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목록‘보다
‘그럴 수도 있지 목록‘이 더 늘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심한 성격이던 지오가 "어떻게 그런 일이!"를 외치며 벌떡벌떡일어날 만큼 풍파를 겪은 자기는 ‘그럴 수도 있지 목록‘이 더많아진 애어른이 된 것 같았다. 스스로 버린 길에 대한 후회와 미련, 안타까움이 쇠스랑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장에 자국을 냈다. 석주의 무의식적인 과시는 그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영동 애들하곤 연락 안 하냐? 너 이러고 사는 거 애들은모르는 거 같던데."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지오가 물었다. 석주는 태호를보고 숨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태호와 있었던 일을 먼저 이야기해야 했다.
"너, 곽태호 기억나?"
석주가 물었다. 지오는 대답이 없었다.
"넌 같은 반이 된 적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럼 양근석은 알지? 1학년 처음에 같은 방 썼잖아. 그 패거리야."
"근데 걘 왜?"

"너, 그때 자퇴했을 땐가? 안 했어도 기숙사 층이 달라서모를 수 있겠다. 암튼 나 그놈들한테 생일빵 당했었거든."
지오가 아이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석주가 말했다. 석주는 다른 애들이 생일빵을 당하는 걸 보거나 들었지만 자신도 당할 줄은 몰랐다.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해도 자신은 여전히 엄마 아빠의 비호와 영향권 아래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남한테 일어나는 일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아직 모를 때였다.
석주는 다른 애들이 당하는 걸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남의일이라고 생각했고, 공부하기도 바빴다. 그런데 자신이 당하고 나니까 그보다 더한 치욕이 없었고 그다음엔 분해서 공부가 안 될 정도였다. 어른들에게 일러 봤자 소용없다는 건이미 알려진 일이었다. 석주는 공부에 방해되는 감정들을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어떻게 했어?"
지오가 성마르게 재촉했다. 석주는 지오를 더 놀라게 할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뿌듯했다.
현수라고, 방송반 애 알아?"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잘난척 오지게 하던 놈."

"기억하는구나, 현수한테 상준이 생일빵 장면을 찍자고했어."
"뭐? 기숙사에서 그게 가능해?"
지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주는 지오의 반응이 놀라웠다. 매사에 냉소적인 채 한발 물러나 있던 지오가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현수 생일이 상준이 생일 다음이었거든. 두려움이 극에달하면 무모한 용기가 생기는 법이잖아."
지오 말대로 잘난 척이 심한 현수는 곽태호 패거리들이공공연하게 벼르고 있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현수는 석주의 제안에 응해 방송반 카메라를 가져다 화장실에 숨어 촬영에 성공했다.
"동영상 갖고 쫄아? 그런 새끼들이 아닌데."
지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들이 아니라 사감하고 딜했지. 사감이 일진 선배였던거 알지? 사과하면 조용히 끝내겠지만 아니면 일을 크게 벌인다고 공갈쳤어. 우리 엄마랑 현수네 아빠가 학부모 운영위원이었잖아. 걔들이 우리 밟는다고 설치는데 사람이 누르는 거 같았어. 동영상 털리면 사람 잘리고 애들도 퇴학 각이

니까. 사감 앞에서 애들한테 사과받고 그 뒤로 다른 건 몰라도 생일빵은 없어졌어."
석주는 지오를 슬쩍 돌아다보았다. 더 큰 걸 기대했었는지 지오의 표정이 허탈해 보였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지오가 말했다.
‘마마보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 동영상 찍는 거 그놈들한테 걸렸으면 개박살 났을 텐데."
고등학생 때의 석주는 마마보이란 말이 너무 싫었다. 누가그렇게 부르면 발끈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더는 마마보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호를 보고는 숨었다. 태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뭔가 창피해서였다.
아직 스스로 선택한 삶에 자신이 없는 거다. 그 고백은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좀 겁나기는 했어. 걸려서 터질 각오도 했지. 근데그 새끼들이 생일도 아닌 우리를 때리면 빼박 폭력인 거잖아 그럼 일 진짜 커질 거고, 우리 학교가 자랑하는 태명 3무중 1빠가 뭔지 너도 기억나지? 폭력이잖아."
석주가 동의를 구하며 돌아보자 지오는 시선을 피했다. 석 주는 지오가 지금까지만 해도 많이 들어 준 거라고 생각했

아저씨 말에 지오는 문득 자기도 아버지한테 한 번만이라도,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응원한다는 말을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든 생각치고는 너무 강렬해 지오는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우찌 지냈나?"
아저씨가 지오를 궁금해했다. 오는 내내 자기 삶을 더듬어 봤기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지리멸렬이죠, 뭐. 스무살 넘으면 빛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요."
지오는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지리멸렬‘이란단어만큼 자신의 현재와 딱 들어맞는 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데 제절로 나는 빛이 있나. 지오니, 이른 봄 얼음 녹을때 냇가에 가본적있어?".
아저씨의 물음에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지오 머릿속에영화나 소설 등에서 본 이미지들이 조합돼 이른 봄, 얼음 녹을 때의 냇가가 펼쳐졌다.
"물가에 있어 보마 깨진 얼음장이 흘러가다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어, 돌에 걸리거나 수면이 갑자기 낮아져가얼음장이 곧추설 땐 기여. 그때 햇빛이 반사돼가 빛나는 긴

데 그 빛이 을매나 이쁜지 모린다. 얼음장이 그런 빛을 낼라카마 우선 깨져야 하고 돌부리나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않아야 하는 기여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우연으로 시작해서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라. 사는 기 평탄할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마 그제사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지."
말을 마친 아저씨는 열무 줄기에서 연두색 벌레를 잡아 원두막 옆 수풀로 던졌다. 열무 잎에는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인듯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다. 벌레가 열무 줄기에서 산 삶의 흔적이었다.
정욱 패거리들이 쫓아왔다. 도망치다 보니 그 아이들은근석 패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금방 뒷덜미가 잡힐 것 같은네 다리에 쇳덩이가 매달린 듯 무거웠다. 결국 아버지 손아귀에 잡히려는 순간 지오는 소스라쳐 깼다. 진짜로 달린 양헐떡이며 낯선 주위를 둘러보던 지오는 예전에 석주와 함께샀던 그 방에 있음을 깨달았다.
지오는 잠을 깨운 다리 위의 중압감을 떨쳐 내며 일어나앉았다. 지오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자던 석주는 머리가 바닥

"그전에 난 항상 먼 미래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같아. 근데 여기선 그럴 수가 없어. 나무들은 필요한 걸 제때에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 서은이랑 비슷하다. 서은이는어른들이 어떤 상황이든 저 하고 싶은 걸 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너도 떼쓰는 거 봤지? 휴, 걔 아무도 못 당한다. 처음엔 너무 버릇없는 거 같아서 걱정되는 거야. 그런데 가만히보니까 그때그때 저한테 필요한 걸 원하는 거더라고, 나무가 자라려면 필요한 게 있듯이 그 애도 자기가 잘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난 서은이를, 미래만 보면서 살았던 나 같은 애가 아니라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알고, 또 하면서 사는 애로 키우고 싶어. 나무가 서은이 같다고 생각하니까 일하는 게 나름 재밌어."
힘들지 않느냐는 지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삶의 진실을 깨달은 것 같은 말들이 어쩐지 비위에 거슬리던 게 기억났다.
석주는 여기 파묻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석주는 의대를 지망하면서도 의사가 된 자기모습이나, 어떤의사가 되고 싶은지는 그려지지 않았는데 사과나무를 키우면서는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해졌다고 했다. 그 일은 과일 품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지오는 졸렬한 질문에 석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의 폭음은 어쩌면 석주로부터 후회한다는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는자신을 잊기 위해서였다는 게 더 맞았다.
지오는 벽에 기대앉아 잠자는 석주를 내려다보았다. 생뚱맞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불행하다‘란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불행한 가정들을 집대성해서 그려 놓은 듯한그 책은 한창 가정사 때문에 괴롭던 지오의 마음을 달래 주던 책이었다. 지금은 잔뜩 웅크린채 잠든 석주의 모습이 위안을 주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지오의 질문에 대한 진정한대답인 것 같았다. 지오는 불안하고 외로워 보이는 석주에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런데도 가슴 저 깊숙이 뿌리내린 열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오는 나가서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술은 물론 잠까지 완전히 깰 것 같아 참았다. 정신이 맑아지면 다시 잠들지 못할것 같았다. 

"이른 봄, 얼음 녹을 때 냇가에 가본 적 있어?"
깨진 얼음장이 흘러가다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어, 돌에 걸리거나 수면이 갑자기 낮아져 얼음장이 곧추설 때야. 그때 햇빛이 반사돼 빛나는 건데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지 몰라. 얼음장이그런 빛을 내려면, 우선 깨져야 하고 돌부리나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

지오는 자신을 이른 봄, 햇살이 내리쬐는 시냇가로 데려다 놓았다.
깨진 얼음이 곧추선 채 빛나는 그 순간으로.


우연으로 시작해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빛나는 인생에 대하여

이금이 청소년문학
청소년들의 ‘지금과 여기‘를 살피고, 꿈과 미래를 힘껏 응원하는이금이 작가의 청소년문학 시리즈입니다.

유진과 유진 
이름이 장편소설책으로 따뜻한세상만드는 교사들 추천도서 어린이도서연구회 청소년 권장도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청소년 추천도서  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도서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 책 책 읽는 서울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선정 도서  부산시교육청초중고 권장도서  교보문고 선정 마음에 힘을 주는 책  알라딘 독자 선정 청소년문학최고의 책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권장도서  창비어린이 선정 올해의 책 학교도서관저널 「성과 사람 366, 선정 도서  학교도서관저널 추천 성장소설 50선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선정 어린이·청소년 평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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