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정말 탁월하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자본론을, 자본주의 사회 모순의 원인과 구조를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책 속 강사도 - 아마 저자일 테지만 -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난데 학생들의 질문과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강의식 수업에 익숙한 우리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일 뿐더러 그 말의 내용은 또 어떠한가! 두 주체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이 펼쳐지는 그 강의실 현장으로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을 지경이다. 이러한 형식이 책에 대한 몰입도를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돈이 돈 벌어주는 세상이란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런 돈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아이의 꿈명찰 속 장래희망이 건물주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터무니없이 대다수의 아이들의 꿈이 대통령이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돈이 목적이라는 것을 드러냈던 적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물신주의物神主義‘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회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어떻게 몸집을 부풀리는지, 그 이면에 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특별히 나아지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날로 교묘해지는 방법으로 착취를 숨기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숙명임을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그렇다면 대안은 공산주의일까.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이 대부분 자본주의로 돌아섰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돈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에게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말일 것이다. <태평천하>의 ‘윤직원‘ 영감에게 사회주의자가 세상을 망쳐놓을 불한당패에 지나지 않았듯이 말이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 책을 주문했다. 정유정이라는 대단한 스토리메이커가 써낸 에세이는 어떨까 궁금했다. 인간 정유정이 알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실은 그보다 더 강력한 인력引力이 존재했다. 바로 히말라야라는 네 글자였다.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네팔병`이었다. 준비 과정부터 그녀는 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체력을 다지기 위해 등산, 걷기 연습을 참 열심히도 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를테지만,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엉뚱하게도 솔직해서 웃긴 구석이 있다. 화장실 얘기가 그랬다. 저쪽 동네는 누구에게나 둘 중 하나인가 보다 싶었다. 부족하거나 혹은 넘치거나. 소소한 재미가 있어 읽기는 수월했지만 이런 걸 왜 책으로? 하는 생각이 따라 들었다. 그러나 일기장에나 적혀있어야 할 법한 내용들로 계속되던 책은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조금씩 깊어졌다. 마살라에서 삶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내팽겨쳐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정유정 작가의 첫 여행으로 안나푸르나 종주는 가장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풍요의 여신은 그런 그녀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역시나 여행이 사람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고작 한 달여의 방랑이 인간성을 뒤집어 놓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일상에서 떠나 잠깐 마음의 여유를 얻어 한동안 다시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에 대한 대단한 정보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정유정 작가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라. 까딱하다간 책장이 각자 자유를 좇아 달아날 수 있으므로 주의하면서. ㅡ 이 따위로 풀칠할거면 풀값 천원 돌려달라 출판사에 전화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또 한 권의 책이 나오고 대히트를 치기까지 했으니 작가는 이제 곧 에베레스트로 떠날까. 다울라기리는 언제쯤 갈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현재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면, 혹은 교사를 꿈꾸는 학생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수업의 외적인 요소들은 물론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덕분에 책을 읽는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 사이의 시간들은 나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고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되돌아보면, 시종이 울리고 난 후 돌아서서 나올 때 뒷맛이 좋았던 때가 별로 없다. 늘 뭔가가 흡족하지 않았다. 내처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녀석들을 보고 그랬고, 아무리 물어도 누구 하나 입도 뻥끗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랬고, 작정한 분량을 다 소화해내지 못해서도 그러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불만이었다.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었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여러 아이들을 앉혀놓고 내 마음에 맞게 움직이고자 했으니 애초에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또 본래 학습이란 배우는 사람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학생들은 대부분 무엇을 알고 싶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의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 그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쌍방과실인가?아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기성세대의, 변화를 원하면서도 바꾸기를 시도하지 않는 교사들의 잘못이 더 크다. 우리는 이런 사회문화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는 인간으로 길러져 어른이 되었지만 더는 돈과 힘의 논리로 인해 부조리한 것에 순순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다. 생각은 다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로 돌아왔다. 2부 마지막 교육공학 파트에 나오는 인도의 교육학자 수가타 미트라의 실험은 인상깊었다. `벽 속 구멍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을 통해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음을 밝혀냈다. - 문득 한 대의 컴퓨터가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이었다면 결론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원한다면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혹은 다른 도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므로 이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교사라는 직업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만일 기계가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수업을 하고 있다면 슬프게도 대답은 `그렇다`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하기에 학습동기가 전혀 없는 아이들이 있고, 그런 아이들의 빛나는 장래를 위해 그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부모가 존재하는 한 교사라는 직업이 없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교직이 존립한다면 그건 더더욱 슬픈 일이 아닌가. 21세기의 교사는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정보를 낚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는 일이 교사의 역할이다. 또 자신의 계획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 학생이 스스로 배울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다. 스스로 배울거리를 찾은 학생들에게 학습동기는 더이상 논의거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을 덜어내야 한다. 배가 부르면 눈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덜 가듯이 적게 가르쳐야 많이 배울 수 있다. 결핍은 갈구하게 만들고 그렇게 얻은 것은 더 값진 법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어려움`은 크다. 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나갈 인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고민하고 바람직한 문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도 실현되기 전에는 모두 하나의 생각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