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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푸코의 글을 읽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실제 푸코의 삶이 내가 읽으며 느꼈던 것과 같이 '푸코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심을 갖고 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 안다. 진실이 세계를 해독할 수 있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만일 내가 진실을 안다면 변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내게는 둘 다 마찬가지다."(DE Ⅳ, p. 535.)
"그런 이유에서(…) 나는 평생 동안을 환자처럼 일했다. 난 내가 한 작업이 대학제도 내에서 어떤 지위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 문제는 나 자신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 자기만의 지식에 의한 스스로의 변화는, 내 생각에, 미학적 경험에 충분히 가까운 것이다. 자기 그림에 의해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면 화가가 무엇하러 작업하겠는가?"(DE Ⅳ, p. 536. Cf. p. 675. p. 42.)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모든 정신활동(그리고 나서야 그것은 응용될 수 있을 것이고, 예컨대 여론에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은 일종의 비인격성, 그리고 하나의 자아의 탄생에 동시에 다가가게 해준다. 비인격성 속에서 연구자 또는 작가의 자아는 사라지나. 한편, 새로운 자아는 아무런 지위도, 특질도, 얼굴도 없다. 그것은 불멸하지도 영속하지도 않지만(그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에 이질적이며 시간 바깥에 놓여있는 자아다. 자기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 내내 우리는 실제의 죽음을 잊는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잊힐 것이며,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격을 벗어나며 익명의 텍스트 안에서 물화된다. 마치 예술가 혹은 연구자가 이미 죽은 것인 양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나는 변화되거나 구원받거나 또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그렇다,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니체주의자에게 가능한 구원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와 혼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따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변화하기를 그치는 것,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는 외적, 내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멈추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212)
"나를 충동질한 동기로 말하자면, 그건 아주 간단했다. 몇몇 사람들이 보기엔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호기심인데, 어쨌든 유일하게 약간은 고집스럽게라도 실행될 만한 가치가 있을 그런 유의 호기심이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인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문제가, 계속적인 인지나 생각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순간들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자기 자신과의 유희는 뒤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내게 말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유희는 기껏해야 효력을 발생하고 나면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준비작업의 일부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철학은-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활동인데-무엇인가? 그것은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보다 바로 그 철학적 사고 속에서 철학과는 무관한 지식의 훈련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권리인 것이다. '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의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적어도 철학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사고에서의 '고행', 자기의 훈련이라면 말이다."(『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 p.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