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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환야 1~2 - 전2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0년 3월
평점 :
"환한 낮의 길을 걸으려고 해서는 안 돼." 미후유가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는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설사 주위가 낮처럼 밝다해도 그건 진짜 낮이 아니야. 그런 건 이제 단념해야 해."- 1권 p. 334
요즘은 계속 실내에서만 주로 지내다보니 최근 많은 안방에서 시청 가능한 공연 상영회 관람과 독서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접근성도 좋고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책에 관심을 집중적으로 갖게 되네요. 그 중에서도 정말 간만에 다시 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환야. 워낙 오래전에 읽었다보니 머릿속에서 백야행의 내용과 섞여서 단편적인 이미지만 드문드문 떠올라 처음 보는 이야기인지 긴가민가 했는데 보는 내내 머릿속에 영화가 재생되는 듯 그 조각난 이미지들이 맞춰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꽤 두꺼운 두 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이지만 펼치는 순간 세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죠. 환야를 읽은 덕분인지 백야행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네요.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린 대표적인 악녀가 등장하며 결말이 찝찝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또 백야행의 유키호와 환야의 미후유가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어 같이 회자되는 작품이죠.
모든 게 우리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야. 미후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목소리에 그는 새삼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제발 그러지 마. - 2권 p. 126
이 이야기에는 미후유라는 여성과 마사야라는 남성이 등장합니다. 굳이 둘을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한 이유는 두 사이에 남녀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죠. 미후유와 마사야는 1995년 고베 대지진에서 처음 만납니다. 지진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둘은 보여지면 안 될 것을 보여주고, 또 보게 되죠.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둘은 끈끈하게 얽히게 되는데요. 얼핏 보면 서로 상관 없어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또 서로의 난처한 상황을 돕는 파트너가 됩니다. 파트너라는 말은 너무 사무적일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마사야에게 미후유는 일종의 종교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헌신적으로 바치고, 믿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향수 냄새를 맡으며 마사야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후유를 지킨다. 설사 그녀와의 밤이 환상일지라도. - 2권 p. 222
미후유는 점차 사회적 위치가 상승하고 그만큼 과거가 노출될 위험이 커집니다. 그런 미후유를 위해 마사야는 '무엇이든' 하죠. 미후유도 마사야에게 어느 정도는 의지하고, 때로는 수단 가리지 않고 어느 위치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을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며 다독이기도 하구요. 마사야는 이런 관계에 때로는 혼란을 가지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미후유를 위해 행동합니다. 둘의 행복을 위한다는 미후유의 말과 다르게 마사야는 점차 정신도 피폐해져가고 미후유만이 성공가도를 달리는데도 맹목적으로 미후유를 위하죠. 이 부분에 설득력이 없으면 오히려 굉장히 실망스러운 작품이 됐을 텐데 흐름이 참 자연스러워서 이 관계에 설득당하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환야.
마사야가 말했다. "나와 그녀만의 세계에 들어오지 마."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 p. 441
결국 이야기에서 미후유의 과거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데요. 이 점이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여지를 만들죠. 사실 과거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그저 성공만을 위해 생긴 괴물이 아닐까 하는 부분부터 어두운 과거로 인해 이런 악녀가 되었다면 그 이면에 어떤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는지. 정말로 백야행의 유키호와 동일인물인지. 그렇다면 백야행과 환야 사이에는 어떤 에피소드가 숨어있었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지. 이런 다양한 상상의 여지 뿐 아니라 환상 같은 밤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붙여졌는지 서서히 알게 되는 즐거움까지 여러 재미를 가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환야.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