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를 독함 창해 최익한의 다산 3부작 교주본 1
최익한 지음, 류현석 엮음 / 21세기문화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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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여유당전서를 독함]은 창해 최익한 선생이 1938129일부터 193964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64회에 걸쳐 연재한, 다산 선생과 다산 학문에 관한 고전 비평이다.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약 8년간 징역을 살고 1936년 출옥한 창해는 [여유당전서]를 발간하고 있던 신조선사의 요청으로 다산의 일사와 일화, 저서 총목을 작성하였는데, 이후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완성하기 전까지 근 3년 동안 얼개를 구성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던 듯하다. 1938129<다산 선생의 애걸>을 시작으로 <연보>, <명호名號 소고>, <거주지 소고>, <저서 총목> 22편에 달하는 글을 193964일까지 동아일보에 나누어 게재하였다.(~69)

 

근 보름에 걸쳐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이 책을 정독하였다. 때론 이미 읽었던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뒷부분을 읽다가 내용이 와 닿지 않을 때에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였다.

 

18년 기나긴 유배동안, 조선에서 가장 궁벽한 오지로 알려진 땅끝 해남과 접한 강진에 거하며 [여유당전서]를 집필한 다산 정약용 선생도 대단하지만,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일제 치하에 언론의 탄압과 핍박 속에서 신문에 연재한 창해 최익한 선생도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두 분 학자 못지않게 이 책을 교주한 류현석 선생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산과 창해에 두 학인에 대한 뜨거운 마음,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이러한 책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부분은 이 책을 교주하고 연구 분석하기 위해 편자가 창해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무려 3번씩이나 베껴 쓰고 30번 가까이 읽었으며, 관련 논문 자료들도 죄다 찾아 읽었다고 한 점이다. 전문을 옮겨 쓴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가 아니고서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나 글귀를 만나면 노트에 옮겨 적어 본 적은 있지만, 이제까지 어떤 책의 전문을 베껴 본 적은 없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베껴 쓰지는 못할망정 정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쓴 창해 최익한은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영남학파의 거유 곽종석의 문하에서 3년간 성리학을 익히고 지리산 산방에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고 영어를 배우고 나서는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하였으며, 그 와중에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모금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호구지책 마련을 위해 언론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동아일보 등 일간지에 잡문을 기고하며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연재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였고 김일성종합대학 조선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까지 집필하여 최초로 다산 3부작을 완성하였다. () 한학을 공부하고도 신학문에뜻을 두어 1919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99월에는 중동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단발하고 변복을 하였다. (~37)

 

[여유당전서를 독함][실학파와 정다산]에 거의 다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창해 최익한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와 다산학 연구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창해는 19세기 격변하는 동아시아 세계와 조선의 미래 모습을 어느 정도 통찰하고 있었던 듯하며, 구한말의 지식인답게 구학문과 신학문을 동시에 배웠으며, 영어와 일본어에도 상당한 실력을 구비한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인상적인 내용을 만났다.

 

때는 1925년 을축 홍수 때이다. 한강이 전에 없이 불어 넘쳐 마현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선생의 사현손 규영씨의 결사적 작업으로 겨우 건져 내게 된 선생의 전서 외에는 여유당 옛집과 유물 전부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규영씨가 책을 구한 미담은 문화 보존사 차원에서 대서특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난 을축 홍수 때 한강이 불어 넘쳐 여유당의 구들방에 물이 달려든지라 씨는 생명같이 대대로 지켜 내려온 선생의 전서 서궤를 벽장에서 끄집어내 안방 다락에다가 옮겨 두었는데 () 때는 깊은 밤이고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탈출하느라 겨를이 없었지만, 씨는 홀로 황급히 다락에 뛰어올라가서 서궤를 끄집어내려고 하였다. () 급보를 들은 마을의 구조선이 달려와서 어서 나오라고 외쳤으나, ‘나는 다산 전집을 건져 내지 못하면 죽어도 못 나가겠다!’고 외쳤다. () 다음 날 강물이 빠지면서 선생의 옛집은 배가 되어 떠내려가 버렸고 오직 선생의 전서만이 사손의 매운 손에 잡혀 있다가 오늘날 세인의 눈앞에 활자로서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다.”(~400)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여유당전서]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다산 선생의 18년 기록유산이 홍수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하였다가 그야말로 구사일생한 게 아닌가. 홍수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한 [여유당전서]가 있었기에 우리는 다산 선생의 삶과 정신, 학문 세계에 대해 공부하며 연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정조시대 대학자로 정조와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천재 학자 다산 선생의 학문과 실학 세계 등을 좋아하여 관련 책들을 보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를 공부하면서 다산 선생을 논외로 하고는 그 시대의 학문은 물론, 정치·경제·문화 사상 전반에 걸친 내용들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때 다산 선생의 시문집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한문 실력이 얕아 이런저런 어려운 점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10여 년 전쯤에 한문 원문으로 된 [영인본 여유당전서]를 구입하려고 하다가 전문 연구자도 아닌데다 방대한 원서를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 결국 집에는 들이지 못했다. 대신 다산 선생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텍스트 [삶을 바꾼 만남],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들을 곁에 두고 지금도 꾸준히 애독하고 있다.

다산 선생 학문의 근간과 뿌리가 되는 18년 유배 생활의 결정체 [여유당전서], 그리고 그 책의 최초 풀이 해설서 격인 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이 책은 다산 선생 학문 연구의 출발을 알린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은 선생의 또 다른 저작인 [실학파와 정다산]과 함께 다산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텍스트이다.

[여유당전서를 독함 교주본] 이 책은 교주 류현석 선생의 노력과 공이 들어간 저작이다.

이 책을 지은 <창해 최익한의 생애와 저술>에서는 그의 삶과 학문 세계, 다산 3부작 시리즈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여유당전서를 독함 해제>, <1장 다산 선생의 애걸에서부터 마지막 22장 다산 사상에 대한 개평>, <원문 교주본>,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 시리즈는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과 함께 3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세 책은 서로 자매와도 같은 책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어 같이 보면 창해 선생의 다산 학문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산학 연구의 개척자 창해 최익한, 창해(滄海)란 그의 호에서 암울한 시대 넓고 큰 푸른 바다로 나아가려는 뜻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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