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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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유골. 

현 남편, 히데오가 아니다. 

전 남편, 다다토키를 말한다. - p. 11


아내는 남편을 증오하지만 남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알뜰하게 보살피며 겉으로는 평범한 아내의 겉을 뒤집어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사랑하는 척을 하는 이유는 뭘까?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 작열의 극 초반부부터 가와사키 사키코의 속은 열감으로 들끓고있다. 아기 때 이미 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마저 뺑소니로 시신으로 돌아오자 가와사키 사키코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분명한 뺑소니였지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용의자를 추정하자니 흉흉해지는 마을 분위기에 큰아버지조차 사건을 덮어버리자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고 홀로 수사를 계속 주장하던 사키코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스피드가 빨라지면서 높아지는 소리와 박자를 맞추듯이 내 몸에 여전히 남은 진동의 여운이 아픔을 가해 숨이 막혔다. 어둠 속에 녹아가는 후미등을 배웅하면서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 70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 작열에서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더한 지원 없이 바로 자립한 사키코는 독립의 해방감에 젖어 또래 학생들과는 다른 겉모습을 꾸미고, 그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런 사키코는 금발에 피어싱까지 했지만 어딘지 그런 불량스러운 모습이 어설퍼보이는 다다토키를 만나게 되고, 둘은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가 발견한 공통점에 동질감을 느껴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귀고, 결혼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런 다다토키마저 시체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증오하는 상대를 곁에 두고 충동을 억누르며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다. 결코 저물 리 없는 증오라는 태양에 온몸이 타들어 갔고 절망의 사막에 맨발이 달구어졌으며 분노의 화염이 몸속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열하는 지옥 속에서 악착같이 나가갔다. 언젠가 이 업보가 집어삼키겠지. 히데오를. 그리고 나를. - p. 149 


세상에 단 둘 뿐이지만 기댈 곳이 있어 얻은 행복은 그만큼이나 쉽게 사라져버린다. 심지어 남편이 투자사기에 연루되었으며 사기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추정된다는 증거들을 보게 된 홀로 남은 사키코는 망가지지만, 이 죽음에서 사고나 자살이 아닌 살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폐인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용의자가 붙잡히게 된 상황. 거기서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얻었다면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겠지만.. 여론이 이상하게 움직여, 피해자인 남편의 과거가 파헤쳐져 비난을 당하고, 집안에 몰려온 기자들에 의해 자신마저 악의 섞인 글로 고통을 받는 것은 물론,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용의자가 풀려나자 사키코는 삶에 미련을 버린다. 이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열은 이런 배경을 가진 사키코가 기회를 접하고, 전 남편 다다토키의 용의자 현 남편과 결혼하면서 시작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 죽었는데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계속 밝혀지고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과거에 아버지 사건처럼 더 이상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 그런데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누구라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조심해야겠네. 완벽하게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상치도 못할 때 뜻밖의 장소에서 파편이 튀어나와 다치기도 하는 거 보니 말이야. - p. 230


남편의 복수를 위해 강행한 살인범과의 결혼이었지만 현 남편 히데오와 서서히 같이 있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지고, 남편의 여동생이자 중병을 앓고 있는 아키코에게 진심으로 돌봐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더라도.. 거의 마지막까지도 긴가 민가 아리까리하다가 결말부에 밝혀지는 진실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훅 꺾여버려서 사키코와 히데오가 모두 안타깝게 느껴졌다. 한 여름, 초반부터 결말부까지 몸을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나조차 타오르는 것 같던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열. 오직 복수만을 위해 달려가던 사키코의 점차 달라지던 심리가 와닿던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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