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관한 격언과 찬사

정의를 배제한다면 왕국과 강도집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개인적인 상처·조롱• 증상이 엄습할 때조차 의롭고 올바른 눈이 가진 고귀하고 명료하면서 깊고 부드러운 통찰력 있는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는다면, 정의는 하나의 완성품이며 지상 최고의 걸작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정의는 미덕의 으뜸이다. 정의의 뒷받침 없는 용기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인이 의롭다-아게실라우스 2세(<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정복자는 정의로울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강한 자는 언제나 정의롭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크 루소

정의는 신의 왕국과 같다. 즉 그것은 사실이며 우리 외부에는 없고, 우리 내부에 위대한 동경으로서 존재한다. 정의는 평화보다 더 귀중하다.

지혜 없는 정의란 있을 수 없다.

정의의 대가는 영원한 명성이다.

정의는 완전무결할 때에만 옳다.
-제임스 프루드

-에녹 아놀드 베네트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정의는 느릴지라도 확실하다.
-솔론(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정의는 모든 것의 위에 있다. 성공은 좋은 것, 부도 역시 좋은 것, 명예는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그들 모두를 능가한다.
D. D. 필드

힘을 갖지 못한 정의는 무력하며 정의가 없는 힘은 폭군적이다. 우리는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정의가 지배하는 곳에서의 복종은 자유다.

정의의 지체는 불의다.
-제임스 몽고메리

-월터 새비지 랜더랜도르

오, 하느님 정의가 힘을 지배하게 하소서.

살고 살게 두는 것이 공통정의의 법칙이다.

가장 약한 팔도 정의의 검과 함께라면 강하다.
인간은 부당해도 신은 공정하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

정당함은 법률보다 낫다.

-존 웹스터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반젤린>
-메난더, <카르타고 사람들)
-로저리스트랑주, (이솝우화)

정의를 아끼면 불법이 자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누가 타인의 눈을 망쳐놓으면 사람들이 그의 눈을 망칠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정의를 행하는 한 시간은 기도하는 백 시간의 가치가 있다.
-(함무라비 법전)

정의로운 자의 찬란한 행위는 육신의 고향인 흙 속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는다.

정의가 돌아오면 곧 황금시대가 돌아온다.

정의는 그 자체의 빛으로 빛난다.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의가 행해지게 하라.

극단적 정의는 극단적 불의다.

-이슬람교 금언
-핀다로스
-베르길리우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페르디난트 1세
-라틴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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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공부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논리에서는 객관적인 타당성이 중요합니다.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생각의 과•정입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논리적 사고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과정을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가 바로 논리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어려운 논리학을 모두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논리적사고력은 아주 간단한 원리에서 시작합니다. 마치 수학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라는 간단한 셈법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논리학은 크게 연역 논리학과 귀납 논리학으로 나눠집니다. 한편, 보통 연역 논리학을 그냥 논리학이라고도 하고 형식 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연역 논리학은 형식적 타당성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형식논리학은 기존의 지식을 정리하는 데 유용합니다. 다른 한편, 귀납 논리학은 확률 또는 개연성(그럴듯함)을 추구합니다. 귀납 논리학은 새로운지식을 발견하는 데 쓰입니다.
슬프게도 현실에서는 연역 논리학이 기존의 선입견과 지식을 정당화하고 귀납 논리학이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문제풀이로만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머와 개그에서는 연역 논리학과 귀납 논리학이 기존 생각을전복하고 진부한 결론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일으키는 데 사용될 수있습니다. 웃음을 통해 형식 논리학의 지루함과 귀납 논리학의 사소함이해체되고, 신선한 통찰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유쾌한 개그 코너들을 논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이러한 웃음 코드를 찾아봅시다.

위의 예문도 타당한 (연역) 논증입니다. 전제와 결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개를갸우뚱할 것입니다. 가수 아이유는 눈이 세 개다.‘라는 결론을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 논증은 타당합니다. 이 논증의 문제점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에 있습니다. 가수 아이유는사람이다.‘라는 소전제는 참이지만, ‘모든 사람은 눈이 세 개다라는 대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전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확증할 수 없을 때 그 전제는 가정이 됩니다. 위 삼단논법에서 대전제는가정이 아니라 명백히 거짓입니다. 만약 눈이 세 개인 사람이 태어난다면 그대전제는 가정이 아니라 거짓 전제가 됩니다.)그런데 전제가 거짓이어도 타당한 논증일까요? 그렇습니다.
(연역) 논증이란 전제나 결론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논증은 우선 내용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형식을따지는 것입니다. 즉 논증은 전제로부터 결론이 도출되는 형식을다릅니다. 그래서 논리학은 수학처럼 형식적인 학문입니다. 그형식에 담긴 내용을 사실적으로 검토하는 역할은 과학(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맡습니다.
과학적으로 그 논증의 전제들이 참일 때 그 논증은 내용적으로도 건전하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어떤 논증이 타당하

다는 것은 형식이 올바르다는 것을 말하고 건전하다는 것은 그내용까지 참임을 의미합니다.
자 그럼, ‘논리적이다‘라는 말을 정의해 볼까요?
"전제와 결론의 형식으로 제시되어야 하며, 그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개그 속에 논리가 있다?!
자 여러분.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한 내용은 아닙니다. 많은학생들은 이미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겁니다. 본 책이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개그를 통해서 논증과 논리적 사고력을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수많은 개그 코너들이 논증의 구조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많은 학생들이 궁금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TV에서 보는 「개그콘서트」나 「코미디빅리그」의 개그 코너에는 전제나 결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학 책에서는 논증이 우리에게 익숙한 전제와 결론의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적인 결론이 됩니다. 외모 지상주의라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꼬는내용의 황당한 전제를 통해 황당한 결론들이 이끌어져 나오는 논리적인 상황(필연성)이 웃음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마른인간 연구소)를 논증 구조로 재구성해 볼까요?
이 논증은 이중적으로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제: 현재 지구에는 비만인들만이 살아남았고, 과거에 비만인들과 함께 살았다는 마른인간들은 모두 멸종했다.
(숨은 결론: 인간의 행동과 습관에 대한 상식적 판단의 기준은.
살아남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비만인들에게 있다.)이 결론이 다시 전제가 됩니다.
(숨은 전제 : 인간의 행동과 습관에 대한 상식적 판단의 기준은살아남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비만인들에게 있다.)(숨은 전제: 우리 비만인들은 앉아서 다리 꼬기가 불가능하다.)전제 : 마른인간들은 앉아서 다리 꼬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결론: (그러나 이는 우리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일이다.

대표적인 삼단논법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소크라테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전체를 의미하므로 보편적이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전체의 일부를 뜻하므로 개별적이라고 부릅니다. 보편 속에 이미 개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제 속에 이미 결론이 들어 있어서 전제를 참으로받아들인다면 결론은 자동으로 참이 됩니다.
<스크림>은 바로 연역 논증으로 만들어진 개그입니다. 개그 처음에 등장했던 경고문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패류 이름을말하면 죽는다."를 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어패류의 개별적인이름, 예를 들어 가자미나 꼬막을 말하면 자동으로 죽게 됩니다.
어패류 이름이라는 전체 집합 속에 가자미나 도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논증 구조로 정리해 볼까요?
대전제: 모든 사람은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반드시 죽는다.
소전제: 김준호는 "가자미장원"이라고 했다. 가자미라는 어류이름을 말했다.)결론: 그러므로 김준호는 죽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당성‘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요.

자, 여기까지의 내용을 연역 논증으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남자2의 입장에서 논증으로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대전제: 전화 받는 모든 사람은 저 사람에게 죽는다.(동치 명제: 저 사람에게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전화를 받아서는 안 된다)소전제2: 나는 죽기 싫다. (동치 명제: 나는 저 사람에게 죽기 싫은 사람이다.)결론: 나는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논증적 판단에 근거해서 특단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특단의 행동: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맥주잔에 전화기를 빠뜨린다.
이러한 논증은 대표적인 연역 논증의 삼단논법입니다. 삼단논법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전제와 소전제 그리고 결론으로 이루어진 논증법이지요. 여기서 동치 (같은 값)라는 말은 어떤 명제A가 참이면 그것을 변형한 명제 B도 참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동물이다."의 동치 명제는 "동물이 아닌 존재자는 사람이 아니다"입니다. 이를 일반화하면 "이면 b이다."의 동치 명제는 "-b이면 -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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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수천 년 인류의 역사에서 삶의 지혜가 축적된 보고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딪히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고전 속에 있습니다. 고전은 때로는 친절하게, 또 때로는 엄격하게 우리들의 생각을일깨우고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지한 사고의 힘을 배워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윤구병(전 충북대 철학교수, 변산공동체학교 교장)

어언 20년 가까이 우리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 온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이번에는 인문 교육의 위기, 인문 고전의 위기와 정면으로 맞붙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의기투합하여, 청소년들이 인문 고전과 벗하면서 스스로 인문 정신의한 자락을 맛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독자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원해 봅니다.
자, 이제 인문 고전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기대하시기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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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한 알에 담긴 위대한 힘,
위기의 지구를 살린다

우리는 먹거리를 비롯하여 생필품과 의약품 등의많은 주요 자원들을 식물에서 얻습니다.
이 모든 식물 자원은 바로 씨앗, 종자에서 출발합니다.
식물 자원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종자 산업의 중요성을 알아보며위기의 지구를 살리는 종자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올봄에 틔우는 싹은 가을 수확을 상상하게 하듯이, 현재 주어진 종자는적어도 수십 년 뒤의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종자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육종가들은 엄청나게 많은 다양성과 기회를 종자 안에 담아 두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만큼종자 안에도 그 뜻이 담길 것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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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요. 집을 짓게 되는 요인은 뛰어난 지능이라든지 사회성 등이 아니라 종족 번식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집을 짓는 모든 동물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집을 짓습니다. 상황에따라서 재료가 변할 뿐이에요. 고유한 집 짓기 방식은 절대 변하지않습니다. 제비가 제비집 짓고, 까치가 까치집 짓는 방식과 사람이집 짓는 방식은 똑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초가집과 외국의 벽돌집도모양은 달라도 짓는 방식은 같습니다.
최초에 집은 관목들로 지어졌습니다.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잘 휘어지는 관목들의 가운데를 쳐낸 다음 사람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서 위를 가지로 막아요. 이렇게 하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앉아 있을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산속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피하고 싶을 때는 이런 방식으로 임시 쉼터를 만들 수가 있지요. 이것이 인류가 지은 최초의 집입니다.
이렇게 지어진 집은 하루 이틀 지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유물과 유적으로 남지가 않습니다. 대신 신화라든지 무가 작은 편린과흔적들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 무가에 농사의 여신인 자청비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자청비가 하인과 함께문도령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 도령이 안 오니까 할 수 없이 밤을 지내려고 움막을 지어요. 무가는 이 장면을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동쪽으로 엮어 놓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엮어 얼렁뚱땅 움막을 지어 하루를 지냈다"고 묘사하고 있어요.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집을 지어요. 우리나라에

서도 아주 시골, 강원도 두메산골에 사는 화전민들이 산속에서 비를맞았을 때 이 방법으로 움막을 지어 비를 피한다고 합니다. 몇만 년전의 집 짓기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최초의 집은 집이라기보다 빨리, 쉽게 지을 수 있는 일종의 은신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집을 짓는 방식- 세울 건과 쌓을 축사람이 집을 짓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가 세울 건建다음이 쌓을 축이에요. 먼저 세우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우는 방식은 아주 쉬워요. 나뭇가지들을 수직으로 엮어서 공간

청소년 선생님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세요?

노은주
막상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없지만, 집은 우선 평상복처럼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손이많이 가지 않고, 아무 데서나 기댈 수 있고, 바닥에 누울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집에서 어디서든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고, 가족들이 어디선가 각자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그런집.
특히 제가 좋아하는 푸르스름한 하늘이 붉은 노을로 물들며 어두워지는 해 질 녘의 풍경을 잘 볼 수 있는 테라스라든가 큰 창이 있는집을 짓고 싶어요. 마당이 넓을 필요는 없고, 넓고 높은 방과 좁고 천장이 낮은 방이 함께 있는, 변화가 있는 공간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서울에 살아왔기 때문에, 전원주택보다는 서울 한복판복잡한 곳에 집을 지어 보고 싶어요. 넓은 땅이 아니어도 좋고, 가령층마다 식구들 방이 하나씩 있어도 재미있을 듯해요. 엘리베이터로각방을 오르내릴 수도 있고요.
제일 좋은 건 일하는 공간이 같이 있는 거에요. 가령 남산에 가면애니메이션센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만화의 집‘이 있어서 늘 만화를 편하게 볼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건축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축의 집‘을 1층에 두고, 2층은 사무실, 3층은 가정집이 들어서는 거죠.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품삯 한 푼 없이 이런노역에 동원된 겁니다. 바쁜 농사철에도 내 일을 젖혀 놓고 의무적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버지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세대를 이어서. 만약에 노역에 나가지 못할 경우 오히려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닦아놓자 시멘트 회사 사장이 포장을 하고 자기가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국민의 노동력과 국비로 지원을 받은 회사들이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아들은 "그런데도 데모 같은 거 안 해요?"라고 묻습니다. 부당한데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뜻이겠지요. 여기에 대해 아버지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으레 그래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따라야 하는 걸까요? 
지금은 아니라고 답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시기에는 전쟁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남과 북이 갈렸고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어요. 
게다가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주입된 패배 의식과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한 못난 놈이라는 자괴감도 있었고요.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독재 정권이 힘을 발휘한 겁니다. 박정희가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품삯 한 푼 없이 이런노역에 동원된 겁니다. 바쁜 농사철에도 내 일을 젖혀 놓고 의무적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버지는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세대를 이어서. 만약에 노역에 나가지 못할 경우 오히려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닦아놓자 시멘트 회사 사장이 포장을 하고 자기가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국민의 노동력과 국비로 지원을 받은 회사들이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아들은 "그런데도 데모 같은 거 안 해요?"라고 묻습니다. 부당한데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뜻이겠지요. 여기에 대해 아버지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으레 그래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따라야 하는 걸까요? 지금은 아니라고 답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시기에는 전쟁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남과 북이 갈렸고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어요. 게다가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주입된 패배 의식과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한 못난 놈이라는 자괴감도 있었고요.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독재 정권이 힘을 발휘한 겁니다. 박정희가

통일벼란 품종을 개량해서 정부에서 보급한 벼를 말해요. 토종 벼는 밥맛이 좋고 키가 커서 초가집 지붕을 엮기에 좋았지만 수확량이적었어요. 반면에 통일벼는 쌀 수확량은 많았지만 밥맛이 없고 키가작아 지붕을 엮기가 어려웠어요. 어머니는 정부에서 지붕을 개량하라고 보조금을 줘도 다른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지붕 개량이 힘들었지요. 다들 새로 집을 바꾸는데 어머니만 낡은 초가에서 살고 싶지는않았을 거예요.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인데도, 이장도 와서 권하고면에서도 누가 나와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으로 보아 지붕 개량사업을 획일적으로 강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관청에서는 실적을 높이려고 계속 어머니를 설득했던 모양입니다. 당시에는 실적이 좋은군수에게 상을 주기도 했지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 초가집은 가난의 상징이었어요.
따라서 부수어 없애 버리거나 바꾸어 버려야 할 대상이었지요. 초가집뿐만 아니라 전통의 생활용품과 살림살이 도구가 모두 그런 취급을 당했어요. 유기, 목기, 도자기, 가구 등이 고물장수에게 헐값으로팔려나가고, 그 대신 스테인리스, 비닐, 플라스틱, 함석 같은 재료로만든 상품이 밀려오던 시기입니다. 불과 30~40여 년만 지나도 그때마구 내다 버린 것이 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을, 국가가 나서서 우리 것은 열등하고 낙후한 것이니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제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알게 모르

게 패배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고, 권력으로 통치하기도 쉬워졌지요. 앞서 말했듯 새마을 운동을 벌이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도 잃어버리게 되었고요.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는지 동생이 저녁 먹은 것을 토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꺽다리 집‘으로 돌아오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춥지만 내 집이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어린 주인공은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요?
작가는 어린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백합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온 마을 주민을 동원해서 멀쩡한 집을 부수던 시절, 자기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노라고. 비록 어려서그랬다고는 하지만,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웅변대회 같은 행사에열심히 참가하여 새마을 운동 정신을 찬양하고 전파하는 데 이용당했던 자기가 부끄럽다고. 어쩌면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화상을 보여 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요즘도 밀어붙이기식 개발은 여전하잖아요. 계속되는 재개발로 인해 가난하지만 정겹고 소박하게 살아온 마을과 집을 잃은 서민 계층이 외곽으로, 더 먼 외곽으로 밀려나는 철거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어요. 재개발 지역 주민을 강제로 쫓아내려고 용역 깡패를 동원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용산 참사‘ 같은 비극이 생겼지요. 그렇게 내몰리는 사람들, 그들이 누구일까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이만큼 발전을 이룬 것은 낮은 곡식 가격으로 희생당한 농민과 낮은 임금으로고통받은 노동자 덕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홀대해서는 안 됩니다. 새마을 운동과 재개발 사업, 그리고 지금의 뉴타운은서민을 홀대해 온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재개발과 뉴타운의 문제는 또 있어요. 동네 자체를 밀어버리고 고

층 아파트를 지으면, 마을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람들뿐만 아니라동네 곳곳에 녹아 있던 삶의 흔적과 이야기가 함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온 공간에는 그 마을의 역사와 삶의 온기가 녹아있고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재개발 사업은 그런 이야기를순식간에 파괴해 버립니다. 그 지역과 연고가 없는 낯선 사람들이 입주하여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외딴 섬처럼 살아가요.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로부터 단절된 우리네 삶은 정신적으로 공허해지고 척박해집니다. 쓸쓸하고 외로워져요. 사회 전체가 고립감과 외로움으로가득 차게 되지요. 예전에 내가 살던 공간이 그대로 있고 거기에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외로울 때 친구가 있어주는 것처럼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고 마음이 따뜻해지겠지요. 대를이어 한 마을에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해요.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도 노인은 집이 팔려돌아갈 집이 없어도 걱정을 안 하거든요. 다만 "누구네 집 문간방"에살면 된다고 말하지요. 1970년대만 해도 이렇게 공동체가 살아 있었어요.
이렇게 보더라도 이제는 재개발이 아닌 보존이 필요해요. 지금 한옥마을 보존 지구에는 서울시에서 많은 돈을 지원해 주고 있어요. 저는 뉴타운을 만든다고 믿어 버릴 것이 아니라 달동네에도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달동네에 사는사람들은 그 동네의 역사와 삶의 다양한 모습과 그 동네의 이야기를유지해주잖아요. 우리 모두가 한옥이거나 아파트에만 사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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