 정도였다. 더욱이 어머니는 이 무용담을 꽤나 자랑스러워했는데,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이야기했다.

-p.91.

라는 대목에서, 에리봉은 소수자로서 어머니에 대해 손쉽게 연대하려 드는 서투른 동정 따위를 이행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폭력에 물들어, 도리어 폭력의 근원이었던 아버지보다도 더 폭력적이기까지 했음을 증언한다. 인간이 간단하게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의 이러한 폭력성은 영어 시간에 시를 한 편 배웠다며 낭송하는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어린 에리봉에게 부당한 폭언을 행사하여 상처를 주는 히스테리(p.92.)로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난 어머니의 사랑과 그 부당성을 확신했다. 그녀는 내가 플라톤 강의를 들으러 대강당에 앉아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감자와 우유를 손님들에게 내놓았다."라는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인용(p.95.)할 때, 에리봉은 안일하게 연대의 구호를 부르짖는 파시스트들보다 계급계층적으로나 젠더적으로 더욱 더 어머니를 잘 이해해낸다. 그 이해는 폭력의 근원이었던 아버지를 섣불리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사회와 대중의 범속하고 위험한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을 수 있는, 올곧은 정신의 바탕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에리봉이 푸코를

푸코는 자발적 유배를 통해 [...] 의학적 병리화라는 유사과학적 담론을 급진적으로 문제화하는 끈기 있는 노동을 통해 간신히 궁지에서 벗어났다. 그는 여러 '일탈' 가운데서도 특히 광기와 동성애를 포함하는 범주인 비이성Déraison의 외침에 정신의학의 독백을 대립시켰다. 푸코가 정상인들과 정상성의 담론으로 지칭하는 정신의학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계속 종속된 위치에 두고자 애쓴다. 이 시절 푸코의 정치학은 모두 배제와 발언, 병리화와 저항, 복속sujetion과 반란이라는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pp.252~253.

라고 읽어낼 때, 에리봉은 소수자임을 알면서 소수자를 이해하는, 진정한 연대자로서의 날카로운 눈길을 보이게 된다. 현장에서 동료가 죽고 다친다고 울분을 토해내는 따위의 어설픈 생떼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술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갖춘 학자가 쓸 수 있는 언어 아닐까. 이건 학술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못 되니까 말이다.

반대로 레몽 아롱을 비판하는 대목(pp.111~116.)은 신랄하고 대범하지만, 동시에 사려 깊지 못하고 배려심이 없다. 그만큼 계급의식에 대한 아롱의 철저한 무관심을 제대로 들춰내기도 한다는 장점은 있다. 누구나 사회적 집단에 대한 소속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극우 석학의 사례는 분명코 한계성 다분한 것이므로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판의 방식이 극우 석학의 방식과 같을 때, 그것이 가질 수 있었던 빛의 조도는 다소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름답다. 자기 자신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참담한 작업을 온몸으로 해내는 글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근원이었던 아버지의 부고에서 출발하여 '호모 새끼'라고 불렀던 자신의 옛 호칭을 떠올리게 하는 모욕의 도시인 고향 랭스(p.225.)로 돌아가게 하는 글이다.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이자 관찰 대상으로 보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자로서의 엄정성 따위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호흡하려는 러닝메이트 혹은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진취성으로도 나아가는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소수자의 시선으로 살피고 소수자의 언어로 읊조린 자서전적인 문화기술지라고 할 수 있다. 에리봉의 삶보다 에리봉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 더 좋다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진정성) 봐준다는 미명 하에 놓치는 그 사람의 진실(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에리봉은 그 기회를 스스로 잡았다는 점에서 더 놀랍다. 번역이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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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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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자랑 운운한 100자평과 달리 책 내용은 그리 현학적이지 않다. 애초에 학자의 책에 "눈높이 맞춰서 쉽게 설명해줘~ 쉽게 쓰이지 않은 글은 잘못된 거야~"라는 건 반찬투정과 같다. 빈곤과 생활 생태에의 차분한 접근은 좋다. 하지만 학자로서 취하는 얄팍한 뉘앙스는 오히려 학자라서 아쉬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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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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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산문집, 그러니까 에세이이다. 에세이는 비평이 아니다. 에세이로 비평을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에세이라고 무조건 비평일 순 없다는 뜻이다. 둘은 다르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같아질 수도 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신형철은 그런 경우를 모색해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모색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그의 고심은 이해한다. 비평이 비평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의 모색이, 모색조차 시도하지 않는 안일한 웅크림일 수 있고, 그 웅크림이 신중해 보이기보다는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창작의 경우, 문학은 올바르거나 착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비평은 올바르거나 착해야 할까?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문학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착하다고 믿는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그 속을 파헤치는 쪽이고, 사람들이 올바르고 착하다고 믿는 말과 행동으로 저질러 버리는 악을 들춰 내는 쪽이니까.(이 말은 당연히 올바르고 착하게 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신형철의 이 책은 문학의 본령을, 비평의 본령을 잘 준수하려다가 그 본령에서 굴러 떨어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앎의 깊이가 얕아져 가면서 대중지식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의 안타까움이란. 물론 그는 처음부터 비평가라기보다 에세이스트에 가까웠다. 비평은 텍스트의 충실한 해제여야 하는데, 그의 비평은 텍스트보다 텍스트를 다루는 자의 텍스트가 컨텍스트 이상으로 역류하는 경우였으니까. 이제 그가 글에서 지적인 무언가를 꺼낸다 해도,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 해도, 지금까지 해 왔던 두께와 깊이와 넓이보다 더 두껍고 깊고 넓지 않은 한 자신만의 문학/비평을 내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에세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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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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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소프트SF로, 대중적으로 읽힐듯. 4년 전 처음 읽고 쓴 말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성이니 소수자니 진보 쪽으로 의미 있다는 식의 말들이 가끔 있는데, 그건 진보 쪽 논의를 낮잡는 말이다. 그냥 쓰윽 읽을 수 있는 여린 감성의 통속소설들이다. 긍정적 의미도 부정적 의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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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프리즘 총서 23
안 소바냐르그 지음, 성기현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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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그 자체로 난해성의 상징이다. <차이와 반복>은 '반복이 차이를 낳는다'라는 놀라운 사실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인데, 그 안에서 하는 말들은 더 복잡다단하다. 문장도 상당히 꼬여 있는데 해석하며 읽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쉬운 해설서를 읽지 않나? 왜 더 풀어서 쓴 글이 나오지 않나? 하고 묻는다면 우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사유는 그가 써낸 방식(문체)으로 써야 정확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사실 말하려던 의도도 변질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비단 들뢰즈만 그런 것은 아닌데, 들뢰즈는 특히 더 그렇다고 강조할 수 있다.

안 소바냐르그는 그러한 측면에서 들뢰즈를 깊이 있게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독법은 들뢰즈가 가진 특유의 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들뢰즈의 방식을 거의 '들뢰즈-되기'에 가깝게 구현함으로써 들뢰즈를 이해한다. 외부의 이해는 어떠한 오해를 전제로 하고 또 산물로 얻곤 하지만, 이 경우 설령 오해라 해도 차라리 유의미한 오해이다. 연구자로서의 엄정한 자세를 올곧게 유지하는 가운데 연구대상을 객관적으로 묘파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들뢰즈의 고집도 대단하고 그걸 그대로 받아낸 소바냐르그의 고집도 대단하다.

참고로 '초월론적(transcendantal)'이라는 말은 '선험적'이라고도 번역되고, '초월적'이라고도 번역된다. 번역을 맡은 성기현 선생님이 굳이 초월'론'적이라고 옮기신 이유는, 아마도 초월적이라 해도 여기서는 하나의 이론(théorie)적인 틀로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좋은 독법에 기반한 번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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