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6명 을 인터뷰한 1년을 통하여
인생의 깨달음에 대하여 기록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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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대장부

망령된 말이라면 종일토록 입 밖에 내지 않고 망령된 생각이라면 죽는 날까지 떠올리지 않는다면, 비록 남들이 그를 일러 대장부라 부르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일러 대장부라 말할 것이다.
조급하고 망령된 생각을 오래도록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절로 꽃이 필 것이고,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오래도록 입에 담지 않는다면 절로 향기가 날 것이다.


서쪽 문 위에 써 붙여 두었다는 잠언 (箴言) 형식의 짧은 글이다. 이덕무는 이 글을 문 위에 붙여 두고 그것을 자기 삶의 규율로 삼았을 터이다. 마지막 문장이 참 맑고 담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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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헐뜯지 말라

입에 올리는 사람마다 헐뜯어 그의 입에 온전한 사람이 없는 자는 결코 길한 사람이 아니다.
(《일득록》13, 인물3)

함부로 말하는 자신을 탓하라

언어로 한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미천한 마부에게라도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일) 15. 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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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 11월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1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는데, 국어 교사이자 젊은 소설가였던 아버지가 수도에서 글만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며 직장을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 검푸른 기와를 올리고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하얀 종이가 발라진 정든 한옥을 떠나,
서울 외곽의 수유리 언덕에 있는 양옥집으로 옮겨갔다. 가족 모두가 새로운 삶에 차츰 적응해 가던 5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 전해인 1979년 10월, 십팔 년 동안의 군부 독재를 이끌었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 그 시기를 틈타 또 한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마침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사소하고 다소 즉흥적인 이유로 나의 가족이 떠나온 도시, 내가 태어나 유

년을 보낸 바로 그곳, 그때까지 그저 작고 평범한 교육 도시였을뿐인 그곳에서 계엄에 불복종하는 항쟁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날인 5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오후 한시, 수많은 시위 군중들이 모인 도청 앞 광장에서 군대는 집단발포를 했고, 이후 생존을 위해 시민들이 무장하며 ‘광주 공동체‘가 태어났다. 짧고 평화로웠던 시민 자치가 이루어지던 도청으로,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되돌아온 것은 5월 27일 새벽이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한 다른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폭동이자 내란으로 이해했다. 그리나 나의 가족은 광주에 친지와 친척, 친구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 일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학살이자 항쟁이었던 그 열흘의 시간. 평범한 사람들이 총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나누고, 무고하게 살해된 자들을 위한 장례를 날마다 함께 치르며 버텼던 절대공동체 

어른들은 우리 남매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서 절대로 그린 말을 하면 안 된다.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 
그렇게 그 일은 나에게 영영 숨겨야 할지도 모를 무거운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후 이 년이 흐른 1982년, 아버지가 광주에서 사진집 한 권을 가져왔다. 증언을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만들어 유동시켰던 책이었다. 이때의 기억을 나는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 사진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 넌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 어른들끼리 사진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렸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므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밭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지, 검으로 깊게 내리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나의 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

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빵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일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칼이 서서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 ‘사자왕 칼‘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일인칭 화자인 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으므로, 처음부터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그를 이해했다. 
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까지.

거기에 더해, 칼이 관찰하는 독재자 일의 모습. 그가 조종하는 살인의 화신 카라, 그에 맞서 연약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과정

이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결국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반군의 지도자 오르바르만은 옳지 않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감과 폭력의 기억으로 그늘진 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세계, 낭기얼라에서 소년들이 다시 죽음의 형식으로 함께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그후 삼십여 년이 흘러, 오슬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다시 완독한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해왔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그로부터 삼 년 뒤 읽은 이 책에서 두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겪는 소년들에게로 연결되어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마치 운명의 실에 묶인 듯. 현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불투명한 벽을 단번에 관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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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알파벳 외에 완벽한 문자 체계를 하나 더 꼽는다면, 혜안을 가진 통치자 세종대왕이 15세기에 창제한 한글을 들 수 있다. 
당시백성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자 체계를 배우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은 누구든지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구어를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형태로 옮겨 놓은 고도의 규칙성을 가진 알파벳 설계에 착수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매뉴얼을 작성한 학자가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다 배울 수 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보다 많은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게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목표는 성공적이었다. 한글은 몇가지 중요한 언어학적 특성으로 볼 때 배우기가 매우 쉽다.

첫째, 한국어 구어는 단순 음절과 음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겹자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하나가 곧 음절이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매

우 특이하다. 한글에서는 2~4개의 문자화된 음소가 사각의 틀 안에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글자들은 좌우, 상하. 어느 방향으로든 배열되고 읽힐 수 있다. 
이렇듯 음절이 시각화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쉽고 보다 큰(보다 굵은) 언어의 단위를 배우게 된다. 
둘째,
멜버른 대학의 김지선과 크리스 데이비스(Chris Davis)가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한글은 10개의 기본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이냐 자음이냐에 따라 형태가 차별화된다. 
셋째, 한글의 자음문자는 조음되는 발음기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영어와 달리 한글은 문자와 음성이 매우 ‘투명한‘ 대응 관계를 이룬다. 훈민정음(원문에는 ‘한글‘로 되어있음-옮긴이) 창제 당시에는 상징과 말소리 사이에 거의 완벽한 대응관계가 성립했으나 구어가 진화함에 따라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부 단어의 철자에 고어와의 연관 관계가 반영되는 일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성이 멋지게 결합된 한글은 무엇보다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매우 쉽게 학습할 수 있는 문자 체계다.

이제 다시 고대 그리스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대목에서 인지과학자와 언어학자들이 미스터리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이 장에서 제기하는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항변, 플라톤의 말없는 반항.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소크라테스 자신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설명되어 있는 이유에 따르면,
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과정을 단락()시켜 지혜에 대한 거짓 자만심을 가진제자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누스바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 세계가 구어 교육에서독서의 습관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드릭 케년 경

수수한 옷을 입고 소박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라는 이름의 고귀하지만 나태한 말의 잔등을 ‘콕콕 찌르는 등에 (gadfly)‘라고 칭한 남자. 퉁방울눈에 불룩 튀어나온 이마, 독특한 외모를 지닌 그 남자는 안마당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지식 그리고 ‘내성(內省)하는 삶(examined life)‘의 깊은 중요성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아테네의젊은이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평생 동안 ‘진실‘을 성찰해야 한다면서 눈부시게 설득력 있는 훈계를 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철학자이자 스승 그리고 아테네의 시민 소크라테스다.
나는 독서하는 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2000년도 더 된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문식성에 반대하며 제기한 문제들이 21세기 초의 걱정거리와 거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구선 문화가 문자문화로 바뀌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걱정하던 내용이나 현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근심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문자가 디지털 및 비주얼 문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일종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 못지않게 비범한 또 하나의 문화가 주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른 새로운 모드로 불확실한 전환을 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21세기의 구술 언어와 문자 언어의 위상을 점검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사상가로 ‘등에‘와 그 제자들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제되지 않은 문자 언어의 전파를 통렬히 비난했다. 
플라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문자 언어를 사용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구술 대화를 기록했다. 
그리고 세사람 중 연배가 가장 낮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독서 습관‘에 몰입해 있었다.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의 명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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