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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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사가 확인되면 그 사람은 죽은 걸로 간주되니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심장이 아직 움직인다 해도 사체로 취급합니다. 정식으로 뇌사 판정이 내려지는 시각을 사망 시각으로 보고요. - p.57

 

참 유명한 작가 중 하나죠. 저도 학창시절에는 전 작품을 구해 즐겁게 읽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졌나 싶을 정도로 흡입력이 사라져 신작들이 나와도 시들시들해졌었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이번 신작 인어가 잠든 집은 내가 널 지킬게, 하는 문구가 크게 띠지에 박혀있는데 책소개에는 '지금 이 아이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면, 그래서 아이의 심장이 멈춘다면, 딸을 죽인 사람은 저입니까?' 라는 문구가 나오더군요. 언뜻 보면 상반된 것 같은 이 문구들만 봐도 흥미진진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펼쳐든 책장은 쉴 새 없이 넘어갔고, 흥미진진할거라는 예상은 기분좋게 적중했지만 생각보다 더 가슴아픈 이야기였네요.


○ 두 가지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처음에 권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은 따님을 어떤 형태로 보낼 지, 그러니까 심장사와 뇌사 중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 p. 58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신체에 있을까요 뇌에 있을까요? 뇌사 판정을 받으면 장기기증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뇌사 판단을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건 장기기증을 할 의사를 밝히고 난 다음이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뇌사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뇌사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장기기증 의사를 확실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장기기증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뇌사추측만을 받은 채 의식이 돌아올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연명치료를 하게 되는거죠. 그 상태의 사람은 살아있는 걸까요, 죽어있는걸까요.


○ 연구반의 리더였던 다케우치 교수가 가장 중요시한 점은 포인트 오브 노 리턴, 즉 소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도 '뇌사'가 아니라 '회복 불능' 또는 '임종 대기 상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장기 이식 문제를 진전시키고 싶었던 관리들로서는 '죽음'이라는 말을 꼭 넣고 싶었겠죠. 그 탓에 문제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고 생각합니다. - p.381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혼을 보류한 한 부부는 입학 관련 면접 직전에 한 연락을 받습니다. 딸이 수영장에 빠져 의식불명이라는 내용이죠. 의사는 뇌사일거라고 진단하지만 부부로서는 그 진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겁니다. 확정을 받기 위해서는 무호흡 테스트 등 여러 판단과정을 거쳐야하고, 그 이전에 장기기증 의사를 밝혀야합니다. 이 상황에 처한 게 저라면 과연 동의할 수 있었을까요? 비용문제를 제치고 그 부담을 기꺼이 질 수 있는 재력이 있다면 글쎄요. 쉽게 동의할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명치료를 하는 건 그저 부모의 욕심일까요?


○ 지금 집에, 저희 집에 있는 제 딸은 환자입니까? 시체입니까? - p.384

 


이 부부는 연명치료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않고 최신 과학의 힘으로 인공호흡기를 대체할 수 있는 호흡기 삽입술을 받게 해 호흡할 수 있게 만드는가 하면, 척수를 자기로 자극해서 전신 근육을 운동시키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장기기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알게 되어 죄책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뇌사와 심장사, 인간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생각보다 충격적인 휴먼 미스터리였어요. 이미 작년에 영화화도 되었다고 하고 올해 상반기에 국내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영화와 책, 둘 다 챙겨 봐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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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별 이야기
하타나카 다케오 지음, 김세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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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에 보이는 별은 모두 은하계 안에 존재하는 별이지만, 그중에서도 어느 별은 가깝고 어느 별은 멀다. - p.16


나는 밤마다 별들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해. 그건 마치 오억 개의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아. 제가 좋아하던 동화 어린왕자에는 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죠. 최근에 관련 공연을 보고 왔더니 더욱 별에 대한 애틋함이 커져가네요. 예전부터 하늘을 바라보거나 별들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던 터라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에서 관련 서적이 나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에 받아본 시리즈는 이와나미시리즈라고 하는데요. 평소에 눈여겨보던 트리비아와는 다르게 조금 더 전문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 이처럼 냉정하게 과학적인 논쟁을 하다가도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천문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별자리에 담긴 낭만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 p.19


그 중에서도 제가 받아 본 하타나카 다케오의 우주와 별 이야기는 별의 생태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인데요. 처음부터 너무 전문적으로 접근해 흥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별자리에 관한 신화나 이야기를 언급하는 등 읽기 편하게 도와주더라구요. 그나저나 과학적으로 별과 우주에 접근하기 위해 읽은 하타나카 다케오의 우주와 별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점이 먼저 눈에 띄는 걸 보면 역시 저는 뼛속까지 문과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 별은 움직인다. 먼 옛날 행성을 항성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항성이 천구에 고정되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들의 위치는 조금씩 바뀌어간다. - p. 30


하타나카 다케오의 우주와 별 이야기는 별자리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별의 이야기로 조금씩 무게중심을 옮겨갑니다. 제가 별에대한 이야기 중에 가장 재미있던 건 백조자리 61번성, 짧게 줄여말하면 백조자리 61인데요. 백조자리 중 왼쪽 상단에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빛나는 이 별이 희귀한 별이라는 거, 알고 계신가요? 지구와의 거리가 맨 처음 밝혀진 별이기도 하고, 최근 들어 행성계를 거느리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고 하기도 해요. 이 백조자리 61을 이용해 지구와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있는데 저는 이쪽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굉장히 신기하더라구요.


○ 우주 안에 우주의 나이보다 훨씬 젊은 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우주진화론의 근거 중 하나다. 현재 우주의 모습은 우주가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우주는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 p. 44


그 외에도 하타나카 다케오의 우주와 별 이야기에서는 다른 별의 이야기를 해주고, 우주의 이야기로 슬슬 넘어가는데요. 우주진화론도 굉장히 흥미진진하더라구요. 우주가 탄생한 때보다 훨씬 나중에 만들어진 묘성에 대한 이야기도 전 처음 접했는데요. 묘성의 별들도, 흩날리는 별무리도, 저마다 속해있는 별들이 동시에 생겨났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우주의 나이에 비해 나이가 어린 별들이 있다는 점이 재미있네요.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별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구요. 



○ 이처럼 행성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면 생명이 살 수 있는 장소 역시 무궁무진할 것이다. 우리가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몇몇 별들 옆에 보이지 않은 행성이 존재하며 그곳에 생명이 싹트고 있다고 상상하다보면, 넓고 아득한 우주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된다. - p. 223



우주와 별 이야기가 이처럼 매력적인 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많은 가설들이 등장했고, 수용되고, 부정되었죠. 미지의 부분이 많은 분야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많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토록 밤하늘에 매료되는 것 같아요. 특히 이 책은 저자의 감성이 군데군데 실려있기 때문에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만 다루는 책에 비해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 장점인데요. 우주와 별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처음 접근하기 괜찮은 도서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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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리퀄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선 옮김 / 에이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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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어쩌면 나는 제스트를 모를지도 몰라.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히 알고 싶은 마음만은 명확했다. - p. 263


나이 들어 읽고 본 많은 작품들 중에는 인상적이어서 오래 기억되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어릴 적 읽어본 동화 속 이야기들은 왜이렇게 가슴 한구석에 특별히 간직되는 것들이 많을까요. 제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 중 하나입니다. 특별한 세계관, 신기한 묘사들, 그 이미지들이 아른거리며 이상하고도 사랑스럽다고 기억되고 있죠. 키링이며 다이어리며 각종 상품들의 구매로 이어지게도 되었을 정도로 좋아하는 동화인데요.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분이라면 분명히 좀 섬뜩했을 하트여왕도 기억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 그 약속을 한 것은 가장 친한 친구와 베이커리를 열려고 했던 여자였다. 그 약속을 한 것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상류층에서 쫓겨나는 것쯤 개의치 않는 여자였다. 그 약속을 한 것은 완전히 다른 운명을 지닌 여자였다. 캐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뻗어 티아라를 고쳐 썼다. 메리 앤은 캐스의 비밀을 폭로했다. 제스트는 스스로 영원한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게 허사가 아닐 수도 있다. 캐스는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감히 여왕이 된 자신을 상상했다. - p. 454


마리사 마이어의 하트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리퀄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하트여왕이 되기 전 캐서린 핑커튼, 줄여서 캐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동화 속에서 그 자의 목을 치라며 한껏 비정하게만 보이던 하트여왕은 원래부터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 점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마리사 마이어의 하트리스는 귀족임에도 달콤함을 내는 빵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와 베이커리를 만들고싶은 야심찬 꿈에 가득 차있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어떻게 하트여왕이 되어가는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 내가 행복을 얻지 못할 거라면, 적어도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게 해줘. 나는 네게 여왕의 심장을 주고 싶어. - p. 468


그 과정에는 제스트라는 운명적인 사랑이 등장하는데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명예로운 결혼을 안팎으로 강요받고 있던 캐서린 핑커튼이 매혹적인 궁정악사에게 빠져들어가는 과정이나 흔들리는 마음이 잘 드러나 몰입해서 볼 수 있겠더라구요. 어린 소녀에게 집안의 기대와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감정, 높은 권력자의 대놓고 하는 구애에 얼마나 등돌릴 수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솔직하고, 그래서 괴로워하죠.


○ "하트의 궁정 어릿광대였던 제스트를 살해한 죄로, 나는 이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더는 사랑이나 꿈이나 깨짓 심장에 짓눌리지 않는 무감함 속에서 캐스가 말했다. 그날은 하트의 새로운 하루였고, 캐스는 여왕이었다. "저자의 목을 쳐라." - p. 607


흔한 서사구조임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리퀄이라 그런지 독특한 문장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해주던 마리사 마이어의 하트리스. 꿈 많고 발랄했던 소녀가 하트여왕이 되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아 재미있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리퀄 말고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후속작에서 하트여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매력적인 주인공이 될 것 같아요. 앨리스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마리사 마이어의 하트리스 좋은 선택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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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교계 가이드 - 19세기 영국 레이디의 생활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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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니셜을 대문자로 'Sociery(사교계)'라고 당당하게 표기했을 경우, 그것은 특별한 지정이 없다 해도 '런던 상류 사교계'를 가리켰다. 이러한 영국 상류 사교계 사람들은 5~7월 초여름이 되면 의회의 개회에 맞춰 런던으로 모였다. 자신이 소유한 타운 하우스로 이사하거나, 고급스러운 일등지에 집을 빌리는 등의 방법을 통해 '런던 사교기(시즌)'에 돌입했던 것이다. - p. 35


저는 중세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예요. 특히 가벼운 판타지와 로맨스가 같이 결합된 장르를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주로 읽곤 하는데요. 그런 작품들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로열패밀리와 유명인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죠. 그러다보면 그들 사이의 은근한 우월감이나 여러가지 규율, 그걸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보이는 은근한 차별과 멸시같은 걸 많이 접하게 됩니다. 실제 그 시대를 알지 못하고 창작물로만 접해오다가 이 시대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 있길래 한번 읽어보게 되었어요. 그 책이 바로 이 무라카미 리코의 영국 사교계 가이드였습니다.


○ 점찍은 상대와 꼭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예를 들어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타인의 파티에서, 잡지 같은 걸로 일방적으로 얼굴을 아는 유명인을 발견했다 해서 갑자기 다가가 자기 소개를 하는 건 중대한 에티켓 위반이었다. 반드시 양쪽 모두를 아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야만 했다. - p. 37


영국 사교계 가이드를 일본인이 쓴 저서로 읽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 드네요. 이 시대 이 부류의 인물들에게 그만큼 어느정도 환상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뜻이겠죠. 저도 그 중 남성들에게도 꼭 필요한 무대였겠지만 19세기 영국 레이디의 생활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을 만큼 사교계는 여성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는데요.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시기였기에 결혼으로 많은 것이 바뀌던 시대에서, 그렇기 때문에 사교계는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더라구요.


○ 오전과 오후, 전원지대와 런던, 평일과 일요일에는 입는 옷이 다르다는 것, 파라솔이나 모자 등 소품 사용법에도 규정이 있었던 것 같다는 내용도 알아낼 수 있다. - pp. 68-69


무라카미 리코의 영국 사교계 가이드를 보면 그들에 의해 행해지는 거의 모든 일은 규칙이 있고 함정도 있습니다. 돈만 많은 중류층 사람들이 쉽게 섞여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그들만의 계급의식 덕분이죠. 초대장 한 장을 보낼 때에도 규격이 있고 사용하는 종이가 다르고 디자인이 다르더군요. 게다가 남편의 카드, 부인의 카드, 결혼하지 않은 자의 카드도 전부 다릅니다. 전달하게 될 때에도 직접 전달의 경우, 사용인을 부리는 경우가 다르고, 방문 시에도 놓아야 하는 자리가 있죠. 그리고 그 자리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즉 태생부터 다른 자의 초대장을 거르기 위한 함정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상류 사교계의 에티켓』(1893)에는 자택에서 지내는 날의 오전에 입는 드레스는 너무 비싸지 않은 색이 있는 면이나 모직 등의 소재로, 청결하고 장소에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라고 추천한다. 장식은 가능한 한 심플해야하며, 고급 레이스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다. 보석 장식품은 심플한 골드로, 반지라면 보석이 달려 있어도 괜찮지만, 투명한 보석은 밤의 정장(풀 드레스)'일 때만 한다. -p .70


수많은 규칙을 외우고 까탈스럽게 타집단을 배척하는 머리좋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귀족층이었으니 초대장만 하더라도 그 정도인데 옷차림이야 말할 것도 없죠. 하루에 몇 번씩 갈아입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소에 따라 입어야 하는 옷의 소재부터 다릅니다. 게다가 당시 옷차림은 유행이 한 달만 지나도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옷에 어울리는 장신구도 까다롭게 규정을 정한데다가 장소마저 한정지어버리니 전 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라카미 리코의 영국 사교계 가이드를 읽기만 하는 입장인데도 기가 질리더라구요. 이런 생활은 피곤하고 머리아파서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 상류 사교계의 여주인에게 요구되는 역할 중 하나에, 밤의 식탁에 초대한 손님들의 리스트가 절묘할 것, 이라는 사항이 있었다. 현재 한창 유명한 정치가나 관료, 말을 잘하고 그 장소의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스킬을 지닌 예술가, 기지가 풍부한 유부녀,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미모의 '프로 미녀(프로페셔널 뷰티)' (그 자리에 자리한 고귀한 남성의 은밀한 정부이기도 했다) 등을 잘 조합해 자극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 p. 96

그런 한편 요즘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주 불리는 호칭들도 나오니 자연스럽게 보고있던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며 재미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인맥을 늘리려고 애를 쓰는 사교계에서 안주인들의 노력을 보고있으니 신기하기도 했구요. 이 시대를 배경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고증을 위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던 무라카미 리코의 영국 사교계 가이드. 뒤에 참고한 문헌들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깊이있게 파고들기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냥 이 시기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쉽고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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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노래
미야시타 나츠 지음, 최미혜 옮김 / 이덴슬리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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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열정을 원한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는 열정. 그건 재능이나 개성, 노력이나 소질, 가능성, 환경, 유전, 기회와는 별개인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비슷한, 불투명한 미래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 pp. 16-17


기쁨의 노래에서 이어지는 미야시타 나츠 신작 일본소설 끝나지 않은 노래 전 작을 읽지 않은 상태로 읽어보았습니다. 워낙 공연 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이런 소재로 만든 책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이 끝나지 않은 노래가 공연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더군요. 기쁨의 노래 후속작이나 다름없다고 해서 이해가 가려나 조금 걱정이 되었었는데 전 작품을 읽지 않더라도 문제없이 잘 읽히더라구요.


○ 우리는 우주의 흔적이다. 먼 어딘가에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서, 분명 서로 울려 퍼질 것이다. - p. 191


기쁨의 노래에 나온 아이들이 그 배경이 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의 이야기를 그린 연작소설 미야시타 나츠의 끝나지 않은 노래. 옴니버스식 구조를 가지고 있어 한 단편에 나온 아이가 다른 작품에 나오기도 하고, 언급이 되기도 하는 등 서로 이어져 있어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 탐색하고 걱정하는 시기의 아이들은 그 길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데요. 그런 순간들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해내 공감을 자아냅니다.


○ 노래하는 게 좋고, 춤추는 게 좋고, 연극이 좋아서 무대에 서기를 원한다. 무대 위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무대에 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느끼지 못하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아니, 기다리지 않는다. 세계는 열려 있다느니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기어올라 거기에 서지 않으면 무대는 나 없이도 돌아간다. 컥, 하고 목 안쪽이 울리는 것 닽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무대를, 내가 나가서 더욱더 빛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무대 밑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 p. 214


그 이야기들 중 눈여겨보게 되던 건 '시온의 딸'에 나오는 성악과 레이와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언급이 되는 뮤지컬 신예 '치나츠'였습니다. 최근 들어 옛날에 했던 방송 팬텀싱어라는 예능프로그램을 정주행하며 보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생각나게 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성악을 향해 달린 레이와 뮤지컬만 보고 나아간 치나츠였기에 더욱 더 겹쳐보이더라구요. 그 프로그램에서도 많은 재능있는 자들이 낙담하고 자책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오는데 참 씁쓸하기도 했거든요. 음악을 자신의 길로 삼은 아이들이라 그런지 통하는 것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아보이고 자신의 재능과 소리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게 보여 확실히 다른 에피소드보다 눈길이 가더라구요.


○ 내가 두 사람의 노래에 맞추자. 두 사람의 노래가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두 사람에게 맞추고 나서 나는 내 노래를 부르자. 예각이 되거나 둔각이 되면서 가장 아름다운 삼각형을 목표로 하자. 괜찮다. 맞춘다고 해서 내 노래의 강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소중하게 키워온 건 그렇게 나약하지 않을 것이다. - p. 275


소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술과 틀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호불호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이 역할을 맡지 못하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의 실력에 대해 실망할 때 토닥여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이 좋은 기회를 얻어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저 또한 기분이 들떠 책장을 넘기는 속도도 빨라지더라구요. 목표로 해온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맞춰가는 속도도 달랐지만 그랬기에 더욱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서로를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리, 2B반에서 마지막으로 노래할 때 미래의 자신을 향해 부르자고 했었잖아. 기억나? 지금이 그때 말한 미래야. 그때부터 정확히 지금으로 이어져 있는 거야." 그 순간 몸 깊은 곳에 그 때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빛 속에서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의 눈을, 소리를 봤다. 흐르는 피아노. 지휘를 위해 번쩍 치켜든 내 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서른 개의 목소리가 눈이 녹은 작은 개울처럼 솟구쳐 흘러내렸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이어져 있다.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내일로, 다시 또 내일로,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 p. 278


각 챕터는 각기 다른 등장인물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데 그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듯한 노래 제목이 그대로 챕터 제목이 됩니다. 제목에 쓰인 노래와 그 밖의 노래들에 대해서도 어떤 노래인지 적혀져있었기에 작품에 쓰인 노래를 재생시켜 들으며 읽는 것도 괜찮은 독서방법일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모든 에피소드에서는 기쁨의 노래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과거 공연을 회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저도 고등학교때 모두가 참여해야했던 합창대회에 나가 성악곡을 합창한 기억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끝나지 않은 노래를 읽는 내내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줄 것 같아 미야시타 나츠의 전 작품이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곳에서 이 작품으로 노래는 이어졌고, 다시 또 내일로 노래가 이어진다고 했으니 후속작이 또다시 나올 수도 있겠네요. 그 전까지 서둘러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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