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ㅣ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평점 :
이 책을 학부 때 처음 읽었었는데, 최근에 출판사를 바꾸어 새로 출간되어 다시 읽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이 책의 수준과 진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사회과학이 5·18을 그리고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 사회과학자의 저서 가운데 단연 최고이며 굳이 따지자면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보다 앞에 놓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 출간된 이 책이 부디 널리 읽혔으면 한다.
"그간 우리는 진상규명을 부르짖으며 '사실'들에 매달려왔다. 그러한 사실들이란 주로 제삼자가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200명 죽었다'. '2000명 죽었다' 등의 이야기는, 사실 'one little Indian, two little Indian……'처럼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14시 30분, 금남로에 시위대 3000, 제봉로에 1500……' 등의 경우는 높은 곳에서, 헬리콥터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시위를 진압하려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가?'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사형 언도를 받아내는 데 필요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대부분 '남'의 사실이지, 우리 자신들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비록 아직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은 처지지만 그러한 숫자 말고도 우리에게는 분석해야 할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이미 5·18 진상의 95% 이상은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다 드러난 것이 현실이며 군부의 핵심 자료가 없다고 해서 연구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어불성설일 것이다."(23)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26)
"5·18이 왜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만 했고, 방지할 수 없었던 구조적 원인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논거는 5·18이라는 특정한 사건의 경험적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언어구조, 특히 맑시스트 정치경제학 언어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즉 5·18에 대한 사회과학 담론은 서양의 실증주의 사회과학 담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담론은 5·18을 특정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여러 사건 중의 하나 또는 '구조적 조건'의 발현으로 보아 사건으로서의 5·18을 매몰시켰다는 것이다. …… 우리 사회에서 맑시즘에 경도되어 있는 사회과학은 분명히 5·18의 소산이다. 5·18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거대한 투쟁과 혁명을 기대하고 그 가능성을 생각하던 시점에서 맑시즘의 경제결정론과 계급투쟁론이 우리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5·18의 투쟁주의가 배태한 우리의 사회과학은 자신의 출생의 역사를 다시 쓰며 자신의 모태를 매장해버렸다."(77)
"우리는 그가 5·18의 역사 쓰기, 사회과학 쓰기에서 '진상규명'을 의식하여 그간 사망자의 숫자, '발포 명령자는 누구였다?', '누구의 명령으로 공수단이 작전을 했는가?' 등의 이른바 '사실'에 치중해왔고,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좌절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실'들이란 주로 밖에서 본 모습들로서 법적인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사실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에 매달려왔다는 것은 5·18의 '진상규명'을 복수의 수단만으로, 제삼자에게 복수를 구걸하기 위한 제물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5·18의 진상은 광주 시민 모두에게, 그리고 그 참담한 '시대정신'에 참여했던 모든 국민들에게 명쾌한 것이며, 그 '진상'마저 우리가 군부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거짓이 우리의 진실을 박탈할 수는 없다. 5·18의 진상은 엄연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며 그들이 숨기고 있는 사실들은 진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의 진실만으로 5·18에 대한 글쓰기 그리고 5·18을 계기로 한 우리의 사회과학을 다시 시도하기 위함이다."(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