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알파벳 외에 완벽한 문자 체계를 하나 더 꼽는다면, 혜안을 가진 통치자 세종대왕이 15세기에 창제한 한글을 들 수 있다. 당시백성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자 체계를 배우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은 누구든지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구어를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형태로 옮겨 놓은 고도의 규칙성을 가진 알파벳 설계에 착수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매뉴얼을 작성한 학자가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다 배울 수 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보다 많은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게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목표는 성공적이었다. 한글은 몇가지 중요한 언어학적 특성으로 볼 때 배우기가 매우 쉽다.
첫째, 한국어 구어는 단순 음절과 음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겹자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하나가 곧 음절이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매
우 특이하다. 한글에서는 2~4개의 문자화된 음소가 사각의 틀 안에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글자들은 좌우, 상하. 어느 방향으로든 배열되고 읽힐 수 있다. 이렇듯 음절이 시각화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쉽고 보다 큰(보다 굵은) 언어의 단위를 배우게 된다. 둘째, 멜버른 대학의 김지선과 크리스 데이비스(Chris Davis)가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한글은 10개의 기본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이냐 자음이냐에 따라 형태가 차별화된다. 셋째, 한글의 자음문자는 조음되는 발음기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영어와 달리 한글은 문자와 음성이 매우 ‘투명한‘ 대응 관계를 이룬다. 훈민정음(원문에는 ‘한글‘로 되어있음-옮긴이) 창제 당시에는 상징과 말소리 사이에 거의 완벽한 대응관계가 성립했으나 구어가 진화함에 따라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부 단어의 철자에 고어와의 연관 관계가 반영되는 일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성이 멋지게 결합된 한글은 무엇보다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매우 쉽게 학습할 수 있는 문자 체계다.
이제 다시 고대 그리스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대목에서 인지과학자와 언어학자들이 미스터리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이 장에서 제기하는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항변, 플라톤의 말없는 반항.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소크라테스 자신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설명되어 있는 이유에 따르면, 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과정을 단락()시켜 지혜에 대한 거짓 자만심을 가진제자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누스바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 세계가 구어 교육에서독서의 습관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드릭 케년 경
수수한 옷을 입고 소박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라는 이름의 고귀하지만 나태한 말의 잔등을 ‘콕콕 찌르는 등에 (gadfly)‘라고 칭한 남자. 퉁방울눈에 불룩 튀어나온 이마, 독특한 외모를 지닌 그 남자는 안마당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지식 그리고 ‘내성(內省)하는 삶(examined life)‘의 깊은 중요성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아테네의젊은이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평생 동안 ‘진실‘을 성찰해야 한다면서 눈부시게 설득력 있는 훈계를 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철학자이자 스승 그리고 아테네의 시민 소크라테스다. 나는 독서하는 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2000년도 더 된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문식성에 반대하며 제기한 문제들이 21세기 초의 걱정거리와 거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구선 문화가 문자문화로 바뀌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걱정하던 내용이나 현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근심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문자가 디지털 및 비주얼 문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일종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 못지않게 비범한 또 하나의 문화가 주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른 새로운 모드로 불확실한 전환을 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21세기의 구술 언어와 문자 언어의 위상을 점검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사상가로 ‘등에‘와 그 제자들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제되지 않은 문자 언어의 전파를 통렬히 비난했다. 플라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문자 언어를 사용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구술 대화를 기록했다. 그리고 세사람 중 연배가 가장 낮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독서 습관‘에 몰입해 있었다.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의 명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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