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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멀리서 이 마을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p. 5
편의점 인간이라는 작품으로 눈여겨 보고 있는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중에라도 나누어져
있는 그룹과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은연 중에 가늠 해본 경험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성에게 갖는 관심과 첫사랑. 초등학교 때는 다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가 반이 갈리거나 중학교 때 노는 무리가 달라지고, 그 관계가 달라지게 되는 경험. 중학생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와 재개발되고 있는
마을이라는 세계와 동일시해 점점 진척되는 모습을 성장하는 모습과 함께 절묘하게 표현해냅니다. 정말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그린
이야기였어요.
나는 '싫어'라는 말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내가 점점 선명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 p. 21
무라타 사야카의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에서 이야기는 다니지와 유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직 이성에 눈뜨지 않고
인형놀이같은 순수한 놀이를 즐기는 이 시기에는 약간의 눈치게임이 있을지언정 평화롭습니다. 노부코와 와카바라는 친구와 함께 그룹을 지어 다니는
유카는 모두에게 인기 많고 반짝거리는 와카바를 동경하고 노부코를 지루해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지냅니다. 우정팔찌도 함께 하고 서로의 집에
놀러다니기도 하던 이들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각자 다른 그룹에 속하게 되죠. 총 다섯 그룹에서 와카바는 상위 그룹에, 유카는 밑에서 두 번째
그룹에, 노부코는 최하위 그룹에 속한 채 서로와 데면데면하게 지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카는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노부코를 보면서 아직
저기까지는 아니라는 안도를, 가장 최상위 포지션에 속해있는 이에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맞추려는 와카바를 보며 초등학교때 보다 빛이 바랜 것 같다며
속으로 깎아내립니다.
"우리, 꼭 뼈 속에서 사는 것 같아."
팔꿈치와 무릎이 또다시 욱신거렸다. 우리의 팔다리 속에서 자라나는 뼈. 마치 그 뼈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하얀 세상은 조금씩 넓어져
완성에 가까워진다. - p. 40
자존감은 낮지만 자존심이 강한 전형적인 유카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자신의 위치에서 필사적으로 반의 분위기에 동화됩니다. 평범하고
수수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요. 급이 높은 이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길 바라며 한 두마디 던지는 말에도 고심해서 응대하고, 그런 자신을
속으로 조소하며 상처받은 내면을 주변을 관찰하며 비웃는 방식으로나마 치유하려 하죠. 그런 유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부키가 있습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같이 서예교실에 다니는 남자아이. 팔다리도 가늘고 남자애 같지 않아 유카의 말에 휘둘려 때로 지배를 당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중학생이 된 이부키는 급이 높은 그룹이 되죠. 급이 맞지 않은 사람들이 아는 사이면 일방적으로 낮은 그룹에 속한 사람이 조롱거리가 되는 환경이라
아는척 하지 말라고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유카는 정열을 담아 이부키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서서히 서로의 체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이제야 하얀 마을 밖으로 흘러나가는 나를 느꼈다. -
p. 368
그렇게 티를 내지 않지만 주위의 모든 것에 적의를 표하고, 새하얀
마을에 대입해 마을을 일관성있게 싫어하지만 사건은 터집니다. 재개발로 인해 그저 하얀 마을이,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불타기도 하고,
중단되었다가도 조금씩 넓어져 완성형에 가까워지며 갖가지 색을 인지하게 될 때까지. 유카가 이 교실 안의 권력체계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이야기에 매료되네요. 점점 투명해져 교실 안의 세계에 녹아들던 유카와 달리 정면으로 맞서 감정을 불태우던 불꽃같은 노부코를 보게 됨으로써
부자연스럽고 산산조각나고 있던 첫사랑이라는 괴물이 아름다워지는 과정이 참 좋았던 무라타 사야카의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