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꽃은 숙명의 교화(校花)였다.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다니던 배지도 은방울꽃을 도안한 거였고, 교가도 은방울꽃의 수줍음과 향기를 찬양한 내용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하도 각박한시대에 입학을 해서 그런지 살아 있는 은방울꽃을 본 적은 없었다.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 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찌 될 것이며 나는 어찌될 것인가, 내가 지금의 이 상태에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같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 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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