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권헌익.정병호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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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서로 주목을 받고 있는 권헌익‧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을 직조하고 있는 주된 이론가는 막스 베버이다. 폭력의 독점 및 관료제화를 통한 합리적 권력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이 이행한다는 것은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합리적 권력에 대한 분석만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상징의 정치적 효과를 포착하기 위한 기어츠의 ‘극장국가’ 개념 역시 사실은 ‘의미’에 대한 베버의 강조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버 이론과의 깊은 공명 속에서 저자들은 소위 “세계에서 가장 격리되고 불가사의한 곳 중 하나”인 북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나는, 카리스마 권력의 세습을 위해 동원된 예술정치와 극장국가의 기획에 대한 훌륭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이해’를 산출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카리스마 권력의 일상화 테제를 강조하며 베버로 복귀하는 결론 부분에서 굳어졌다. 저자들은 북한 지도자가 세습적 카리스마를 추구함으로써 군 주도의 정치안보에 집중하며 경제를 경시하게 되었고, 애초의 사회주의적 이상으로부터도 괴리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진단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새 지도부는 현대적인 정치적 권력과 권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의 힘에는 실제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역사적 교훈과 진실에 대면해야만 한다. 카리스마 권력의 시간적 한계에 대해 그렇게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만하게 저항하는 것이 인민의 생명뿐 아니라 바로 그 정치적 예술이 영속시키고자 했던 권위 그 자체의 위엄과 전통에도 궁극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 이러한 깨달음은 그 나라의 극장국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행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권헌익‧정병호, 2013: 279-280)


나는 이 명료한 주장과 메시지가 북한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명과 이해가 필요한 지점에서 이해의 필요성을 해소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궁금한 점은 왜 그러한 정치체제를 국내외의 압력을 무릅쓰고서라도 계속해서 유지하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북한이 그러한 정치체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명과 이해의 시도를 가로막았다.


물론 애초에 이 책의 저자들을 이끌었던 물음은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정치체제가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애초의 물음이었다. 그러한 정치체제를 지속하는 이유, 즉 행위에 대한 이해를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런 까닭에 전반적인 설명의 방식은 기능적이고 사후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제약이 크기는 하지만, 북한의 세습적 카리스마를 가능케 한 극장국가적 요소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이 실제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극장국가적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지 조회해볼 수 있는 민족지적 자료가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여러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 분석임을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 상징정치와 예술정치에 대한 해석이 고도의 내적 일관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허공에 떠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것이 인민들의 생활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인민들에게는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반응을 산출하고 어떤 효과를 내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큰 한계였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라는 연구 대상의 특수성이 갖는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제약 때문에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제시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의문은 초반에 이 연구가 다소 자명하게 상정하고 있는 지점으로 이어진다.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수긍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카리스마적 권력에 세습에 기여한 정도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서의 북한이 대를 이어서 권력의 세습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상징과 기억의 정치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물적 기반과 토대, 재생산 능력을 갖춘 체계의 존재, 제도적 권력에도 공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이라는 정치체제가 오롯이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라면, 상징권력과 제도권력 양자의 (시기에 따른) 비중을 고려하면서 분석하는 편이 좀 더 세련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체제 유지에 기여한 물적‧제도적 조건을 간과하고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만 주목하게 되면, 북한의 체제 위기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봉사한) 상징정치에게로 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이 가진 비판 전략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지점이다. 북한이라는 정치체의 존속을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 규정하고 출발하게 되면, 베버의 권력론을 채택하게 된 이상 결론은 필연적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무용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위기’ 이전의 북한 정치체제가 보인 나름의 성과는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조건과 국내적 권력의 합리화에도 일정부분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이전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과 예술정치의 성공적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이후 북한의 위기 원인은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의 성격에 집중적으로 귀속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북한을 위기로 몰아넣은 데에 일조한 국제정치적 환경이나 인접 국가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거세하였고, 이 작업이 역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북한을 바라보는 이 책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의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거니와, 이는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정하게 기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해 이방인 아닌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베버가 말한대로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저일 필요는 없”으며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Weber, 1913: 18). 이 연구에서 이방인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북한 외부의 상황은 주어진 것으로 놓고 이에 대한 비판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북한의 선택에만 문제를 제기하는 편파적 태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를 '해보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나를 이해시켜보라'는 '요구'에 가깝다. 극장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북한의 지도부는 과연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됨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가 극장국가와 상징정치, 예술정치, 대중동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북한의 정치지도자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하였을까? 설명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고, 이해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류학의 목적은 곧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불가해한 듯이 뵈는 사회적 현상들을 밝히는 해석”이다(Geertz, 1973: 25; 13). 하지만 인류학 연구를 표방하는 이 책은 북한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짓을 그만두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왜 극장국가의 성격을 고수하는 전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고 이해하려 시도하기보다는, 그들이 고집해 온 이상한 선택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북한을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해의 필요성마저 부정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론에서 제시되는 강렬한 주장과 권고는, 저자들이 채택했던 막스 베버의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위반이기도 하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쓴다.


“경험적-역사적 인과연쇄에 대한 마지막까지의 철저한 추적이, 역사학자가 ‘가치판단’을 시작하는 순간 중단되고 이 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저서들의 학문적인 성과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역사학자는, 가령 역사적 행위자들이 가졌던, 그러나 역사학자 자신에게는 이질적인 이상들의 결과로 나타난 어떤 현상을 이 행위자들의 ‘실수’ 또는 ‘타락’의 결과라고 잘못 ‘설명’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업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즉, ‘이해’라는 과업 말이다.”(Weber, 1917: 174-175)


저자들이 북한은 “극장국가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해라는 과업은 중단되며, 이해의 목적인 비판도 불가능해진다(권헌익‧정병호, 2013: 276).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조우에서 이해와 비판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이해와 자기비판임을 우리는 베버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극장국가 북한』 역시 비판적 실천으로서의 함의를 살리고자 했다면, 궁극적으로 저자들이 서 있는 지점에 대한 이해와 그 지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폐쇄된 공간인 북한 외부에 있는 사람들로서, 어쩌면 지배적인 국제질서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시도했다면 어떨까? 북한을 보는 북한 외부의 시선은 어떠한가? 북한에 대한 북한 외부의 행위들은 어떠한가? 이들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적 행위가 지향되는 행동들 아닌가?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이해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 그 자체야말로 인류학적 연구와 이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은 가볼 수 없는 곳, 살아볼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인류학의 난점과 가능성을 우리로 하여금 깊이 고민하도록 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연구에 대한 탁월한 저작으로서 이 책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저자 중 한 명인 권헌익 선생이 가진 세계적 명성이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라면, 우리는 한국 학계의 식민성이라는 식상한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학계와 사회과학계로부터의 진지한 비평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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