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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기쁨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림원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프랑스 소설 : 검은 기쁨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 중 한 사람인 슈미트의 세번째 소설집 '검은기쁨'을 보았다. 프랑스 4대 문학상 공쿠르상 단편소설 부문 수상작을 담고 있다고. 작가가 철학교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정말 고민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는데 단편소설들의 모음이지만 '성녀 리타'가 모든 작품에 등장해 단편집으로 한데 모아주고 있다. 각 작품에서 나오는 '리타'의 역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마지막 작품 뒤에 붙은 '작가 일기'에서 해설을 덧붙여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녀가 연기하는 것을 이미 다들 보았다. 예술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만드는 환각이다. 오히려 예술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지 않은 결국 감춰지지 않는 그 인위적인 기질을 보여주어야 하는 법이다. 연극적인 마리 모레스티에는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거기서 그녀가 표리부동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그게 그녀가 지닌 품위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 p. 24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한 매력이 있었던 '생 소를랭의 이상한 여인'의 주인공 70세 '마리 모레스티에'는 세 번이나 결혼했지만 세 번 모두 사별한 노부인이다. 그녀는 모든 남편들을 살인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나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기에 법적으로는 떳떳하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온갖 악의적인 소문과 두려움에 찬 수근거림을 받고 있다.
그런 은밀한 유명세와 특별한 위상을 즐기고 있는 '마리 모레스티에'는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를 보고 어떤 계기를 갖게 된다. 고해성사의 고해는 누구에게도 밝히면 안된다는 점을 이용해 신부의 관심을 받으며 그에게 점점 매혹되어가는 마리 모레스티에. 당신은 내 존재이유이자 내 기도이유이자 믿음의 이유라며 믿음으로 마리를 변화시켜보이겠다는 아름다운 신부에게 만족하며 자신의 고백을 세상에 알릴 것인가에 대해 손익을 궁리한다.
이 작품에서 '성녀 리타'는 신부가 쓴 논문으로 등장하는데, 이 것은 신부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반면 마리 모레스티에에게는 좌절의 이유가 된다. 또한 성녀 리타의 논문으로 인해 굳게 먹은 마음이 스러지는 것도 우스꽝스럽게 보여진다. 한 사람에게는 좋게 발현하는 현상이 한 사람에게는 나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이 검은 기쁨과 함께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보인다.
동료들은 각자 그레그가 견뎌내야 할 고통을 떠올렸다. 침묵에 빠진 배 안의 고독한 죄수. 그는 선박의 화물만큼이나 무거운 슬픔에 짓눌릴 것이다. 이 끔찍한 질문에 고문을 받듯 괴로울 것이다. 도대체 네 딸 중 누가 죽었는가. - p. 78
두 번째 작품인 '귀환'은 끔찍한 고뇌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절망을 그린 작품이다. 배를 타고 나와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딸이 죽었다고 전보를 받은 아버지. 육지와는 연락이 원활하지 않아 네 딸 중 누가 죽었는지 본인은 알 수가 없고. 그는 누가 죽었을지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레그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숙고라는 끝없는 노동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고 그는 녹초가 되었다. 겉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그레그가 지금 그레그의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도덕적, 지적 의식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야수의 집으로 들어와 앉았다. - pp. 91-92
가장 먼저 떠오른 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딸. 그리고 뒤 이어 떠오른 것은 가장 마음이 가지 않던 딸. 그러면서 자신은 네 딸 가운데 차라리 누군가의 이름이 전보로 오기로 바라는 자신을 비열하다고 생각한다. 창피해진 그는 서서히 딸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또 아내까지 떠올리며 번뇌에 휩싸인다. 그리고 늘 가까이하기 어렵고 두렵기만 했던 낯선 남자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귀환한다. 이 편에서 '성녀 리타'는 동료가 그에게 마음이라도 편해지라며 준 성경에서 발견하고 기도하게 되는 성인으로 등장한다.
이제는 사십 대가 되어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착각과 오해가 생겨나고 있었다. 각기 상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분명하고 결정적인 특성을 가진, 강한 개성의 인물을 각자 조각했던 것이다. 크리스에게느 악셀이 하나의 완벽한 정전이 되어 있었고, 악셀에게 크리스는 성공의 한 전형이 되어 있었다. 상대를 대신하고 싶은 의지와 초월하고 싶은 의지가 뒤섞여, 그들은 각각 상대를 모델로 삼으며 삶을 건설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공상적인 건축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 pp 159-160
그리고 표제작이자 가장 대비되는 이미지가 강했던 세 번째 작품 '검은 기쁨'. 이 이야기는 피아니스트인 '크리스'와 '악셀'의 이야기로 이길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악셀'을 질투하는 '크리스'의 심리를 묘사하다가 사고로 인해 뒤바뀐 운명, 그리고 그 후에는 '악셀'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한 사건이 두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놨는지, 그리고 다시 만난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지, 결말까지 감정선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리타는 여기에서 기념품들로 나오는데, 기념품들을 이야기하는 것도 눈여겨봄직하다. 같은 재료로 성녀 리타가 나올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상반된 것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 미래가 촉망되던 예술가가 악에 휩쓸리고 또 그렇게 완성되는 결말 안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있어 관련 지식이 있다면 더욱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겉감과 안감에 다 붙어 있다. 증오 없는 사랑이 있을까? 애무하는 손은 곧 단도를 쥐게 된다. 분노를 모르는 사랑이 있던가? 모순을 안은 한 충동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p. 251
네 번째 작품은 '엘리제의 사랑'으로 프랑스 대통령인 '앙리 모렐'과 그의 아내 '카트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재선을 준비하는 것과 앙리 모렐과 카트린의 감정 두 가지 줄기를 보여주며 한데 모아진다. 이런 종류의 서사구조는 익숙한 만큼 확실히 몰입도가 좋은데 마지막 결말이 소소한 반전으로 보여진다.
쇼윈도부부이자 서로를 믿지 못해 끝내 죽음 후에도 안절부절 못했던 순간들은 사건을 기점으로 큰 믿음으로 바뀌었다. 살아있을 생전 믿지 못한 사랑을 죽고 나서야 보여주는 아이러니. 이 이야기에서 '성녀 리타'는 부인인 '카트린'의 투병생활과 관련해 '성녀 리타의 요양원'으로 등장한다.
리타는, 절망적인 이유들의 마돈나로, 불가능의 성녀인데, 내 이야기들 가운데서 다면의 보석처럼 솟아오른다. 그 빛이 아이러니할 때도 있고, 그 빛이 도화선이 되기도 하고, 때론 시니컬하고 때론 희망의 전달자 같기도 하다. 그녀를 빈번하게 출현시킨 것은 선의 모호성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좋게 나타난 것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야기한다. 바울을 잃은 자가 베드로를 구할 것이다. 성녀 리타는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오브제이다. 그러나 성녀 리타는 오브제를 통해 이야기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 p. 276
논문으로, 기도로, 기념품으로, 요양원으로 등장하는 성녀 리타의 쓰임에 대해 생각하는 재미가 있던 단편집. 문장 하나하나가 곱씹어볼 여지가 있는 철학적인 작품들이었다. 번역본도 이렇게 문장이 재미있는데 원본은 얼마나 흥미롭게 다가올까 생각하면 원문을 읽어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던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의 단편집 '검은 기쁨'. 추천하고 싶은 단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