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성과 자유 -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트랜스 소시올로지 9
사카이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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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논의를 아주 거칠게만 이해하고 있던 나는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성의 역사1: 앎의 의지』, p. 155)에서 공권력에 의한 폭력(용산, 쌍용차)이나 심지어 기업화된 용역 깡패(컨택터스)가 난무하는 사태가 잘 설명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도덕적으로 분개하기는 했지만, 즉각적 폭력을 통해 권력이 발휘되는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기에는 70년대 후반에 나온 푸코의 이론도 너무나 최신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원제는 『자유론: 현대성의 계보학』)를 뒤늦게 읽으며, 한국 역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의 권력 작동 방식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카이는 푸코의 1976년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주로 참조하면서 “삶 속에 죽음이, 생명과 그것의 증진을 주요 목표로 하는 권력 바로 그 안에 죽음이 포개어진” 사태를 지적한다(본서, p. 161). 이른바 생명-권력에는 생명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작용뿐만 아니라 위험한 요소를 죽음으로 배제하는 작동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 다시 『성의 역사1: 앎의 의지』를 펴보았더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죽게 내버려 두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도록 적극적인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포개져 있다는 테마는 “개인이 단조롭고 평균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죽음에의 인지”라는 식으로 이미 『임상의학의 탄생』에 등장한 바 있다(The Birth of the Clinic, p. 171).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생명이 논의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에 동반하여 죽음도 (재)부상”한다는(본서, p. 174) 등의 일종의 ‘역설’이 푸코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해방이나 인도주의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은 다른 방식의 처벌이나 억압임이 드러났고, 그토록 이성을 강조하는 서구의 근대 문명이 사실은 또 다른 비이성에 다름 아니었으며 결코 광기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이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 등에서 푸코가 보여주었던 근대 문화의 역설이었다. 나아가 생명을 증진시키고 보호하는 것이 권력의 최대 화두가 된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태가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말해지는 것,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러한 사태의 부재 또는 희박성을 전유 또는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억압임에도 해방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것, 합리성의 증대라고 말하도록 하는 것, 이성의 승리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 생명이 중요하다고 여기게끔 하는 것은 모두 권력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담론적으로 구성된 현실에 속지 않는 것, 나아가 담론적 현실에서 벗어나 그 바깥에서 담론의 형성과 배치를 관찰하는 것이 이러한 권력에 저항하는 주요한 방법이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쟁점은 Foucauldian의 논의에 있어서 사회학의 위상에 대한 것이다. 푸코의 저작에서는 그가 맑스와 베버를 열람했다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회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주로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뒤르켐이다. 흔히 뒤르켐은 맑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비중있게 언급되지만 푸코의 관점에서 뒤르켐과 그 이후의 사회학은 근대 권력이 행사되기 위하여 동원되는 지식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푸코는 『성의 역사1: 앎의 의지』에서 뒤르켐의 주저인 『자살론』을 암시하면서,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에 대해 최초로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서의 자살이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한다(155). 이 때 사회학은 개인의 비정상적 일탈이거나 예외적 현상이며 나아가 권력에 대한 유일한 저항으로 여겨졌던 자살의 규범적 법칙성을 탐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살률을 적절한 선에서 관리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사회학은 권력이 작동하고 행사되는 데에 차질이 없게끔 복무하는 앎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신생 학문으로서 현실 세계의 이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회학을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을 보노라면 푸코의 방법이나 시각이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베버 등 다른 흐름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뒤르켐의 그것이라 하여도 사회학을 그저 권력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앎으로 이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인지는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사회학의 의의에 대해서 19세기 말의 그것보다 진일보한 어떤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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