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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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5월30일에

염소의 축제를 기념한다.

 

-도미니카의 메렝게, <염소를 죽였네>

 

책을 들춰보던 중에 차례 다음에, 문득 이런 메시지가 나와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염소의 축제를 기념하면서 염소를 죽였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말이 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 글귀.

‘염소, 축제, 도대체 무슨 의미지...?’ 속으로 궁금증이 일어났다.



아무튼 이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메시지가 나를 책 속으로 인도하였다.

마치 <The Phantom Of The Opera(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이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크리스틴’을 자신만의 지하세계로 인도하듯이 말이다.

메시지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손에 책을 들었다. 그리고는 읽었다.

 

“아무나 죽이는 건 안 돼. 그러나 독재자를 제거하는 건 괜찮아.”

안토니오와 살바도르는 ‘염소’를 죽이겠다동일한 목적을 확인하고 서로 화해했다.

 

첫 번째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작품에서 ‘염소’란 단어의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염소’는 도미니카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암살한 이들이 그를 가르킨 별명이었던 것이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염소의 축제’

 

‘염소’는 생명력과 번식력이 강한 동물이다. 즉 트루히요의 지나친 성욕과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압축하여 염소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축제’는 ‘아주 큰 파티’를 뜻하는 말로, 다시 말하면 ‘독재자의 죽음을 의미하는 유혈축제’를 뜻한다. 또, 하나의 ‘염소의 축제’는 달리 ‘독재자 트루히요의 축제’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즉, 트루히요만의 비밀스러운 은밀한 행사를 뜻한다.

 

도미니카의 메렝게, <염소를 죽였네>

메렝게는 독재시절 대표적인 음악의 장르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도미니카 민중들은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노래를 독재자의 메렝게 장르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염소를 죽였네>노래의 제목으로 트루히요 암살이라는 주제를 예시하고 있다.

 

작품은 ‘우라니아’라는 여인이 산토도밍고를 떠났다가 35년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현재의 그녀는 외향적으로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치유하기에 너무나도 큰 상처(트루히요에게 강간을 당한 일)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 있는 제물..

그녀는 그녀 아버지의 출세욕에 의해 염소(트루히요)의 성욕을 해소 해 주기 위해 바쳐진 살아 있는 제물이었다. 가장 사랑받고 아름다워야 할 시기에 더럽고 추잡한 정치적 거래의 희생양가 된 그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딸을 바친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그녀는 트루히요시(산토도밍고)를 떠나 미국에서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다.

 

이곳 도미니카 공화국에 한 지도자가 있다. 그는 독재자이다. 그는 공포와 폭력으로 국민들을 탄압했다. 나라 안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로 여겨 마음대로 했고, 국가의 뿌리가 되고, 근간이 되는 백성들을 함부로 대했다. 암살자들인 안토니오와 살바도르의 말처럼 그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짐승(염소) 이였던 것이다. 이 인간 염소는 자기가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백성들의 아내와 딸을 강간했고, 심지어는 14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까지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성욕을 풀었다.

 

독재는 여성에게 특히 잔인하다.

트루히요에게 있어 섹스는 권력과 남성성, 그리고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최고가지를 보여주는 상징 중 하나.

 

트루히요에게 강간당한 14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바로 ‘우라니아’였다. 14살의 나이에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상처와 시련을 입은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인간이 자신의 손녀뻘 되는 여자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는 트루히요는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비인간이자 악마였던 것이다.

 

무려 30년이라는 세월동안 한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무소불위의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그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는 능히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빵을 수없이 늘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문, 실종, 납치, 살해, 처형, 테러, 음모, 모함, 중상모략, 강간

 

항거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닌 독재자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예전 북한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모래로 쌀을 만드는 위대한 영도자. 독재자의 모습은 세계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사람들 사이에 ‘트루히요는 절대로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신화였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는 가장 혹독한 여름철에도 모직 군복을 입고 벨벳으로 만든 삼각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다. 그래도 그의 이마에서는 땀 한 방울 볼 수 없다.”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때면 땀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특히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육체는 땀을 흘렸다. 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뉴스 방송은 다섯 시에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페탄이 그가 일어나는 시각에 맞추어 네 시로 뉴스를 앞당기자 나머지 방송국도 그대로 따랐다. 방송국들은 그가 면도를 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입으면서 라디오를 듣는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지극 정성을 떨었던 것이다.

 

우라니아는 나약한 약자, 트루히요는 잔인한 강자로 대변된다.

우라니아의 분노와 수치심, 치욕은 도미니카 여성 모두의 치욕이고 수모였던 것이다. 트루히요는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가장 모범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것은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파렴치한 악마의 화신이었다.

 

사실 작품에서 우라니아는 요사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공이다. 요사는 우라니아를 통해서 잔인하기 그지없던 독재기간 동안 자유를 억압당하고 침묵을 지켜야만 했던 탄압받은 모든 여성들의 상징이며, 독재자에 의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을 당하고 타락해야 했던 도미니카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 염소(트루히요)는 1961년 5월 30일 산크리스토발로 향하던 중 자신의 시보레 차에서 안토니오, 아마디토, 임베르트, 살바도르, 토니 등등 7인에 의해 고속도로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다. 국민들의 그의 죽음을 축제로 인식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과 국민들의 불신, 도덕성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30년 나라를 공포로 다스렸던 통치자의 허망한 말로이다.

 

“부귀(富貴)는 누구나가 다 원하는 것이지만, 정도(正道)로써 얻어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2500년 전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맹자는 군왕(君王)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로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을 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즐거움이야 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정도(正道), 여민동락(與民同樂)

둘 다 위정자(爲政者)가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염소의 축제에 등장하는 독재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독재자들은 절대 여민동락(與民同樂)할 수 없다. 부귀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나눠 줄 마음이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이 세상과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듯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대다수의 독재자, 폭군들은 그 종말이 비참하다. 그건 이미 수 천년의 역사가 다 증명을 했다.



정치(政治)는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다독거려줘서 그들의 믿음을 얻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첫 페이지, 첫 단락에서 ‘우라니아’라는 여성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고, 이어서 염소 트루히요, 그리고 암살단 안토니오와 그의 동지들까지 모두 만나게 되었다.

이들을 만나고 나서

 

‘삶의 문제...? 인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이고, 평생을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그리고 이 작품, 과연 노벨문학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작품이었다.

 

예전에 <톰 소여의 모험>과 <삼총사>를 읽고 나서 이 책들 원서로 읽어 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번역본 보다는 원서로 읽으면 번역자가 아닌 저자의 의도를 가장 극명하게 살필 수 있고, 특히 그가 작품을 쓰면서 단어의 취사선택에 있어서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어휘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작품 또한 번역서와 원서를 비교해 가면서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곳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카리브 해의 낭만 휴양지.

유네스코에 등록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염소의 축제>를 들고 이곳을 직접 방문해서 그들의 자취를 쫓아가보며 작품의 세계에 빠져 보고 싶다.

산토도밍고는 1936~1961년까지 대통령의 이름을 따 트루히요시라고 불렸으나, 그가 암살됨으로써 독재체제가 붕괴되자 옛 이름인 산토도밍고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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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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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쟁! 처음 시작된 그때로부터 수백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행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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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산문 산책 -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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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 문인들의 글 가운데 명문장만을 엄선하여 엮은 화제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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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 IP M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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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암울한 시대, 민족을 위하는 한 사람 그리고 민족의 혼이 된 한 사람     

  어지러운 세상,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통쾌한 “엽문” 

 최근에 보기 드문 감동작 한 편을 만났다. 견자단 주연의 “엽문”. 내가 본 “엽문”은 감동과 재미 두 가지 요소를 아주 맛깔스럽게 잘 버무린 영화라고 평(評)할 수 있을 것이다. ‘엽문’은 실존 인물로 70~80년대 무술의 화신으로 무술영화계를 풍미했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쌍절곤의 달인 이소령의 스승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하던 “영춘권”의 고수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는 엽문의 수련 장면을 보여주면서 시작되는데, 엽문은 이 때 이미 무(武)의 절대경지에 올라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엽문은 대저택을 소유한 불산 지역의 유지로 있으면서 예쁜 아내와 깜찍하고 귀여운 아들과 함께 산다. 평소의 소일거리는 홀로 무술을 수련하는 것이다. 즉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불산의 은둔 고수였던 것이다.

  그는 무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품 또한 겸손하여 대련 시에도 폐관(閉關), 즉 문을 닫고 대련을 하며,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등 무술을 폭력이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로 승화시켜 표출해 낸다. 이는 엽문의 화려한 볼거리 이면에 중국무인의 부드러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불산의 무도관을 새로 개업한 한 요가권의 장문인 요사부가 엽문에게 도전하러 오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사람은 엽문 가족이 식사 할 때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대련을 청한다. 엽문은 점잖하게 거절하지만, 요사부는 굳이 대련을 고집한다. 엽문은 시종일관 예의로써 상대를 대우하고 함께 식사할 것을 청하며 나중에는 후식까지 함께하며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한다. 티타임과 식후의 끽연(喫煙)까지 맛있게 즐긴 요사부와 엽문은 아내와 아들이 자리를 피하자 드디어 문을 닫고 무공의 우열을 겨룬다. 

  영화를 보면서 엽문의 아내역로 나오는 웅대림의 미소와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그녀를 이 영화에서 처음 보았는데 느낌이 매우 좋았다. 웅대림은 단아한 중국의 여인상을 여지없이 보여주는데 특히,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남편을 현명하게 내조하고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의 의미지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웅대림의 잔잔한 미소와 연기 또한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녀의 단아한 자태가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 “엽문”은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과는 달리 다소 여성스러운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곰곰 생각해보면, 역시 영화 속에 그 해답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엽문이 구사하는 무술이 강한 남성미를 표현하는 무술이 아니라, 바로 부드러운 여인들의 무공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다. 영화 속에서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우락부락한 다소 과격한 권법을 구사하는 북방무술의 대가인 금산조가 굳이 도전을 피하는 엽문과 억지로 대련하기 위해 한껏 엽문을 약올리며, 엽문의 무술을 앝잡아 보고 비아냥거림으로서 엽문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정작 화를 내며, 도전에 응할 것을 허락하는 사람은 엽문 당사자가 아닌 바로 그의 부인이다. 이 부분에서 웅대림을 통해 중국 여인들의 강인함과 단호함이 드러나는데, 이는 부드러움 속에 들어가 있는 강인함과 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그저 단순하게 흥미 위주로만 만든 그런 영화가 아니라, 어느 정도 구도가 잘 짜여 진 영화라는 느낌을 들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엽문은 이윽고 불산의 모든 도장사범들을 무지막지하게 깨뜨린 우락부락한 산적두목 같은 금산조를 상대하여 가볍게 이김으로서 은둔 고수의 면모를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며 불산 시민들에게 영웅으로 부각되며, 존경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중반부로 가면서, 본격적인 엽문의 활약상을 예고하고 있는데, 곧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국이 일본에 점령당하면서 불산 또한 식민지가 되고, 엽문이 살던 대저택은 일본군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 엽문은 일본의 회유를 거절하고, 궁핍한 생활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엽문의 가족들은 저 밑바닥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며, 점렴군에 의해 식민지화된 불산에서 힘없이 나약한 민초들의 처참함과 처절함 등을 체험하며 비애감을 느끼지만, 그 속에서도 가족애와 유대감만큼은 결코 잃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 한다. 엽문은 가족들이 생활고에 빠져들게 되자 결국 어렵게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애 처음으로 노동을 하여 돈을 번다. 그곳에는 이미 불산의 무술사부들로 낯익은 인물들이 많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 대장 미후라의 흥미 거리를 위해 무인들을 차출하러 온 전 경찰대장 리소와 만나게 되는데, 리소는 일본의 주구(走狗: 앞잡이)가 되어 통역을 하며 동포들을 사지(死地)로 몰며 고혈을 빨아먹고 있었다. 아무튼 리소는 탄광에서 일하는 무인들에게 일본 고수들과 대련하여 이기게 되면 많은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꼬셔 많은 중국 무인들을 데리고 간다. 이에 엽문과 함께 일하던 무치림도 선뜻 나서며 가겠다고 자원을 하자 엽문을 그를 말리지만, 무치림은 염려 말라며 다녀오겠다고 가버린다.
  무치림이 간 이후 한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차에, 엽문은 다시 광산을 찾은 리소를 보고 혹 무치림의 소식을 묻지만, 리소는 억지로 엽문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에 엽문은 무치림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 일본군들과 함께 죽음의 무도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엽문은 무도장에 도착하여 무치림이 대결 중에 미후라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게 되고, 전 중국 무인을 대표해서 일본무인들과 대련을 신청한다. 



 

  엽문은 분노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단숨에 일본 고수 10명을 쓰러뜨린다. 이를 보고 미후라는 경악을 하며 엽문을 자신의 수하로 거두려고 하지만, 엽문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이후 미후라는 집요하게 엽문을 찾게 되고, 친일파 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후라의 눈을 피해 도피를 하게 되지만, 결국 미후라가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의 주위 사람들은 물론 무고한 중국인을 핍박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아내와 아들을 홍콩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미후라을 찾아간다. 엽문의 아내는 피난 도중 엽문이 미후라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영원히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지아비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하고자 아들과 함께 불산으로 되돌아온다. 


  엽문은 화려하고 현란한 무술동작으로 어렵지 않게 미후라와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지만, 미후라의 부관이 쏜 권총을 맞고 그 자신 또한 쓰러지게 된다. 그러나 이를 도화선으로 불산민(중국인)들의 내면 속에 깊은 분노와 울분을 자아내게 되고, 이들은 단결하여 맨몸으로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맞서면서 저항을 한다. 이러한 와중에 엽문은 다행히 불산민과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벗어나 유유히 홍콩으로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무술의 고장 불산의 숨은 고수 엽문. 강호에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불산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불산민의 자랑이자 수호신, 전설과 같은 존재이다. 중일전쟁의 패배로 일제치하에서 놓인 중국. 친일파의 보장된 화려한 삶을 거부하고, 중국 민초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진정한 중국 무인의 기개를 보여주고자 고심하던 엽문은 나약한 중국인들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무공인 영춘권을 전수하여 중국을 지키고자 한다. 

  엽문은 한 편의 잘 다듬어진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엽문을 보는 중에 국권상실이후 일제 식민지가 된 중국의 불산의 모습에서 한일합방이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엽문을 보면서 일제의 식민지 치하(治下)에 놓였던 중국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많이 닮았구나 하는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고, 일제에 맞섰던 우리의 독립군도 아울러 생각이 났다. 근래 들어 아주 재밌게 가슴 뭉클하게 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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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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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다들 잘 알다시피, 연암 박지원은 조선후기 대문호이자 저명한 실학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의 빼어난 한문소설을 지은 작가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울 것을 역설한 북학파의 대표적 사상가로도 확고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문학사와 사상사를 논할 때 그를 제외시키고는 그 어떤 논의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연암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지고 있다. 그 가운데 훌륭한 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예담출판사에서 간행된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고 하는 이 책은 연암의 어려운 한문 글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와서 아주 감칠맛 나게 풀어 놓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연암의 어려운 한문 글을 이렇게도 풀어낼 수가 있구나! 감탄하며 한편으로 작가의 능력과 자질에 매우 놀랐다. 이 책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문장을 통해서 글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즉 “연암의 훌륭한 글쓰기의 전략”이 잘 녹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정독한다면, 학생들은 글을 쓰는 법을 이 한 권의 책에서 고스란히 다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난주 내내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일찍이 연암이 말한 바 있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의 또 다른 묘미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 연암이 200여 년 전에 지어놓은 문장을 가지고 소설의 형식을 빌려 소설 속에 연암의 글을 적당히 녹여서 참신한 한 편의 멋진 이야기를 재구성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연암이 재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면서 동시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책을 두고 “인문실용소설”이라고 했다. “인문실용소설”, 이 용어가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작가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간에 나는 이 용어를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신선함이 느껴졌다. 만약에 이 책의 저자가 처음 사용했다면,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구성 등이 모두 “인문실용소설”이란 장르와 매우 유효적절하게 부합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암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대문장가 이면서 동시에 연암학파의 수장으로 많은 훌륭한 지식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덕무, 박제가와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유득공, 이서구 등 4인은 조선후기 최고의 명문장가들로 이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가난한 서얼(서자) 출신의 선비들이었다. 법도가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서얼(서자)’은 벼슬을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연암의 문하에 들어가서 연암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한 결과 조선에 새 임금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정조가 등극하면서 이들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학문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이들을, 신분적 제약을 무시하고 특별 채용하여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삼은 것이다. 이들은 연암 박지원과 교유하며 이미 당대 문장의 대가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었다. 연암은 이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동반자였다.

  연암은 철저하게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일관하며 “연암체(燕巖體)”라고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고안해 내기도 하였다. 누구라도 예담 출판사에서 간행된 아담하고 예쁜 이 책을 정독한다면, 진실로 당대의 최고 실학자인 연암선생을 통해서 “짜임새 있는 글쓰기의 전략”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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