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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냐도르의 전설 ㅣ 에냐도르 시리즈 1
미라 발렌틴 지음, 한윤진 옮김 / 글루온 / 2020년 4월
평점 :
순간 뿔이 난 하얀 머리를 들어 올린 염소도 카이를 응시하며 입가에 묻은 소금을 훑어 냈다. '그놈 참!' 카이는 이 동물의 얼굴 어딘가에 숨겨진 짓궂은 표정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 96
학창시절에는 판타지며 무협이며 가상 속 강인한 인물들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는데요. 정말 오랜만에 판타지 장르를 접하게 되었네요. 독일 판타지 소설 미라 발렌틴의 에냐도르의 전설은 네 종족이 등장하는 모험담입니다. 동부와 북부, 서부의 왕자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에냐도르라는 대륙을 지배할 생각에 슈튜름 산맥에 기거하는 대마법사를 찾습니다. 그리고 동부의 왕자는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던 불굴의 의지를 내어주고 화염을 다루는 드래곤이, 북부의 왕자는 아름다운 미모를 내어주고 드래곤의 화염에 맞설 수 있는 피부와 타종족을 굴복시킬 수 있는 눈빛을 가진 데몬이, 서부의 왕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내어주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자신의 종족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강철로 데몬을 가를 수 있는 검을 만드는 엘프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중 오직 남부의 왕자만이 그들에게 준 마법을 거두기만을 원합니다. 그런 왕자가 가소로웠던 대마법사는 자신을 다시 찾아오라며 마력의 일부만을 넘겨주는거죠.
그건 낙인을 찍기 전까지는 이자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호리엘, 자네가 그를 파수꾼으로 만든 거다. - p. 337
이런 에냐도르의 전설을 배경으로 한 에냐도르 대륙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무 힘도 없는 남부의 인간들은 엘프의 밑에서 노예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 중 전쟁을 위한 노예군이 선발되는데요. 여기에 중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 거죠. 인간들은 노예군으로 뽑히지 않기 위해 그들 중에서도 나름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어냅니다. 당연히 지켜줄 사람이 없는 고아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요. 여자들은 유곽에 팔려가거나 하녀가 되고, 남자들은 지키고싶은 아들을 대신해 선발될 수 있도록 각 가정에 팔려가게 됩니다. 선발할 시기가 되면 지키고 싶은 아들은 필사적으로 허약해보이게 만들고, 대신 입양된 고아 아들이 선발될 수 있도록 잘 먹이는거죠. 참 잔혹한 시대배경이 아닐 수 없네요.
파수꾼은 각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다스리리니. 데몬, 드래곤, 인간, 엘프가 진실이라는 하나의 핏줄로 이어지리다. - p. 383
그렇게 선발된 고아 아들인 트리스탄과 없애야 할 마법사로 몰려 같이 끌려가게 된 딸 아그네스. 그리고 그들을 자신 대신 끌려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구하러 가기로 마음 먹은 진짜 아들이자 마법사인 카이까지. 미라 발렌틴의 에냐도르의 전설에서 이 세 가족은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구출하기 위해 각자의 모험을 이어가게 됩니다. 희망이 가득한 밝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맹렬히 싸우는 드래곤과 데몬, 엘프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투에 가까운 모험이죠. 그 사이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도, 복종하지 않은 데 대한 고문도, 살기 위해 하는 고발도, 실로 여러가지 비참한 삶이 얽혀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약간의 유머를 느낄 수 있게 카이와 함께하는 하얀악마라는 별명을 지니고 그바일로라는 이름을 가진 염소가 소소한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
우린 다시 만날 거라고 내가 약속하지 않았던가, 카이? - p. 5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잔혹한 환경 속에서도 역시나 기회는 존재합니다. 각 종족의 파수꾼에 대한 고대의 예언이 점차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거죠. 치열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은 점점 예언과 가까워지고 마지막 기회를 위해 협력하게 됩니다. 모든 종족을 위한 평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이 에냐도르의 전설은 네 왕자의 전설 속 선택으로 인한 각자의 종족이 현재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 속 중심인물들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 서로 어떻게 뭉치게 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예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숙명을 찾아 움직일 다음 이야기인 에냐도르의 파수꾼도 어서 만나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