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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불
다카하시 히로키 지음, 손정임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평점 :
○ 그 아이의 이마에는 꿰맨 자국으로 보이는 하얀 흉터가 머리 밑을 향해 비스듬히 뻗어 있었다. - p. 23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다카하시 히로키의 배웅불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배웅불이란 강에 불을 띄워보내는 풍습인데요. 책의 화자인 도시에서 살고 있던 아유무가 전학가게 된 마을에서 6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일종의 관습이더라구요. 이런 낯선 문화와 낯선 이름, 풍경들로 인해 한 발 뺀 것처럼 이 책을 관조적인 시점으로 읽어내리게 되다가 어느 순간 확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현실감이 진저리가 쳐지던, 그 갭에 섬뜩해지는 묘한 감상을 받게 된 이야기였어요.
○ 황혼녘에 논두렁길을 걷고 있으면, 가끔씩 구로모리 산이 있는 방향에서 색깔이 묻은 듯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뺨이며 목덜미며 반팔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이 그 저녁 바람의 색깔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맨살이 간질간질한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묘한 기분이 든다. 꼭두서니빛의 산골, 논두렁의 여름 벌레와 개구리 소리, 흙과 진흙 냄새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어쩌면 자신이 외지 사람이라서, 바람이 품고 있는 무엇인가에 민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바람이 색채를 띠는 걸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 바람에다가 '참새빛 바람'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그러자 바람이 약간 친근하게 느껴졌다. - pp. 102
우리는 무슨 일에 있어 방관자가 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학창시절 따돌림이 되었든, 연예인에 관한 가십이 되었든 어떤 사실의 결정권이 되었든, 작거나 크거나,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와는 관계 없이 누구나 살면서 그런 경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거예요. 그런 방관들 중에서도 다카하시 히로키의 배웅불에서는 외부인인 아유무가 좋든 싫든 한 학년에 같은 성별 친구가 6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무리에 섞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왕따문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요. 그 곳의 풍경과 시간들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어 그 괴리감이 더욱 잔혹하게 느껴지더군요.
○ 그 후로 조각배는 배가 되고 등롱은 돛이 됐지. 불길한 말을 태워서, 마을 밖으로 흘려 보내는 거란다. - p. 117
다카하시 히로키의 배웅불에 나오는 화자, 아유무는 아버지의 일 덕분에 잦은 이사를 다닙니다. 그만큼 여러 곳에서 섞여야 하는 일이 많았고,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능숙해요. 이번에 전학간 곳은 학생이 적어 폐교 후 다른 학교와 합쳐질 운명을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중학교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서 녹아들기 위해서는 적은 인원과 친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도시의 학교였다면 꺼림칙하면 피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적은 인원 뿐인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선택지가 있는 곳과 다르게 좀 더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겠죠. 아유무는 능숙하게 다섯 아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로 그들 무리에 섞여들어가게 됩니다.
○ 그들은 살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살인하고 말지도 모른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 p. 149
처음 저질러보는 범죄도, 점점 심해지는 폭력도 누구나 이런 경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라며 점점 합리화하고 그들의 룰에 익숙해져가는 아유무. 가해자인 아키라가 피해자인 미노루에게 저지르는 언제나 패자가 되게 만드는 게임의 부정행위를, 그 게임의 벌칙이라며 점점 심해지는 폭력의 정도를, 그 모든 것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음에도 외면하는 아유무에게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며 어느 정도 동조하는 심정이 드는 것이 그 상황에 처해 있는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해 착잡해지고 참담한 마음이 들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말부에 배웅불 풍습을 보러가자며 아키라가 불러내 도착한 장소에서 또 다른 폭력의 역학관계를 마주하고, 미노루가 외치는 '나는 처음부터 네가 제일 열 받았었어!'라는 그 선명한 적의가 나를 향하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만들던 다카하시 히로키의 배웅불. 전반적인 묘사가 아름답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작품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