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단 한 번도 캠핑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그 계획의 이면에는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즈음에 나는 구석에 숨어서 냉정한 눈으로 우리 가족의 일상을 관찰했다.
부모님의 고질적인 습관, 아버지의 악의 없는 분노 그리고 아버지의 화를 다스리는 어머니의 능력을 보았고, 두 분은 본인들이 거만함과 속임수에 의지하고 있다는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감정적이고 권위적이며 인내심이 부족했고, 어머니는 강하면서 차분하고 보수적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제 역할을 할 것이라 믿고 항상 자신의 몫을 다하는 믿음직스러운 태도를 가졌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다툼은 진짜가 아닌, 매번 결과가 뻔한 연기였다. 그 우리 속에 나도 결국 갇혀버렸고, 재빨리 그곳에서 도망쳐야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결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밖으로 단 한마디도 꺼내본 적이 없었고 무언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말을 하도록 하려고 지금 이 망할 텐트가 툭하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에 아버지는 부엌에 텐트 부속품을 펼쳐놓았고 무게가 분산되도록 나누었다. 막대와 쐐기못만 해도 1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무게였다. 거기에 침낭, 윈드브레이커, 스웨터에 음식까지 있어 배낭은 순식간에 꽉 차버렸다. - P-1
아버지는 예순둘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그때 나는 서른한 살이었다. 장례식 때에야 비로소 내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 나이를 알게 되었다. 내 나이 서른한 살은 그의 서른한 살과 닮은구석이 거의 없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공장에 취직하지도 않았으며 아들도 없었다. 반은 어른이고 반은 아이인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원룸에서 혼자 살았고, 이것은 감당하기 힘겨운 사치였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돈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싶었지만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나 또한 이주민이었다. 청년기의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곳과 작별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부모님의 생각을 물려받았다. - P-1
하자 30년을 일한 아버지는 퇴직을 생각하는 대신 두 배는 더열심히 일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이 공장 저 공장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하며 다녔다. 그는 지쳐서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후에는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수면은 길지 않았고 밤중에 일어나서 일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인데 어머니 생각에는 그게 공장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늘 불안해 했어. 그런데 지금은 병이 되어가고 있단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불안해 했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 때문에 초조해 했으며 감기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고 나 때문에도 불안해 했다. 그는 내가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러면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한이 있더라도 나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몇 시간만 기다리라고 아버지를 설득했고, 안심시키려 애썼으며 흥분을 가라앉혀 잠자리에 들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몸이 자체적으로 그런 신호를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숨통을 조이며 사는 법밖에 몰랐다. 그에게 차분함을 요구하는 것은 산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어느 누구와도 경쟁하지 말고 조금 천천히 가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편지로 알게 된 아버지의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고 일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다른 사람은 나의 호기심 - P-1
을 자극했다. 내가 얼핏 본 그 안의 여린 마음,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숨기려 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절벽밖으로 몸을 내밀면 아버지는 내 허리춤을 본능적으로 부여잡았다. 내가 빙하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는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했다. 어쩌면 항상 그곳에 이렇게 다른 아버지가 있었을 텐데, 첫 번째 아버지의 모습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다.
나는 나중에 아버지와 또 다른 시도를 해야한다는, 또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미래는 품고 있던 가능성과 함께 돌연 사라져버렸다.
2004년 3월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고속도로에서 아버지에게 심근경색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려고 나에게 전화했다. 아버지는 도로변의 정차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사고를 유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대처했다. 그는 비상등을 켜고 브레이크를 밟아 마치 타이어 하나에 구멍이 났거나 연료가 떨어져서 그런 것처럼 차를 세웠다. 하지만 심장은 그를 저버렸다. 자동차 연료 계기판에 표시된 주행 가능 거리는 최대였고 정비가 많이 필요했던 자동차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가슴에 엄청난 통증을 느낀 게 틀림없었고 제때에 그 위험을 감지한 것같았다. 정차 구역에서 그는 시동을 껐다. 안전벨트는 풀지 않았다. 아버지는 레이스를 포기한 드라이버처럼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 핸들에 얹은 두 손과 그를 추월하는 모든 차량들, 아버 - P-1
을 따서 접시에 덜지도 않고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퍼먹었다. 그러고는 탁자 아래 놓인 매트리스에 누워 침낭에 몸을 쏙 넣고 바로 다시 곯아떨어졌다.
6월 말쯤 어머니가 친구 한 명과 함께 오셨다. 어머니가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미망인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돌아가며 여름내 곁에 있어주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누군가 옆에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그녀 친구들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신뢰가 보였다. 그녀들은 내 앞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눈짓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말보다 더 값진 친밀함으로 오래된 집을 공유하는 것을 보았다. 쓸쓸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나는 아버지와 세상과의 끝없는 갈등이었던 그의 고독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차 안에서 그를 그리워해줄 친구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반면에 어머니에게는 관계를 유지하고 발코니의 꽃들처럼 그 관계에 관심을 쏟으며 보낸 오랜 세월의 결실이 보였다.
이와 같은 재능은 배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타고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내가 배우기에 아직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제 내게는 산에서 내려오면 나를 신경 써주는 두 명의 여자와 한상가득 차린 식탁, 깨끗한 이불이 있었다. 콩 통조림이나 침낭과는 작별했다. 저녁 식사 후에 나는 어머니와 부엌에 - P-1
아버지의 서명은 모든 노트에 다 있었다. 그는 대개 할 말만딱 했지만 항상 허풍이 있었다. 이것도 해냈다. 조반니 과스티, 세마디 말을 보았을 뿐인데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유독 컨디션이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이벡스, 독수리, 신선한 눈, 제2의 청춘, 이런 글을 남길 정도로 뭔가에 감동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다른 글은 이랬다. 정상까지 자욱한 안개. 옛 노래들. 참으로 아름다운 내부 풍경. 다 내가 알고 있는 노래들이었다. 안개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 노래들을 불렀으면좋았을 것이다. 1년 전에 남긴 또 다른 메모에서 우울한 흔적이 보였다.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옴. 모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보지 않고, 더 이상 계곡에 내려갈 필요도 없이.
모두라면 누구를 말하는거지? 나는 궁금했다. 그날 나는 어디에 있었지? 아버지는 심장이 약해진 것을 이미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을 남기기까지 또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계곡에 내려갈 필요도 없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아갈 한적하고 외딴 높은 곳에 집 한 채를 꿈꾸게 했던 것과 같 - P-1
원래 있던 자리에 노트를 돌려놓기 전에 나는수첩에 날짜와 그 문장을 똑같이 베끼 적었다. 아무것도 덧붙여 쓰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브루노는 실제로 아버지의 꿈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휴식기에 있었다. 비록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떤 시기에 마침표를 찍고 또다른 시기가 오기 전의 휴식기였다. 바르마에서 우리 아래를 빙빙 날아다니는 매들과 동굴 입구를 지키는 마멋다람쥐과의 포유류들이 보였다. 아래 호수에는 가끔 낚시꾼 한둘과 몇몇 등산객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찾으려 올려다보지 않았고 우리도 인사를 나누러 내려가지 않았다. 우리는 8월의 오후에 수영을 하고 싶어 그들이 모두 가버리기를 기다렸다. 호수물은 얼음장처럼 찼고 우리는 더 참지 못하고 초원으로 뛰쳐나가기 전까지 누가 더 오랫동안 물속에서 버티는지 경쟁했다. 우리도 낚싯대를 가지고 있었다. 메뚜기를 미끼로 이용해서 막대와 줄 하나만으로 이따금씩 뭔가 잡아 올리곤 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로 불에 구운 송어와 레드 와인이 차려졌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불가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이제는 나도 산 위에서 잠을 잤다. 건축 중인 집의 창문 바로 아래에서 야영했다. 처음에는 침낭 속에 누워 별을 바라보고 - P-1
마지막 날에는 그라나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그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보던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다른 부츠는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힘겹게 산을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어머니의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올라갔다. 나는 뒤에서 어머니가 어떻게 걷는지 보았다. 그녀는 두 시간이 넘도록 천천히 끈덕지게 일정한속도를 유지했다. 어머니가 중심을 잃거나 미끄러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와 브루노가 지은 집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다. 쾌청한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개울에는 어느덧 물이 별로 없었고 방목장의 풀은 말라버렸으며 8월의 따뜻했던 그 공기가 아니었다. 브루노가 난로를 켜두었고, 창가에서 차 한잔하며 집안에 있기 딱 좋았다. 어머니는 창을 좋아해서 창가에서 몇 시간 내내 밖을 내다보았고 그러는 동안 나와 브루노는 산 아래로 가지고 갈 것을 챙겼다. 잠시 후에 그녀가 호수, 자갈밭, 그레논 봉우리, 집의 외관과 같이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으려 평원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전날 내가 정과 끝을 이용해 암벽에 새겨놓은 글귀를 오랫동안 유심히 보았다. 검은색 - P-1
페인트로 덧칠을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조반니 과스티 1942-2004 가장 아름다운 대피소를 기념하며
어머니는 우리에게 노래 한 곡을 부르라고 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노래로, 다음 생에서도 등산을 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브루노는 물론 나도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올바르고, 제대로된 듯했다. 얼마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남아 있었다. 어머니도 들을 수 있게, 기억해줄 증인이 있는 그 자리에서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브루노에게 그 집이 내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의 집이면서 그의 집. 두사람 모두의 집. 우리 둘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도 그러기를 바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 둘이 함께 지은 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이제부터 그도 그의 집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진심이야?"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응." "그래 좋아." 그가 말했다. "고마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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