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와 상관없이 그날의 함성, 숨결, 바람은 생생하게 내기억과 몸에 남아 있었다.
"학교 대표까지 했어? 대단하다! 나는 인라인스케이트랑 스키밖에 안 타 봤는데."
나는 또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에 감명받아 환경 동아리를 만들고 국회의사당 앞에 가서 시위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김나지움에서는 연극 동아리 활동했던 것도 신나서 얘기하다 나혼자만 떠드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내 이야기만 했네. 오빠는 고등학교 다닐 땐 어땠어?"
"음..... 난 공부밖에 한 게 없어서 해 줄 말이 없네. 이런저런활동도 다 생기부 때문에 한 거라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그냥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인생이 다 풀릴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마리오네트 같았던 거지. 마리오네트도 실은 저렇게 생김새가 다 다른데………."
오빠는 한숨을 쉬며 벽에 걸린 마리오네트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봄이만 떠나면 교실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까? 
우리 반 아이들이 봄이에게 보인 적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아이에 대한 부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혹시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불안함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봄이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옥죄는 숨통을 터 주었으리라. 봄이의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게 된 아이들의 상실감은 봄이의 상처 못지않게 검고 깊은 아가리를 벌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다. 더 많이 깨닫는 아이일수록 검고 깊은 아가리가 더 큰 공포로 다가오겠지. 그걸 지켜볼 일도 두려웠다. 아이들보다 20년이나 세상을 더 살았는데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몸인 양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은지의 번호였다. 영준, 소연, 약혼, 배신, 파혼, 그들의 결혼……. 은지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 순서대로 떠올랐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갉아먹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멀게 느껴졌다.

나는 원주토지문화관에 머무는 동안 그 이야기를 장편으로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다시 쓰는 동안 봄이를 괴롭히는 무리로 상정했던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에게 봄이와 같은 비중의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면서 나는 비로소 이야기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생각도 관계도 쿨(cool)한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요즘, ‘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찌 보면 진부하고 칙칙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이 어떤 사실 속에 감추어진 핵(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찾지 않거나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리는 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개인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축적되어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졌을 때 희생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봄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써 가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져 갔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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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사람이 아이패드를 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이패드의 화면을 볼 수 있도록 360도로계속 돌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지금 다 안 들려요.

아이패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 다 안 들려요. 그 말이 옳았다. 신촌 번화가의 입구에서 세브란스병원까지는 차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끼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병원앞의 장사진을 보고, 이 불가해한 상황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도로는 정차한 차들로 완전히 막혔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뭔가 크게 외쳤다 - 아니 외치는 것처럼보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최소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못한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갑작스레 허탈해져서 웃었다. 익숙한 웃음이 들리지 않으니 더 기운이 빠졌다. 끔찍한 더위가 다시금 실감났다. 더위와 공포 때문에 땀을 너무 흘렸다. 공기 중의 습기 때문에 전혀 마르지 않아서, 찜통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진부한 비유가 맞아떨어졌다. 소리고 자시고 일단땀이 좀 말랐으면 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라면 병원인들 뭘 해 줄 수 있겠나.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아주 많은 연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룹 채팅방에서 "너희도 안 들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차였다. 

하늘에서 정적 구역의 한계 높이를 알아낸 사람들은 땅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몇 단체가 연합해난지도 근처에서 굴착기로 땅을 파고 또 팠다. 지하 1,000m부터 콰콰콰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정적 구역의 경계 지점이 지상 1,000m, 지하1,000m라고 하니 이공계열 종사자 등 숫자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묘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적 구역 밖의 사람들 중에서도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이상 현상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 TV로이런저런 생방송을 보던 사람들이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이 희한한 정적을 만든 사람이 의도한 것인지, 마포구에는 꽤 많은 방송사가 있었다. 아나운서들은 뉴스를 전달하다가 갑자기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깜짝 놀랐다. 대부분은 뉴스룸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프로 정신을 발휘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도 있었다. 일종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목소리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약간 어색해진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갑자기 정적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영상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돌면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웃음거리로만 볼 일은 아니었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영상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정적 구역 내에서도 소리가 나긴 하지만, 단지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적 현상이 일어난 이후에 녹음된 소리들이 전파를 타고 디지털 매체에 저장된 것 아닌가. 

새로이 당을 충전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마카롱과 홍차가 그리웠다.
나는 골목길들을 쏘다니며 영업 중인 카페를 찾아다녔다. 평소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 한 카페를 발견했다. 손님이 몇 명 구석진 데에 앉아 있었고,
젊은 여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마카롱도 있었다. 가격은 꽤 저렴했다. 나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카운터 앞에 선 그는 나를 보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폰에,
「블루베리 마카롱, 바닐라 마카롱이랑 차가운 홍차 주세요.」라고 써서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을 달라는 뜻 같았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휴대폰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뭔가 타이핑한 뒤에 휴대폰 액정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수화할 줄 모르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살면서 처음 받는 질문이었다.
약간 당황해서 "그래야 하나요?"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웃긴가? 뭐가 웃기지?
그는 자기 휴대폰을 꺼내 뭔가 도도도 쳐서 내게

보여 주었다. 그의 휴대폰에는,
「여기는 원래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단체가세운 비영리 수화 카페예요. 이런 일이 생기니까 비장애인 분들도 오시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뭔가 손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게 수화인 것을 알아보았다. 민망했다.
그는 구석의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 앉으라는뜻 같아서 그대로 따랐다. 조금 있으니 그가 쟁반에 마카롱 두 개와 차가운 홍차를 담아 가져왔다.
마카롱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바삭하게 부스러지는 표면, 부드럽고 다디단 크림, 홍차를 입에 곧장흘려 넣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맛, 식감까지 참 좋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씹고, 마시고, 넘기는소리가 없는 게 문제였다. 소리를 잃으면 먹는 재미조차 줄었다.
카페의 벽에는 카운터를 보는 여자의 사진이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사진 밑에 적힌 글은 수화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안내문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머리를 짧게 친 채로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수화 그거 별거 아니니신청해 봐.‘라고 표정으로 웅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정적 구역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데, 수화를 배워 볼까.

약간 어두운노란 조명이 그의 눈동자를 점점이 수놓고 있었다.
만약 소리가 들린다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이 뛰거나 말거나, 수화는굉장히 어려웠다.
나는 수화라는 게 뭐, 그냥 손가락으로 한국어 발화를 흉내 내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손의모양, 위치, 움직임, 손 외의 다른 부분까지 동원했다. 수화는 성대를 제외한 몸의 모든 부위를 이용한강렬한 표현이었다. 몸짓에 대응하는 단어도 있고,
문법도 있었다. 문법이 한국어와 크게 다르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꽤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신조어를 표현하는 방법이 그랬다. 새로 만들어진 단어는 수화 목록에 바로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튜브‘를 말하고 싶을 때 이미수화가 존재하는 ‘유‘와 ‘튜브‘를 합쳐서 표현했다.

1년 전, 스웨덴어의 문법이 영어와 비슷해 쉽다고들 하길래 공부를 시작했다. 2주일 하고 때려치웠다. 수화는 낯선 언어이긴 해도 한국말이니 스웨덴어보다 쉽겠지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문화의 장벽보다, 감각의 장벽이 훨씬 높았다. 음성 언어가 약간의 억양 차이로 다른 뉘앙스를 전하듯이, 수화는 거의 같은 몸짓을 약간 변형하는 것으로 큰 차이를 만들었다. 그 미묘함을 익히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카페에서 나올 때 카페를 운영하는 단체의 이름을 봐 두었다. 나는 잠들기 전에 그 단체에 내 이름으로 5만 원을 후원했다. 학생에게는 큰 돈이었다.
요즘 약속이 적어서 돈을 쓸 만한 데도 별로 없고 하니까. 뿌듯했다. 가끔 이름 모를 누군가들을 따라 클릭 몇 번으로 작은 후원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의 기분이 훨씬 나았다. 아주 가슴이 벅찬 상태로 잠들었다.

다음날 나는 알람보다 일찍 일어났다.
시끄러워서 깼다. 에어컨 바람이 부는 소리, 뒤척일 때 베갯잇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냉장고에서 우웅 하고 흐르는 낮은 소리, 창밖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어제 켜 두고 잤던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게임의 배경 음악, 작은 소리, 백색 소음, 큰 소리, 소음, 나는 분명히 들었다.
꿈인가 싶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켰다. 마포구, 서대문구의 적막이 오늘 아침 9시에 일제히 사라졌다는 뉴스들, 이게 다 대통령 덕이라는 댓글도 있었고, 대통령 때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댓글들도 있었다. 나는 대통령 뽑았지 제사장 뽑았냐고 조롱하는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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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택난 해결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 한 번에 많은 집을 공급할 수 있는 아파트었습니다. 파리와 서울, 두 곳에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은 주택을 공급한다‘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아파트 건설이 시작됐지만, 그 방식은 달랐습니다. 
파리에는 낮은 임대료를 내고 긴 기간 동안 빌려 살 수 있는 장기 임대 아파트가 서울에는 돈을 내고 사고파는 분양 아파트가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파리의 아파트는 처음부터 시민을 위한 주거 복지 공간인 사회주택(Social Housing)‘으로 기획됐습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꼭 필요한 기본 요소이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깔려 있었지요. 따라서 아파트의 대부분은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건설사가 아닌 공공 영역 또는 공공성을 띤 준공공 개발자가 짓게되었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필요한 자금도 사회임대주택기금 등공공 자본을 통해 조달했습니다. 공공 자본은 아주 낮은 이자로 장기간에 걸쳐 돈을 빌려줬습니다. 이런 조건을 바탕으로 파리의 아파트는 저렴한 임대주택으로 대량 공급되며 서민들의 주요 생활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에 서울의 아파트는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건설 자금은 민간 금융기관을 통해 조달되었습니다. 국민주택기금과같은 공적 기금이 있었지만, 그 운영 방식은 민간 자본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쉽게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남에게 떠넘겨 있습니다. 자동차와 배에 실어 보내거나, 저 멀리 소각장에서 대기 중에 오염 물질을 뿜어내며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배출한 쓰레기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도 옳고, 환경적으로도 좋습니다.

경기도 하남시에는 유니온파크라는 특별한 쓰레기 처리 시설이있습니다. 지하에는 쓰레기 소각장, 재활용선별장 등의 쓰레기 처리 시설과 하수처리 시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상에는 어린이 물놀이장과 잔디 광장, 풋살장 등 주민 편의 시설이 자리를 잡았고요. 소각장의 높은 굴뚝은 전망대가 됐습니다. 이곳을 오가는사람들에게 유니온파크는 쓰레기 소각장이 아닌 공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쓰레기 소각장이자 열병합발전소인 아마게르바케(Amager Bakke)는 매년 40만 톤의 쓰레기를 태우며 발생한열로 지역난방수와 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높은 굴뚝 아래에는코펜하겐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가 있고, 경사진 지붕은 사계절 내내 이용이 가능한 스키장으로 꾸며져 지역의 명물이 됐지요.

도시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전기입니다. 도시가 전기를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석유, 석탄, 가스 등 다른 에너지에 비해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전선만 설치해 놓으면 어디든 손쉽게 전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또 전기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전기난로에 연결하면 열에너지로,
선풍기에 연결하면 운동에너지로, 전등에 연결하면 빛에너지로 전환해 쓸 수 있지요. 그리고 배출가스를 생각하면 매우 깨끗한 에너지입니다. 지금 당장 전기로 작동 중인 기계의 에너지원을 석유와석탄 같은 화석연료로 바꾼다고 생각해 보세요. 연소 과정에서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오염 물질이 발생해, 도시는 엄청난 매연에 시달릴 것입니다.
이런 장점이 있다 보니, 과거 다른 에너지원이 하던 일들도 점차 전기로 대체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닥불이나 촛불이 전기난로나 전등으로 바뀐 것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고, 가스레인지는 전기레인지로, 휘발유 자동차는 전기 자동차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른가 ‘무지의 장막‘이리는 원초적 평등 상황에서 하는 결정이 올바른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전기 만드는 일에 적용해 볼까요? 나는 발전소 바로 옆에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발전소와멀리 떨어져서 전기만 받아서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 모르는, ‘무지의 장막‘에 놓인 상태에서 발전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전기를 만들 것을 선택할까요?

굳이 롤스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를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스스로 좀 더 친환경적인 전기를 만들려고 분명히 노력할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한계가 있는 생각입니다. 당장 모든 전기를 도시에서 만들 수는 없고, 일정량의 전기는 멀리서 만들어 가져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도시는 외부에 빚진 상태에서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발전소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도시는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동물보호법은 동물이 겪는 고통의 범위도 정의합니다. 동물의 본래 습성과 신체 원형을 훼손하며 키우는 경우, 동물을 굶주리게 하거나 영양 결핍 상태로 방치하는 경우가 모두 고통에 해당합니다.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이든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이든, 동물을 길들여 키우기로 한 이상 인간은 법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상해, 질병,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지요.
동물보호법은 "동물도 생명체로서 존엄성을 갖는다"는 생각에서출발합니다. 존엄성을 지닌 존재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동물을 잡아먹고, 동물의 부속물을 이용해 온 인간이 동물의 존엄성을 논하며 동물과의 관계를 되묻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서 출발해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겨 난 것이 불과 300여 년 전이니 말입니다.
보편적 권리로서의 인권은 아무 조건 없이 오직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인종, 성별, 종교, 성적지향 등과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존엄성을지니고 있으며, 그 존엄성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은 오랜 투쟁과 논의 끝에 합의된 현대 문명국가의 윤리적 기초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기본 철학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국가가 인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인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늘


도시의 홍수는 불투수 면적 증가와 큰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시가지에 내리는 빗물은 자연의 흙과 인공적인 우수시설이 감당합니다. 흙이 무슨 일을 할까 싶겠지만 정말 큰 역할을 합니다. 정원, 공원, 가로수 밑, 보도블록 틈새, 공터, 운동장에서와 같이 노출된 흙은 물을 땅속으로 들여보내거든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는 점토 형태의 흙은 자기 부피의 40%에 해당하는 물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빗물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흙이 외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투수 면적이 늘어나면서 흙이 감당하는 빗물의 양은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수 시설이 감당해야 하는 양이 불어나는 것이지요. 증가하는 도시의 불투수 면적에 맞춰 우수 시설 또한 늘어나지 않는다면 홍수 위험은 더욱 높아집니다.
불투수 면적의 증가는 홍수 이외의 또 다른 문제점도 낳습니다.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지 못하면 지하수가 고갈됩니다. 그러면 하천으로 안정적으로 유입되는 물의 양이 줄어 도시 하천의 물이 부족해지거나 말라 버립니다. 또 빗물이 흙에 스며든 뒤에 하천으로 흐를 경우에는 토양의 정화 작용으로 많은 오염 물질이 걸러지지만,
도로 같은 불투수면을 따라 흐르다가 하천으로 바로 들어가면 도

시의 오염 물질을 그대로 하천으로 옮기게 됩니다. 불투수면의 증가는 평상시에는 하천의 수량 부족하게 하고, 비가 오면 물과 오염 물질을 함께 하천으로 보내게 되어 하천 수질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하천 생물의 종 다양성과 개체 수도 감소합니다.

물을 머금는 도시, 어떻게 가능할까

오랫동안 도시의 홍수 방지는 우수관에 빗물을 모아 도시 바깥으로 빠르게 배출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중앙 집중형 빗물 관리). 하지만 불투수 면적이 증가하면서 이와 같은 방식이 점점한계에 다다르자, 이제는 비가 오는 그 지점에서 빗물을 감당하는방식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분산형 빗물 관리).
우리나라에는 불투수 면적 증가를 막기 위한 직접적인 제도가 없지만, 해외의 몇몇 도시들은 각종 규제를 통해 불투수면적의 무분별한 확대를 막고 있습니다. 미국 코네티컷주는 불투수면적 총량제를실시하여 도시의 전체 불투수면적률을 11% 이내로 유지합니다. 독일의 함부르크시는 땅 소유주에게 불투수 면적 1m²당 0.73 유로(약950원)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고요.
깔끔한 포장도로로 도심을 정비하던 시절을 지나, 도시는 이제빗물이 흘러가는 길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됐습니다. 빗물을 머금었다가 자연스럽게 내보내도록 도시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원천 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는 복개를 막고 수원천을 되살리려고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 서명운동, 청원서 제출 시장 항의 방문, 시민 대토론회, 문화재청 청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지요. 점차 수원 시민들이 도시 하천의 환경적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론이바뀌었습니다. 1991년에는 시민의 94%가 수원천 복개에 찬성했지만 1996년에는 복개 반대가 44%로 복개 찬성 33%를 앞질렀습니다. 수원 시장은 시민들의 달라진 여론을 받아들여 1996년 5월 수원천 복개 공사 철회를 발표했습니다. 이미 복개 공사가 30% 정도진행된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도시 하천 정비 사업 이래로 가장 선호되던 방식인 하천 복개가취소된 첫 사례였습니다. 이런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은 도시 하천의환경적 가치를 알아본 수원 시민들이었습니다. 수원 시민들의 행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청주 무심천, 대전 갑천, 부산 온천천등 하천을 되살리기 위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일어났지요.
수원천 복개 중지 결정은 자연형 하천 복원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탄소 발자국이 뭐냐고요? 
탄소 발자국은 인간이 길 위에남기는 발자국처럼, 인간이 지구의 대기에 남긴 온실가스의 흔적을발자국으로 상징화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생산, 유통, 사용,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대표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로 환산해 표시하지요. 
탄소 발자국이 클수록 그 식품은 먼 거리를 이동해 왔고, 그만큼 운반하기 위해 석유를 많이 썼으며, 그만큼 지구온난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구의 환경 측면에서 보면농산물의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 농산물이 내 집 앞, 우리 동네 텃밭에서 키운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요. 비록 텃밭에서 재배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전체 먹거리의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일상에서 실천이 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텃밭 농사는 의외로 효과가 큽니다. 농기계나 농약 사용이 적은 데다 텃밭의 작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해 실제로 환경에 도움을 주거든요. 경작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높은 인식이 생기는 것은 물론입니다.

고객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라‘는 정당한 요구입니다. 거창한 이념을 내세운 주장이 아니라, 실생활에 근거한개선 요구는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수긍하기 쉽습니다.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수요 조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수요가 많은 곳에서 자전거 이용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찾고, 실제 도시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후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자전거 이용자가 점점 더 늘어나면,
그 흐름이 도시 전체로 확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사는 동네는 아라뱃길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지나갑니다. 이 자전거도로는 한강과도 연결되어 있고, 끝까지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저희 동네는 아라뱃길에 맞닿아 있는 몇 안 되는 마을 중 하나입니다. 자전거족들이 오며 가며 중간에 들러서 휴식을 취하고, 고픈 배를 채우기에 딱 좋은 위치지요. 그래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법으로 강제한 적도 없지만, 동네의 추어탕 가게와 짬뽕집에는 멋진 자전거 보관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식당 안팎에는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MTB 환영"

수요가 있으면, 자연스러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시민들의 행동을바꾸고 싶다면, 당위를 역설하기보다 먼저 수요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일에 ‘당위‘를 갖고 들어가면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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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받기로 했죠."
그가 말했다.
"맘이 편해졌을 것 같은데요."
이로 씨가 말했다.
편해졌다면 그건 체념해서가 아니라 나를 내 속에서 없앴기 때문이었겠지요. 체념이기도 했겠네요. 내가 나를 체념한 거니까"
"비우는 거네요."
"그때 알았죠. 선택과 결정은 저 작품들의 몫이었던 거라는 거.
내가 아니라, 나는 작품들한테 불려 나온 거였어요. 스승님도 스승님 스승의 작품들로부터 선택당한 삶을 사셨다는 걸 돌아가신뒤에 깨달았고요."
사물의 의지가 대를 이어 인간을 숙주로 만들어버린다는 식으로 이로 씨에겐 들렸다. 이로 씨는 김재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바라보았다.
정선에서 선배 원로 작가의 작품을 말할 때도 김재원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갈등과 번민을 삶의 자양으로 삼으려는 뜻을 내비쳤었다. 스승의 전각 작품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영원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얘기였다.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게요"

사랑하는 한 여자를 지키고자 결탁하는전직 경찰과 수배자, 다정한 전쟁의 기록

남해안 동쪽 언덕에 위치한 카페 Tolo주인장 희린은 운두가 깊은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고,
산양유로 부드러운 셔벗을 만들어낸다.
벚나무 꽃망울이 움트는 이른 봄날,
소설가 이로가 Tolo에 찾아오고,
커피와 셔벗의 특별한 맛에 녹아든깊은 사연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단단히 얽힐 대로 얽혀버린 관계 속에 스며든사랑과 증오, 뜨거움과 차가움, 기다림과 서두름
www.haina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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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하지 마 엄마가 이렇게 하는 게 나는 어색해서 불편해."
그 말의 의미를 나는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딸을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배 한번 문질려 주지 않았으면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슬프고 마음 아팠습니다.

나는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이 그냥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본 속 여자가 머릿속에 가득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 딸이 배 아프다고 하면 "아가, 이리 와." 하고 안아 주었지만, 대본 속 역할을 생각하듯이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해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된 딸은 나를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아이들을 낳긴 낳았지만 내가 하는 배역을 더 많이생각하느라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라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생에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천성적으로 없는 사람입니다. 내 딸 임고은이 언젠가 내 대본 뒤에 써 놓은글이 있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나도 엄마 같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어.‘

그 대본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내 딸은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엄마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현모양처인 줄로만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살림도 못하고, 대본만 받으면 그날부터 대본 속 인물이 되어 버려서 식구들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배우이니까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로서 잘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긴 자잘한 상처들이 흐지부지 묻히지 않도록 가족에게 상처를주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떳떳하지 못하면정말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나를 배우로 인정해 주는 가족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연기에 집중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도 나에게 싫증날 것 같았습니다. 날마다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고, 그 말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잘못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나를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고개를 저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를 여태까지 살게 하셨는지,
나는 그것이 의문입니다.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은데 신은 나를 왜 이렇게 오래 살게 하실까요? 

어른들에게 실망한 오스카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소아병동의 가장 나이 많은 간호사인 장미 할머니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장미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세 번 병원을 찾는 호스피스 자원봉사 간호사입니다. 그녀를 장미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스카밖에 없습니다. 병동에서 일할 때 핑크빛 감도는 장미색 가운을 입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전직 프로 레슬링 선수라고 소개하는 그녀는 프로 레슬링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어 오스카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줍니다. 장미 할머니는 오스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생각을 고백하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들, 그것들은 너에게 들러붙고 너를 짓눌러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너를 썩게 만들지. 고백하지 않으면 너는 구닥다리 생각들로 가득 찬 악취 나는 쓰레기장이될 거야"

장미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소년은 하루를 10년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합니다. 

마치는 날까지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열흘째 되던 날, 다시 말해 죽기 이틀 전 오스카는 이렇게 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난 백 살이 되었어요. 장미 할머니처럼요. 계속 잠이 쏟아지지만 기분은 좋아요. 난 엄마랑 아빠에게 삶이란 참 희한한 선물이라고 얘기를 해 줬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선물을 과대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중엔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고 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선물받은 게 아니라 잠시 빌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래요, 삶은 선물이 아니에요. 잠시 빌린 것이죠. 빌린 거니까 잘써야죠.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예요."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픈 오스카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성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을살더라도 얼마만큼 가득 차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삶은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이 연극은 말합니다.

"네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고 나서 내가 몇날 며칠을 울었는지 아느냐?"라고 말하는 순정파입니다. 
옛날 애인인데도 늘 와서 나를 보호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고, 여행도 데려갑니다. 
그리고 군불 때는 방에서 가운데에다 가방으로 금을 그어 놓고 둘이서 잡니다. 그때 남자가 말합니다.
"참 세월이란 게 웃기다. 젊었으면 뺨을 맞아도 너를 으스러지게 안았을 텐데, 지금은 졸려서 못 안겠다"
그런 장면들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 방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둘이서 바라봅니다. 그때 내가 손을 내밉니다. 남자는 이 여자가 하도 새침데기이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손 잡아 무안하게 손 잡으라고 내밀었는데, 왜 안 잡아?"
그러니까 손을 잡습니다. 또 내가 친절하게 해 주니까 남자는 너무 좋아서 춤추는 걸음걸이로 담 옆을 걸어갑니다. 내가 안 보는 데서 막 춤을 추면서 갑니다.
대본 속 인물이지만 그런 남자가 곁에 있어서 마음이 따뜻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보호해 주는 것이 전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게 흥미롭고 진력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섯 명의 여자가 연결된 신이 많아서 한두 마디 하려고 다 함께 기다리며 촬영할 때가 많았는데, 그동안 조연과 단역들이 주연인 내가 연기하는 동안 이렇게 기다렸겠구나 싶은 생각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PD 저널의 방연주 객원기자라는 분은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고 리뷰에 노벨문학상을 탄 쉼보르스카의 시를 인용했습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중에서).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인생에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희경 작가가 한 말처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치열함을 살고 있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과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희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많은 배우들이 함께 나옵니다. 그럼에도 노희경 작가는 배우를 살릴 줄 압니다. 나의 경우에 혼자서 거의 3분을 떠들게 했습니다. 
회자는 치매에 걸려서 어릴 때 죽은 아들을 생각합니다. 아들 잃었던 그 순간이 마음속 한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살던 데를 찾아가서 베개를 업고 포대기까지 하고 돌아다닙니다. 아기가 아프니까 혼자서 아기를 업고 돌아다니던 것을 그대로 재연합니다. 
치매 걸린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그때 내가 베개를 업고 친구 정아에게 오열하며 소리칩니다.

"나쁜 년, 네가 여길 어떻게 와? 네가 감히 여기를 어떻게 와? 이 물어뜯어 죽일 년아…………. 내가 너한테 전화했지. 내 아들이 열감기인데 도와달라고, 약 먹었는데 안 낫는다고, 무섭다고 와 달라고 했지. 왜 맨날 너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 왜 맨날 힘들어서 내가 필요할 때는 없어. 남편한테도 전화 안 되고,
그 밤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전화했더니 기껏 나보고 ‘나도 힘든데 징징대지 마‘라고 그러고 너 전화 끊었지. 난 너밖에 없었는데……. 니네들은 왜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 맨날 힘들어. 그래서 내가 맘 놓고 기대지도 못하게‥…내, 이년아. 나쁜 년. 넌 친구도 아냐. 내 아들이 내 등에서 죽었어. 내 아들 살려내."

"누가 벽에 요정들을 그려도 된다고 그랬지?"
여자는 말합니다.
"요정이 아니라 새예요."
"새든 요정이든 누가 허락했느냐고?"
"당신이 집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으라고 해서요. 내가 보기엔 이것이 좋아 보여서요."
선천적인 장애에다 관절염, 폐기종을 앓고 있던 여자의 건강은 나빠져만 갑니다. 나중에는 허리가 완전히 굽고 발목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붓을 쥐어도 손가락이 아프지만 그녀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결국 여자는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집니다. 
병원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고자책합니다. 그 말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받았어요.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눈을 감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여자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한 집에서 쓸쓸하게 물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자가 처음 상점에서 발견한 구인 쪽지를 평생 보관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캐나다 영화 「내 사랑」(에이슬링 월쉬 감독의 2016년 개봉작, 샐리호킨스 · 에단 호크 주연, 캐나다인들이 사랑하는 여성 화가 모드 루이

「엄마의 바다」 「여」「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엄마가 뿔났다」「청담동 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 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 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삼십 대 끝자락이던 때, 혜자 님과 산으로 들로 긴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화 마더」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저나 촬영감독, 프로듀서 모두 아름다운 로케이션 찾기에 한껏 욕심을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 영화를 보았을 때, 모두가 단번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 최고의 풍광은 무엇보다도 혜자 님의 얼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더 혜자 님의 커다란 두 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는것을 그 신비로운 두 눈을 통해 그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 표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 그분의 두 눈이 어떻게 시네마스코프의 드넓은 캔버스를 집어삼켜 버리는지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경이로웠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해 온 혜자 님의 명연기에 대해 제가 굳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놀라운 섬광 같은 순간들이 필름에 담겨지기도 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맨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은 저에게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자 님의 눈빛에 어울리는 맑고 깊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봉준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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