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 민족을 위하는 한 사람 그리고 민족의 혼이 된 한 사람
어지러운 세상,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통쾌한 “엽문”
최근에 보기 드문 감동작 한 편을 만났다. 견자단 주연의 “엽문”. 내가 본 “엽문”은 감동과 재미 두 가지 요소를 아주 맛깔스럽게 잘 버무린 영화라고 평(評)할 수 있을 것이다. ‘엽문’은 실존 인물로 70~80년대 무술의 화신으로 무술영화계를 풍미했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쌍절곤의 달인 이소령의 스승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하던 “영춘권”의 고수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는 엽문의 수련 장면을 보여주면서 시작되는데, 엽문은 이 때 이미 무(武)의 절대경지에 올라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엽문은 대저택을 소유한 불산 지역의 유지로 있으면서 예쁜 아내와 깜찍하고 귀여운 아들과 함께 산다. 평소의 소일거리는 홀로 무술을 수련하는 것이다. 즉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불산의 은둔 고수였던 것이다.
그는 무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품 또한 겸손하여 대련 시에도 폐관(閉關), 즉 문을 닫고 대련을 하며,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등 무술을 폭력이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로 승화시켜 표출해 낸다. 이는 엽문의 화려한 볼거리 이면에 중국무인의 부드러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불산의 무도관을 새로 개업한 한 요가권의 장문인 요사부가 엽문에게 도전하러 오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사람은 엽문 가족이 식사 할 때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대련을 청한다. 엽문은 점잖하게 거절하지만, 요사부는 굳이 대련을 고집한다. 엽문은 시종일관 예의로써 상대를 대우하고 함께 식사할 것을 청하며 나중에는 후식까지 함께하며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한다. 티타임과 식후의 끽연(喫煙)까지 맛있게 즐긴 요사부와 엽문은 아내와 아들이 자리를 피하자 드디어 문을 닫고 무공의 우열을 겨룬다.
영화를 보면서 엽문의 아내역로 나오는 웅대림의 미소와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그녀를 이 영화에서 처음 보았는데 느낌이 매우 좋았다. 웅대림은 단아한 중국의 여인상을 여지없이 보여주는데 특히,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남편을 현명하게 내조하고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의 의미지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웅대림의 잔잔한 미소와 연기 또한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녀의 단아한 자태가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 “엽문”은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과는 달리 다소 여성스러운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곰곰 생각해보면, 역시 영화 속에 그 해답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엽문이 구사하는 무술이 강한 남성미를 표현하는 무술이 아니라, 바로 부드러운 여인들의 무공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다. 영화 속에서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우락부락한 다소 과격한 권법을 구사하는 북방무술의 대가인 금산조가 굳이 도전을 피하는 엽문과 억지로 대련하기 위해 한껏 엽문을 약올리며, 엽문의 무술을 앝잡아 보고 비아냥거림으로서 엽문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정작 화를 내며, 도전에 응할 것을 허락하는 사람은 엽문 당사자가 아닌 바로 그의 부인이다. 이 부분에서 웅대림을 통해 중국 여인들의 강인함과 단호함이 드러나는데, 이는 부드러움 속에 들어가 있는 강인함과 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그저 단순하게 흥미 위주로만 만든 그런 영화가 아니라, 어느 정도 구도가 잘 짜여 진 영화라는 느낌을 들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엽문은 이윽고 불산의 모든 도장사범들을 무지막지하게 깨뜨린 우락부락한 산적두목 같은 금산조를 상대하여 가볍게 이김으로서 은둔 고수의 면모를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며 불산 시민들에게 영웅으로 부각되며, 존경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중반부로 가면서, 본격적인 엽문의 활약상을 예고하고 있는데, 곧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국이 일본에 점령당하면서 불산 또한 식민지가 되고, 엽문이 살던 대저택은 일본군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 엽문은 일본의 회유를 거절하고, 궁핍한 생활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엽문의 가족들은 저 밑바닥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며, 점렴군에 의해 식민지화된 불산에서 힘없이 나약한 민초들의 처참함과 처절함 등을 체험하며 비애감을 느끼지만, 그 속에서도 가족애와 유대감만큼은 결코 잃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 한다. 엽문은 가족들이 생활고에 빠져들게 되자 결국 어렵게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애 처음으로 노동을 하여 돈을 번다. 그곳에는 이미 불산의 무술사부들로 낯익은 인물들이 많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 대장 미후라의 흥미 거리를 위해 무인들을 차출하러 온 전 경찰대장 리소와 만나게 되는데, 리소는 일본의 주구(走狗: 앞잡이)가 되어 통역을 하며 동포들을 사지(死地)로 몰며 고혈을 빨아먹고 있었다. 아무튼 리소는 탄광에서 일하는 무인들에게 일본 고수들과 대련하여 이기게 되면 많은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꼬셔 많은 중국 무인들을 데리고 간다. 이에 엽문과 함께 일하던 무치림도 선뜻 나서며 가겠다고 자원을 하자 엽문을 그를 말리지만, 무치림은 염려 말라며 다녀오겠다고 가버린다.
무치림이 간 이후 한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차에, 엽문은 다시 광산을 찾은 리소를 보고 혹 무치림의 소식을 묻지만, 리소는 억지로 엽문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에 엽문은 무치림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 일본군들과 함께 죽음의 무도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엽문은 무도장에 도착하여 무치림이 대결 중에 미후라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게 되고, 전 중국 무인을 대표해서 일본무인들과 대련을 신청한다.
엽문은 분노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단숨에 일본 고수 10명을 쓰러뜨린다. 이를 보고 미후라는 경악을 하며 엽문을 자신의 수하로 거두려고 하지만, 엽문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이후 미후라는 집요하게 엽문을 찾게 되고, 친일파 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후라의 눈을 피해 도피를 하게 되지만, 결국 미후라가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의 주위 사람들은 물론 무고한 중국인을 핍박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아내와 아들을 홍콩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미후라을 찾아간다. 엽문의 아내는 피난 도중 엽문이 미후라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영원히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지아비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하고자 아들과 함께 불산으로 되돌아온다.
엽문은 화려하고 현란한 무술동작으로 어렵지 않게 미후라와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지만, 미후라의 부관이 쏜 권총을 맞고 그 자신 또한 쓰러지게 된다. 그러나 이를 도화선으로 불산민(중국인)들의 내면 속에 깊은 분노와 울분을 자아내게 되고, 이들은 단결하여 맨몸으로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맞서면서 저항을 한다. 이러한 와중에 엽문은 다행히 불산민과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벗어나 유유히 홍콩으로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무술의 고장 불산의 숨은 고수 엽문. 강호에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불산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불산민의 자랑이자 수호신, 전설과 같은 존재이다. 중일전쟁의 패배로 일제치하에서 놓인 중국. 친일파의 보장된 화려한 삶을 거부하고, 중국 민초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진정한 중국 무인의 기개를 보여주고자 고심하던 엽문은 나약한 중국인들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무공인 영춘권을 전수하여 중국을 지키고자 한다.
엽문은 한 편의 잘 다듬어진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엽문을 보는 중에 국권상실이후 일제 식민지가 된 중국의 불산의 모습에서 한일합방이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엽문을 보면서 일제의 식민지 치하(治下)에 놓였던 중국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많이 닮았구나 하는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고, 일제에 맞섰던 우리의 독립군도 아울러 생각이 났다. 근래 들어 아주 재밌게 가슴 뭉클하게 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