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정원
닷 허치슨 지음, 김옥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터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편광 유리에 대서 여자애 등에 어린 문양과 번들거리는 사진을 번갈아 살핀다. 저 여자애만 이런 문양이라는 사실 말고 특이한 건 없다. 색상도 문양도 하나같이 달라도 기본적인 건 모두 똑같다. - p. 13


한 사유지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인 이 곳에서는 세 명의 남자와 13명의 소녀들이 발견된다. 실종된 아이들도 발견되고, 그 중 유명인의 아이가 특정되어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 남자들은 다쳐 입을 열 수 없고, 여자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모두가 그 중 한 명의 소녀 '마야'와의 대화만을 원한다. 열여섯 살부터 스무 살이 안 된 소녀들과 등이 드러나는 드레스, 그리고 그 등에 그려진 커다란 날개 문신들. 딱 봐도 사건임이 분명한 이 일에 FBI가 마야와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도입부가 흥미로웠던 닷 허치슨의 소설 나비정원.


"그 사람이 정원사예요." - p. 20


마야의 담담하지만 생생한 묘사 덕에 실제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라 읽는 내내 소름끼쳤는데, 역시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원사와 나비들. 닷 허치슨의 나비정원에서 정원사는 25명이라는 제한된 숫자를 정해두고 자신만의 나비를 찾는다. 자신이 원하는 나비를 찾으면 유리정원으로 납치하고, 등에 문신을 새겨 화려한 나비로 만들고, 유린한다. 문신에 이상이 생기거나 수집품으로써 가치가 사라지면 정원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상 없이 특정 나이를 지나는 시점에 박제되어 복도 진열장에 보존된다. 그렇게 잔혹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면서도 정원사는 나비들이 정원사를 사랑하길 원하고, 사랑을 준다고 생각하고,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여긴다. 이런 진술을 들으며 FBI는 마야가 온전한 피해자인지, 혹은 어느 정도 사건에 개입된 가해자인지를 가늠한다.


아저씨는 내가 집을 잃은 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쓰레기처럼 도로변에 버려졌더나 자동차에 치여서 죽는. 하지만 나 같은 아이들은? 우리 같은 아이들은 집을 잃지 않아요. 집을 절대로 잃지 않는 족속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일 거예요.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늘 정확히 알아요. 어디에 가면 안 되는지도. - p. 144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동시 진행되는 인터뷰라 아직 나비들에 대한 정보는 완전하지 않아, 마야의 나이도 정체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갇혀있다가 세상으로 나온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불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다는 점, 모든 소녀들이 마야와 대화하기만을 원한다는 점, FBI와 마주하고 있음에도 편안한 상태라는 점이 마야를 의심하게 만들어 빅터와 에디슨은 마야의 방식으로 진술되는 인터뷰를 들으며 사건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정원사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었어요. 그 내용만 파악하면 되는 거였어요. - p. 155


사건은 끔찍하지만 처음부터 진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 충격이 강-강-강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진술이 이어지며 점점 명확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그라데이션 같이 충격이 번져오던 소설. 관련 트라우마가 없음에도 읽다가 덮었다가, 읽다가 덮기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트리거가 있다면 무조건 피해야겠지만 이렇게 섬뜩하고 환상같은 스릴러가 취향이라면 반대로 무조건 읽어야할 것 같은 닷 허치슨의 나비 정원. 유리 정원이라는 동떨어진 공간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방관자적인 시선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현실에 벌어지고 있음직한 묘사 덕에 몰입감이 대단했다.


다 끝난 것 같은 때조차, 정원사는 그대로 머물며 날개에다 입김을 불더니, 한 바퀴 다 돈 다음에 기도하듯 다정하게 키스하며 또 돌다, 전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나는 정원사가 우리를 잡아다 만든 나비는 정말 지랄맞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나비는 훨훨 멀리 날아갈 수 있잖아요. 정원사 나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뿐, 조금도 날아갈 수 없는데요. - p. 206


처음 유리 정원에서 눈을 뜬 마야가 왜 그 때부터 침착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탈출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폐쇄된 정원 안에서 어떻게 탈출을 할 수 있었는지, 정원사의 두 아들은 또 어떻게 관계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보면 사건 뿐 아니라 사건을 풀어주는 마야의 삶을 따라가게 되는데 기괴한 곳에서도, 그리고 유리 정원에 갇히기 전에도 소녀들에게는 삶이 존재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된다. 사건은 언젠가 종결이 되겠지만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 고통을 이겨내고 평온함이 가득하기를. 단 한번도, 절대로 울 수 없는 아이였던 마야도 행복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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