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아버지가 그립다.
단호한 목소리로
"딸들이 시부모께 효를 행하기도 어려운데 친정부모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힘드냐" 하던,
딸아이를 가져 임신 6개월에 부른 배로 친정에 가니
마당의 체리 나무에서 체리를 한 바구니 따놓고
"네가 잘 먹어서 미리 따놨다. 달고 맛있구나.
실컷 먹어라" 하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 그립다.
딸이어서 서운했다는 말이 
다 지나간 말이었으면 한다.

흐르고 욕망하고 질투하고 소멸하기도 하니, 결코 몇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은 감정이 자라고 육체의 섞임을 통.
해 우리 세대를 존속시키기도 하고 스스로 관계를 파괴하기도 하니,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무심코 생각하면 사랑의 기술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니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26년 결혼해 살아보니 그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니 대충 하다 말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 고단함이 숨어 있다.

 이기적이어도 보통이기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재미나고 요사스러운 것은,
사랑은 대상을 만나면 끝은 내가 좋아야 하되, 과정은 상대의 만족, 기쁨, 해소, 평안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정말 해괴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기술은 한껏 기술을 사용하되, 
그게 기술로만 보여서도 안 되고, 사랑의 기술 대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지치지 않는 ‘실천‘과 ‘단련‘으로 끝없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되, 
연마하지 않은 듯 보임이 미덕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까놓고 말하면 사랑의 기술은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게 결국은 ‘상대도 좋아 죽을 지경‘이 돼야 하니 ‘참 어려운 문제‘다. 
다 같이 좋은 게 어디 쉽겠나? 그게 결혼이다. 서로 사랑해서 좋자고 한 결혼이지만 둘 다 좋기도 힘들고, 사랑이 없어졌다 하여 쉽게 취소하기도 어려운 게 결혼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 상대를 알아가야 하니, 
결혼생활은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간접적 원인)을 반복하는 불교의 연기설()과 닿아있다. 
불교뿐이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이웃만 못하겠는가? 부처와 예수가 "나를 사랑하고자 해도 상대를 사랑하라" 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니 공을 이루는영혼(spirit)을 구하든 인생의 반려자인 남편을 사랑하다 보면 뭐든 건질 것 같았다. 사랑만 하면 된다니…………. 그래서 결혼하며 크게 다짐했다.

남편을 잘 사랑해 사랑의 기술을 구현해보리라.‘
왜냐하면 이게 결국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니 말이다.

생각은 참 쉽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결혼생활은 고공 외줄 타기보다 어렵다. 고공 외줄 타기는 안전고리를 걸고 몇 백미터만 가면 끝나지만 결혼은 끝도 모르고, 아이를 등에 지고,
머리에 꿈을 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깔린 유교 문화에서 
배우자를 균형대처럼 잡고 걸어가는 것이니, 최상급 고공 줄타기보다 난이도가 높다.

결혼 후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거울에 비친 내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게 있어 결혼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 사랑을 실천하는 장, 결국 ‘나를 파악하는 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6년 즈음 살아보니 사랑은 정말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 말로 하면 빅데이터를 축적하여 내 사랑이 어느 궤적을 지나가고 있는지 파악함과 아울러, 소소한 사랑의 기술 중 무엇이 더 필요한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실천과제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통해 가까운 미래를 보장하니 말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상대방의 욕망과 내 욕망의 차이, 수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사랑은커녕 현실 인식 차이로 결혼 자체가 위태롭게 되니 말이다.

결혼은 선언으로, 결혼신고서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혼은 이혼신고서로 완성되지만 결혼만큼은 혼인 서약을 했다 하여 완성되지 않는다. 결혼 속에서의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사랑을 선택한 사람으로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할 한 인간일 뿐이다. 지금 돌이켜봐도 결혼이란 기껏 사랑의 기술을 끝없이 연마하는 과정을 위해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각자의 바운더리를 격투기장으로, 페어 경기를 하는 아이스링크로,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달리기 경기장으로,

긴 호흡으로 달리는 마라톤 경기장으로 만들지는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 딸이 결혼한다 할 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딸의 인내심이라면, 딸의 끈기라면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딸아,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 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 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바라머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다만 조심할 것은 서약으로 시작되는 결혼을 믿지 마라. 
결혼이 결말인 듯 아름답게 쓰인 동화도 잊어라. 
사랑해서 한 결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요구되는 긴 삶이니 말이다.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오빠 신발로 타느라 너무 고생해서 
딸은 그냥 즐기게 해주고 싶있어요."
내가 부모님을 보며 밝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안다. 네가 맞지도 않는 신발을 들고 다녔지.
내 동생은 사줘도 타지도 않고."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도 알았다. 엄마의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말이다. 
엄마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단지 엄마는 엄마의 엄마로부터 배운 대로 아들딸을 낳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았을 뿐이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스케이트장을 찾아 스케이트를 탄다.
어렸을 적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스케이트를 탔던 그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넘을 수 없는 선이란 없음을 되뇐다.

추운 겨울, 발에 맞지 않는 큰 스케이트를 신고 수없이 넘어지고 온몸이 젖으며 배운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었다. 발이 휘휘 도는 오빠의 스케이트지만 

신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없음을. 
넘어지지 않고서 어찌 일어나는 법을 배우겠는가?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라며 꺼내 들고 빙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잣대가 다름을 
그리도 명료하게 알았겠는가? 
나는 달릴 수 있는 한 늘 달렸고, 내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고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다.

어린 나는 세상의 불평등은 모르되 집안에서의 불평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걸 넘는 방법은 나 스스로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겨울바람처럼 명료하게 깨달았다.

넘어지다 보면 넘어지는 순간 넘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일어나다 보면 일어서는 순간 일어나는 요령을 알게 되니. 
세상 이치는 잔혹하지만 대가 없이 배워지지 않음을 
나는 발에 맞지 않는 오빠의 큰 스케이트를 타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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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강연을 하러 가면 "제가 생각하는 SF가 어떤 장르인지 소개하겠지만, 사실 합의된 정의는 없습니다"라고 먼저 이야기한다. 
SF가 흔히 어떤 특징들을 지녔고 내가 좋아하는 SF의 요소들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어도 여기서부터 SF이고 저기서부터는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SF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해 온갖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하는 과정이 분명 내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SF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밑천을 만든 셈이었다. 

데뷔 직후에 나는 ‘이런 게 무슨 SF냐‘는 퉁명스러운 리뷰를 종종 보았다(재미있게도 이 말은 작품에 대한 칭찬으로도 멸시로도 쓰인다). 
그 말이 신경 쓰여서 누가 봐도 SF인글을 써보겠다고 ‘SF란 무엇인가‘를 탐험하는 과정을 지나고 나니,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이미 SF라는 폭넓은 세계의 어느 언저리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설들은 SF 세계의 일부였다.

첫 소설집을 쓰면서 나는 SF의 고전적인 테마들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도전해 보았다.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책에서 발견한 아이디어가 소설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카라플라토니의 감각의 미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최신 인지과학을 탐색하는 책이다. 
목차에는 우리가 흔히 감각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간 감각‘에 대한 챕터도 있다. 

인간의 시간감각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기본적인 감각들을 뇌안에서 통합하고 편집하여 인지하는 초감각이자 다중감각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언젠가 이것을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나중에 울산의 공중관람차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관람차를 탈 때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 주위의 풍경이 멈춘 듯한 기분을 시간 감각, 시간 인지능력과 연관 지어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 결과물은 「캐빈 방정식이 되었다. 
소설의 화자는 삼 년 전 사라진 언니에게서 울산 공중관람차의 귀신 출몰 소동에 대해 조사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소문의 실체는 언니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던 시간감각의 왜곡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뢰받은 소재와 당시 읽고 있던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합쳐지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 미술과 사회> 전시 도록의 일부로 실을 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무엇보다 과학에 관한 생각이 조금은 복합적으로 변한 것도 있었다. 나를 이 세계로 초대한 과학책들은 열정과 호기심, 순수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 과학은 그렇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 행정업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포함해 반복되는 잡다한 일들,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문제들. 그 안에도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여전히 과학이 좋았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 새로운 길이 눈앞에나타났다. SF 공모전에 냈던 두 편의 소설이 수상 소식을 가져왔다. 기사가 크게 나서 장르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도 되었다. 대학원 졸업 학기, 진로를 결정해야 할 무렵이었다. 마땅한 길을 찾지 못했던 나는 이왕 주목받는 행운을 누린 김에 딱 일년만 전업 작가로 살아보자는 뜬금없는 결정을 내렸다.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구조에 기인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받아들이며 출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인이 몸과 정신의 손상, 즉 장애 자체로 겪는 고통도 분명히 실존한다. 어떤 사람의 장애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그가 개별자로서 고유하게 경험하는 몸의 고통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대의 장애 담론은 손상을 장애화하는 사회, 제도, 문화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장애인 사이의 다양성, 구체적인 몸의 고통과 경험, 장애 정체성과 자긍심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룬다.

한편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간 신체-결합기술에 관한 대중서와 학술서도 국내에 여럿 나와 있었다. 
마크 오코널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

열심히 살다니 정말 대단해!‘ 같은 맥락 없는 말을 듣게 되거나, 앞으로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소설이 장애라는 해석 틀로만 읽힐까봐 다소 섣부른 걱정을 했다. 그래서 약간은 방어적인 태도로 초고를 썼다. 그 결과는 내가 너무 글 뒤에 숨어버린, 무미건조한 글이 되고 말았다.

편집자님의 피드백에 대부분 동의했던 나는 일단 초고를 뜯어고치며 내 경험 서술을 늘리고 회상 장면들을 ‘감정적으로‘ 크게 수정했다.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자기 이야기를 녹여내는 김원영 작가의 파트를 읽으며 분석도 했다. 그런데 내글을 수정할수록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까. 이기분은? 한참 고민하다가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계속 이야기를 나눠왔던 연구자 K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K는 글을 다 읽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아니야. 이건 너무 과해."
K의 말에 따르면, 추가된 내용이 독자의 몰입을 돕는 대신 그냥 불평불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K의
‘과하다‘는 표현 하나로 내 원고에 느꼈던 거리감이 정리되는기분이 들었다. 

독자를 몰입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내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지나치게 부풀린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추가된 경험들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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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소설들을 ‘결국은 인간 이야기‘로 요약해서는안 될 것 같다. 『잔류 인구는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노인 오필리아가 인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이야기인 동시에 이 개척 행성의 원래 주인공인 자생종들, 인간과 대화할 수 있고 교감할 수도 있으나 인간과는 다르게 북을 치고 독특한 집단을 만드는 존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오필리아만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소설의 중요한축 하나를 완전히 빠뜨리는 셈이다. 중력의 임무』의 중심은역시 괴상하게 생긴 외계 생물, 그리고 낯선 행성 메스클린 자체다. 메스클린인은 우리 인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만(심지어 소설 속에서 지구인과 교류하지만)어쨌든 소설의 초점은 메스클린의 기이한 생물과 행성에 맞

와 최초의 접촉을 하는 것, 그런 간접 경험들은 우리가 발 디딘 지상을 한 번쯤 떠나게 만든다. 

한 번이라도 떠났다 돌아오는 것과 
아주 떠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일단 저 밖에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오면 남은 평생 인간의 관점에 매여 살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결망의 한 점으로, 조그만 구성요소로, 
수천수만 가지 현실의 단면 중 오직 일부만을 감각하는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그 무렵 나는 상상력과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SF를 쓰겠다고 생각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세계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모르면 모르는 대로 여기저기 구멍이 났다.
 대학 시절 내내 배워서 그나마 익숙한 과학지식은 소설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 대충 얼버무리려 해도 단 한 줄짜리설명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으면 독자에게 세계 전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습작 시절 쓴 소설들을 다시 보면 유명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분위기를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 많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밑바탕이 없으니 살면서 접해온 익숙한 이미지를 빌려와야 했던 것이다. 몇 권을 쌓아둔 노트의

 ‘SF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료를 다 찾아 읽기로했다. 먼저 국내 SF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이는 대로 전부 읽었다. 다른 신문 기사와 웹진의 인터뷰도 유용했지만 

특히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정리된 인터뷰가 소중한 자료였다. 

다른 작가들이 SF가 어떤 장르인지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 읽으며 한국에서 SF가 읽히고 또 쓰여온 흐름을 되짚어 갔다. 지난 이십 년간 반복된 비슷한 질문에 작가들이 고민한 흔적이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왜 SF를 쓰시나요?" "SF는 무엇인가요?" 내가 데뷔 초기에 너무나 많이 받았던 질문을 이전 작가들도 똑같이 받은 것을 보니 웃음도 나오고 괜한 친근감도 느껴졌다. ‘이제 새로운 질문이 나올 때가 됐습니다!‘ 하고 분개하던 작가들의 심정에 백번 공감이 갔다. 작가들의 성실한 인터뷰 답변은 내가 SF라는 장르를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국내 SF 작가들의 인터뷰를 잡히는 대로 읽은 다음에는 구

Science Fiction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위키피디아부터 온갖 SF 사전, SF 매거진, SF 리뷰 블로그, SF 칼럼을 눈에띄는 대로 읽었다. 지금은 SF 비평이론을 상세히 소개하는 좋은 번역서가 몇 권 나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번역된 단행본이 거의 없었고 나는 파편화된 자료들을 모아 담아서 나만의 SF에 대한 상을 그려가야 했다. 물론 몹시 혼란스러웠다.

내가 읽은 SF에 대한 수많은 정의를 아주 대충 요약해서 나열해보면 이런 식이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6)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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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없는 아버지 앞에서 한동안 눈물을흘리다 내가 깨달은 것은 늦었더라도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독한 고집도 감사하고, 
하겠다고 작심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신 것도 감사해요. 
아버지가 저를 사랑해서 혹여 다칠까 걱정으로 저를 보호하려 했던 걸 잘 알아요. 
그리고 그 선을 넘다가 넘어지고 아파도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는 힘을 주신 게 아버지란 걸 알아요. 
용기와 열정을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품게 해준 것이 아버지란 걸 알거든요. 
아버지는 아버지가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걸 이미 저에게 다 주셔서 저는 감사해요. 
너무 사랑해요.
지금껏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불쑥 내뱉어졌다.
"그런데 아버지! 저는 딸이어서 너무 서운했어요. 지금도 서운하네요. 제가 딸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닌데. 아버지는 늘 딸이어서 마음을 접는 게 서운했어요. 너무 많은걸 제게 주셔서 기대해도 됐고 바래도 됐는데. 
아버지는 늘 결혼한 딸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된다 하며 거리를 두셔서 서운

했어요."

귀국 첫날 아버지를 뵙고 딸이어서 서운했단 말을 하고 난 후, 그날 저녁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내입을 거쳐 툭 내뱉어졌을 때, 내 안의 큰 슬픔이 함께 떨어진듯 했다. 
비록 불효한 말이었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토로할 수있어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 가슴속에 쌓여 있던 서운한 말을 들어주고, 나 스스로 서운함을 풀어낼 수 있도록 해주심에 감사했다. 
2박 3일 일정으로 일시 귀국을 한 터라 다음 날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었다. 
설을 사흘 남겨둔 날이었다. 
아버지를 보며 다시 말씀드렸다.

"아버지, 정말 사랑해요. 살면서 아버지 눈을 보며 사랑한다 말하지 못해 죄송해요. 
그리고 저 어렸을 때 아버지 속상하게 한 것도 죄송해요. 그래도 그런 시간이 없었으면 제가 아니잖아요. 늘 사랑으로 저를 감싸주시고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딸이어서 서운했던 건 사실인데 이젠 안 서운해요. 
제가 아버지 딸이어서 좋았어요. 아버지 딸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아버지 딸이어서 행복했어요. 저 이제 미국 다시 들어가요. 이틀 지나면 설이에요. 설 지나고 봄이 오면 얼른 일어나 미국 오세요. 아버지가 그리 예뻐하던 손녀딸 보러 오세요. 사랑해요. 아버지!"

그렇게 아버지 볼과 이마에 내 기억에는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출국하고 미국 집에 도착한 날 돌아가셨다.

다음 날 새벽, 가족과 함께 다시 비행기를 탔다. 중환자실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냥 사랑한다는 말만, 얼른 일어나시란 말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며 솔직한 속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부모는 자식이 모르는 선물을 한가득 주고 떠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선물 꾸러미에 무엇이 있는지 그건 나만 알고 있고, 나만 꺼내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부모는 선물을 줘놓고도 그 선물이 어찌 열릴지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들과 소소한 불화들이 우리 인생에 모래알처럼 깔려도 결국 선물 꾸러미를 열어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존재는 
나 이외에는 없음을 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내게 알려줬다. 
요즘도 아버지가 그립다. 

단호한 목소리로 "딸들이 시부모께 효를 행하기도 어려운데 친정부모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힘드냐" 하던, 딸아이를 가져 임신 6개월에 부른 배로 친정에 가니 마당의 체리 나무에서 체리를 한 바구니 따놓고 "네가 잘 먹어서 미리 따놨

다. 달고 맛있구나. 실컷 먹어라 하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그립다.

딸이어서 서운했다는 말이 다 지나간 말이었으면 한다. 
어떤 아이도 본인이 원해 
딸로, 아들로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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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족 안에서의 넘어섬이 없다면
과연 다른 울타리에서
무엇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제약할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오냐, 뭐가 나오냐? 
내가 평생 벌어다 준 돈을 
네 엄마가 그리 허망하게 쓰고 
맨날 성당 간다 쪼르륵 나가고. 
아니, 평생 죽도록 돈 벌어 먹여줬으면 
나를 챙겨야지, 뭔 성당 청소며 레지오며......."
내가 큰 소리로 따박따박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이혼당하려고 그래요? 아버지 재산 그거 딱 반은 엄마 거예요. 
거기에 종교적 핍박으로 위자료도 받아낼 수 있어요. 
그러지 말아요. 
왜 늙어서 엄마를, 
하느님 믿는 순한 엄마를 핍박해요. 
이젠 편하게 기도하게 해줘요."

그간 그렇게 바른 말 하는 내가 시끄러웠다던 엄마는 거실에 앉아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언니들이 말렸다.
"야, 그만해. 아버지가 엄마 없이 혼자 밥 드시는 것 서운해서 그렇지. 엄마를 사랑해서 말이야."

"알지, 아버지가 엄마 사랑하는 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헤아려야지, 왜 엄마를 핍박하냐고. 
종교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된 거야. 
아버지 조상이 다시 살아나 엄마에게 성당 가지 마라 해도 
엄마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게 
종교의 자유인데, 
왜 아버지가 
엄마 영혼을 구할 수도 없으면서 
가지 마라 하느냐고"

아버지는 헛헛하게 웃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 생각해봐요. 내 남편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저를 이리 핍박하면 제가 참고 살아야 돼요? 
제가 일이 있어 나가야 된다고 하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내 밥 차려야 하니 못나간다 하면 
옳다구나 하고 제가 그러고 살아야 돼요? 

그런소릴 듣고 제가 살고 있다면 
아버지 마음이 좋겠어요? 
평생 순종한 엄마도 
남의 집 귀한 딸이었어요. 
그렇게 아빠 편한 대로 하시면 안 되죠. 
그러지 마세요. 
엄마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니까 이제까지 참고 산 거예요. 
너무 사랑해서
그걸 몰라요?

"하긴 그렇지. 엄마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지."
듣고 있던 언니들도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시부모님을 공경하며, 평생 머리를 낮추고 공손히 시부모를 모셨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타지에 나가 힘들게 벌어온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 
엄마는 늘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지 못하고, 

우리 다섯 형제자매 대학 교육을 시키고, 근검절약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거스른 단 한 가지는 신앙생활이었다. 
결혼 초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아편 같은 종교라

는 독한 말을 듣고서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멈춘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신앙 안에서 힘든 현실의 고통을 하느님과 함께 견뎌왔다.

엄마에게 신앙생활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오손도손 살던 엄마가 선을 넘어 새롭게 들어온 바닷속 같은 시집 생활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는 시간이 
일요일 오전미사였던 것인데, 
그마저도 아버지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엄마는 삶에서 타협할 것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줬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일 수도, 일일 수도, 생각의 자유일 수도있는 고유한 무엇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을 걸고 내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엄마의 종교를 없애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내 도리를 다하고 인내하고 검소하게 사는데, 일주일에 몇시간 주님을 못 만나게 하는 게 사람이야?"라며 엄마가 아버지께 하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는 유교 문화의 선을 넘지 못한ㅈ채 시부모와 남편에게 순종했지만 자신의 종교는 끝까지 지켰다.

육지에서 살다 바다로 들어간 고래 같은 삶을 산 엄마를 생각하면 숨이 차다. 
그렇지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삶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살다 보면 고래 숨쉬기 같은 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는 그런 시간들이 있고, 그런 시간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엄마는 삶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며,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엄마는 고래같이 크고 단단했다. 
못 배운엄마가, 순한 외할머니와 뜨개질하고, 봄이면 산나물 캐기를 좋아해 이산저산 나물 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소녀가 
고래처럼 깊은 숨을 쉬며 우리들은 편안히 선을 밟고 넘고 살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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