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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북한 소설 : 고발
정말 놀라운 소설을 읽게 되었다. 북한에서 쓰인 소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에 비견되는 저항작가인 반디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출시킨 소설 '고발'. 제목부터 굉장히 저항 의식이 느껴졌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는 탈북자가 쓴 소설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작가가 이 소설을 반출시키고 아직도 북한에 있다는 것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소설은 정말 북한 사상의 문제점과 연좌제로 인한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낱낱이 고발하며 세상을 향해 이 일상을 알아봐주오, 하고 부르짖고 있는 책이었다.
글쎄 이 '리히철'이가 오늘의 '상놈' 성분을 타게 된 이유라는 것이 뭐였겠나. 그것은 고작해야 아버지가 한 파장의 랭상모를 죽여버렸다는 게 전부였다네. - p. 15 '탈북기'
저자의 최초 원고를 충실하게 살리기 위해 북한식 표기는 최소한으로 수정하였다는 소설에는 2부 대기실, 1호 행사, 가정성분, 적대군중, 내각 결정 149호, 반당 반혁명 종파분장, 생활제대, 어망처망스럽다, 게거리, 탕개 등 낯선 단어가 가득하다. 이 단어들을 최대한 배제하지 않고 주석을 달아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7가지의 단편 소설을 담고 있다.
그래. 나 역시 지척도 천리 밖으로 살아야 하는 조롱 속의 짐승인가보다! 조롱 속의 짐승! - p. 144 '지척만리'
이름을 숨기고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원고를 반출시킨 이 소설은 전 세계 20개국에 번역출간되었으며 영국 PEN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2017년 3월 말에는 출판 기념 국제 컨퍼런스도 개최된다고. 저항정신을 한껏 실려 출간된 이 책은 이미 남한에는 2014년에 출간되었으나 전세계 동시 출간에 맞춰 새롭게 재출간되어 나도 이 책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산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디가 아프거나 슬퍼서 엉엉 울어도 그것이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만 되어 나왔으니 세상에 그처럼 악한 마술이 어디 있고 그처럼 무시무시한 동산이 또 어디 있겠수. - pp. 178-179 '복마전'
탈북자들이 북한에 대한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은 종종 있었지만 북한에서 반출시킨 소설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고 하니 그의 이러한 행보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한 일인지 상상이 된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은 가끔 상상해보긴 했으나 생각보다 더 폭력과 억압,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어 마음 한구석이 선뜩했다. 단편 소설들로 짤막하게 토막낸 일상들이니 실제로는 얼마나 더 가혹하단 이야기일까. 누구 한 사람 믿을 수 없어 말을 삼가고, 마음을 숨기고, 그럼에도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사상범'으로 몰려 대대손손 연좌제로 '가정 성분'에 낙인이 찍혀 영영 출세는 커녕 생존이 위협받는 숨이 턱 막히는 진실들.
이런 쓰레기나 가지고 물어들이고 받아들이며 사람들을 억압, 통제하려 드는 자들이 말입니다. 진실한 생활이란 자유로운 곳에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구요. 얼마나 처참해요. 지금 저 조의장에선 벌써 석 달째나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꽃을 꺾으려고 헤매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들의 눈물이 진실이란 말입니까. 예? 백성들을 이렇게 지어낸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명배우로 만들어버린 이 현실이 무섭지도 않은가 말입니다. - p. 209 '무대'
피임약을 먹는 아내를 의심하다가 밝혀진 진상에 절망해 떠나기로 결심하는 '탈북기', 마르크스와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이상하게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와 그로 인해 덧커튼을 달아 추방당하는 '유령의 도시', 해방 후 첫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실망하고 아끼던 느티나무와 스스로를 죽이는 '준마의 일생', 1호 행사로 인해 2부에서 여행증을 받지 못해 몰래 어머니에게 가다가 발각돼 험한 꼴을 당하고 임종을 지키지 못해 좌절하는 '지척만리', 김일성이 여행을 간다 하여 기차와 도로 모두 통제되어 굳게 마음 먹고 역에서 굶고 기다리다가 산달이 머지 않은 이를 보다 못해 길을 나선 할머니가 그렇게 일을 만든 원흉인 김일성이 선심쓰듯 태워준 일로 인해 선전자료로 이용되는 일에 기막혀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복마전', 김일성 죽음 전후의 국민들의 애도의 눈물을 연극에 빗대어 세뇌하는 체제를 비판하는 '무대', 체제에 대한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빨간 버섯'까지. 7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무서운 일은 이 나라가 아직도 같은 체제 안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번을 쏘아도 죽이지 못할 겁니다.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은 저의 욕망만은! - p. 210 '무대'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같은 시대 속 이렇게나 다른 세상이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고 목숨을 걸고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있고, 체제에 길들여져 같은 동포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이들 또한 함께한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에 많은 사람을 잃고 저자 반디는 지금껏 느낀 북한 사회에 대해 책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한 책의 제목이 '고발'이라는 것도, 실제 담긴 사연들이 무엇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도 가슴이 쓰리다. 많이 읽혀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