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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평점 :
한국 소설 : 고요한 밤의 눈
혼불문학상 제6회 수상작 '고요한 밤의 눈'. 2005년에 중편 소설로 등단하고, 2006년 '백수생활백서'라는 장편 소설로 제30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박주영의 작품이다. 혼불문학상은 '혼불'의 저자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그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1회 '난설헌', 2회'프린세스 바리', 3회 '홍도', 4회 '비밀 정원', 5회 '나라 없는 나라'가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그 이후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고요한 밤의 눈'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기억과 양심, 진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도.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한 사람은 언니였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늘 사라진다. 내가 언니의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건 그 이야기를 했던 바로 그 사람, 언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p. 13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활동을 통해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스파이들이 나온다. 소설은 처음엔 일란성 쌍둥이 언니가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D가 나오고, 곧 이어 15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남자 X가 나온다. 기억을 잃은 채 누군가 알려준 삶이 자신의 과거라는 것을 '이해'해야하는 남자. 그는 그렇게 누군가 알려준 대로 스파이가 된다.
언니와 나는 한 번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거의 모두 기억하는 유별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때로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별 다섯 개의 기억과 별 한 개의 기억이 같으면 기억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18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이제 언니는 세상에 기록된 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p.19
그렇게 스파이가 된 X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아갔고, 그것은 바로 D의 언니의 병원. 그는 처음엔 언니와 상담했지만 그 뒤로는 D와 상담했고, 일란성 쌍둥이인 둘 덕분에 계속 오해한채로 자신의 상황을 알린다. 그렇게 15년의 기억을 잃은 채 스파이가 된 X와 그의 친구 역할이며 그 이후에는 여자친구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는 여자 스파이 Y. 그리고 그 둘의 보스인 B. 모든걸기억하는여자 D와 Y에게 감시를 받는 작가인 Z가 나오며 각각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장 덜 양심적이고 덜 진지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이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누군가는 먹고 살기 바빠서, 누군가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다만 지켜보고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 하게 되고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고 만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래서 가끔은 바꿀 수 있다고 희망했다가 또 좌절하고 마는, 더 양심적이고 더 진지한 사람들. - pp. 45-46
스파이 소설이지만 스파이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 현대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고요한 밤의 눈'. 목적 없는 삶. 목적 없는 수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매일 감시당하는 사회 속에서 목적을 잃은 채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런 삶 속에서도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적 없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가치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책은 위험하지. 책을 대신할 유희는 많지만 책보다 생각늘 깊이 전달하는 것은 없지. 책을 만드는 데 돈이 덜 들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떠돌면서 불어나니까. 한때 작가는 시대의 양심으로 일종의 혁명가였어. 그리고 혁명가는 거의 모두 작가야. 그들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남기지. 지배자들은 그래서 늘 책을 없애려고 해. 언제 죽을지 모를 세상에 책은 육체가 사라져도 살아남는, 영혼같은 거거든. - p. 275
무명 소설가 Z. 그는 등단한 뒤 제대로 팔리지 않는 작품을 쓰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왜 감시를 당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신청한 것도 까먹고 있었던 지원금 제도에 뽑혀 그가 쓰는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조그만 돈을 지원받으며 자신이 입고 쓰는 보든 것을 알려야 하는 Z. 그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진보단체에 글을 투고했다가 지원금이 삭감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은 사람들의 의식마저 생계를 위해 바꿔놓으려고 애를 쓴다.
부자라는 건 재산내역서의 숫자처럼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여러 태도의 집합, 즉 특정한 삶의 방식이다. - p. 130
작 중 부자에 관한 시각도 자못 흥미롭다. 부자라는 건 그저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여러 태도의 집합이라는 것. 지나쳐갈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에피소드인데 보스 B가 백화점에서 차별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저 겉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 그들은 높은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저자세를 보이면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B에게는 차별을 하며 그가 예약한 시계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까지 한다. 언제부터 사람의 내면보다 외면이 중요하게 되었는가. 나 또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타인에게 가하고 있지는 않는가.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역사가 승자들에 의해 쓰이는 건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패자들은 무얼 쓸까요. 진실을 쓸 때까지 멈추지 마십시오. - p. 320
그런 와중 독서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비밀스럽게 전달되는 독서클럽의 초대장. 그 초대장을 받는 이 중에는 미쳐버린 줄 알았던 여자 스파이 Y의 어머니도 속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 '패자의 서'! 패자의 서는 쓰인 책이 아니다. 어떤 것이 패자의 서가 될 지. 소설가 Z의 감시당하는 삶처럼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는 삶. 그런 현실 속에서 가치를 찾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찾은 컨텐츠로 책이 쓰였다는 것도 굉장히 흥미롭다. 그 진실은 통제당하는 삶 속에서 조각나도 이래저래 덧붙여진다. 소설 속 패자의 서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그것은 우리의 행동하는 미래에 달려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