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집 거위가 야생 거위를 만나 도망갔다가 새끼를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본 적도 있고, 야생 거위의 행동에 대해 철새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언어를 사용해서 자연에 대한 지식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작가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는 후에 닐스의 모험을 장 드 라퐁텐 Jean de La Fontaine의 우화나 앙투안 드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 The LittlePrince』와 동급의 고전이라고 평가했다.
내 눈에 닐스의 날개 달린 친구들은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빛을 발한다. 새는 현실 속에서도동화 같은 존재이다. 종이에 적힌 글자만큼 가벼운 데다놀라운 감각을 가진 덕분에 폭풍우가 치는 바다와 광대한 대륙을 건너 원하는 장소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지않은가.
새의 비행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은 욕심을 품은적이 있었다. 그래서 꽤 더웠던 어느 9월 저녁에 나는 베멘회이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닐스가 모험을시작한 바로 그곳이었다. 텐트, 그리고 새처럼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줄 별자리 지도가 그려진 우산도 챙겼다. 최종 목적지는 철새가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팔스터보 해안이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어두웠지만, 등대에서 비치는 불빛 덕분에 풀이 짧으면서도 수평선이 가까운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내 텐트 위에서 부드럽게 웅

모든 것을 감안하면 벌의 춤은 향기로우면서 수학적인 언어이고, 시와 토지 측량술을 결합한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수학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하고 정확하며 꼭 필요한 것만 남긴 채 압축되는 반면 시에서는 감각적 연상과 암시적 표현을 통해 많은 것을 담아낸다. 

말하지 않은 말은 말 사이의 긴장감을 자아내서 꽃과 벌의 관계에서처럼 떨림이 만들어진다. 벌의 춤은 꽃에서부터 시작해 바람과 주변 환경의 중요한 정보를 모두 아우르는 완벽하고도 자연스러운 소통 방식이다. 이 모든 것이 시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춤은 함께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한 마리의 벌이라도 도움이나 격려를 원하면 특정냄새나 페로몬을 사용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요구를 전할수 있다. 이런 식의 즉각적 호소에서 언어가 시작된 것이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어는성원이 일정 수를 이루거나 그들이 함께 생활할 때 발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더불어 일할 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벌은 장엄하고 독특한 언어가 만들어질 수있는 과정 중 하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벌의 언어를 발견한 것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폰프리슈는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동물 행동학을연구한 로렌츠와 틴베르헌과 공동 수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가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추축했고 그 추측은 맞은 듯하다. 현대의 과학자는 짜증이나 경고, 전투 신호를 전달하는 물고기 소리를 해석할 줄알게 되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다른 위치에놓거나 몸의 색깔 혹은 무늬를 변화시키는 등의 보디랭귀지로도 다양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어떤 물고기는 심지어 자신의 종, 나이, 성적 성숙도, 성격 등을 잠재적 짝짓기 상대에게 알리는 전기장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지구상에 사는 생물의 98퍼센트가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방법을 간과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세상과 우리를 분리하는 유일한 것은 얇은 물 한 겹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물 표면 아래에는 광범위한 음파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솔로, 듀엣, 합창 등의 멜로디가 이음파에 실려 전해진다. 새와 마찬가지로 수컷 물고기도새벽 여명과 저녁 황혼 무렵에 암컷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어린 대구가 먹고 자라는 망둑어류는 암컷이 수컷의노래를 듣기 전까지 짝짓기를 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인간이 오락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모터보트와 수상 스포츠 기구들이 내는 큰 소리 때문에 망둑어의 노랫

마치 일어날 일을 예상할수 있기라도 한 듯,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녀석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길을 가다가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있다. 예전에 나는 노루가 두 개의 철사 선 사이로 몸을정확히 날려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녀석은 자기 몸이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순식간에 계산했을 것이다. 야생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온 세상이 담긴다.
그렇다, 새끼 여우는 배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고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그 배움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스크류드라이버를 가지러 목공용 헛간에 슬쩍 들어갔다. 그때 마루 밑 공간에서 서로 다투면서 무엇인가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잘 정돈된 연장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내 발 바로 아래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잠재력을 흥미롭게 시험하는 듯했다.

창고는 놀이더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로프가 몇 개나와 있었는데, 새끼 여우들이 여러 로프의 길이를 측정해보거나 아니면 줄다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고밖에 볼 수없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여우들

최초의 원자들이 움직이며 발생한 진동은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소위 컴퓨터의 <플리커 잡음>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항성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라 지구의 물길과 바람, 자연재해, 심지어 주식 시장의 변동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살아 있는 생물들 사이에서도 서로 연관된 소리 패턴이 존재한다. 

긴팔원숭이의 노래를 2배속으로 들으면 새소리처럼 들리고 더 느린 속도로 들으면 고래 소리처럼 들린다. 음파를 그려 보면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인다. 가지가 나무를 닮은 모양으로 자라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단지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이다.

한편 속도는 생물종 사이의 또 다른 차이도 보완해 준다. 벌은 1초 사이에 내가 볼 수 있는 것보다 1백 배나 빠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신진대사가 빠른 작은 동물은 큰 동물보다 더 높은 밀도로 세상을 감각한다. 작은 명금류와 쥐의 심장은 1분에 6백 번이나 뛰기 때문에 바람결에 떨리는 이파리처럼 파닥이는 반면 고래의 심장은1백 배나 느리다. 결국 평생 뛰는 심장 박동 수는 작은 동물이나 큰 동물이 모두 비슷해진다.

이 숫자들은 박자표의 기능을 하는 것일까? 곤충이 십육분음표, 포유류가 사분음표로 움직인다면 터벅거리는오소리의 발걸음은 온음표일 것이다. 모든 동물은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음악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발밑에는 지구의 중심에서부터 자기장으로 울려 퍼지는로미

그러나 매우 오랫동안 그는 사람들에게서 밀려오는후각 정보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 분자는 가장 오래된 삶과 생명의 표현법일까? 동물 세계의 페로몬처럼 냄새는 희석되지 않은 생명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수백만 년 동안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어 왔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냄새로엄마의 젖을 찾고 나쁜 냄새를 통해 음식이 썩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멀리 떨어진 경우에도 냄새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알 수 있다. 나에게 다가오는동물이 잠재적인 포식자일까. 먹이일까, 짝짓기 상대일까? 존재 하나하나를 수십만 개의 분자가 둘러싸서 그 개체만의 독특한 냄새를 형성한다.

냄새가 종의 경계를 넘어서면 그 해석이 더 다양해진다. 침엽수림의 향기로운 냄새는 테르펜을 함유하고 있어서 미생물을 억제한다. 진드기, 나방, 벼룩이 라벤더를 싫어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간과 벌은 같은 향기를 좋아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꽃향기를 빌려 향수를 만든다. 나비가 장미 향을 내면서 짝짓기 상대를 유혹하는 일과 비슷하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꽃잎, 과일 껍질, 씨앗, 이파리 등으로 향수를 만들었고 심지어 뿌리와나무껍질도 사용해 왔다. 이 무형의 에센스는 음악의 음조처럼 만들어지는데 베이스 노트, 하트 노트, 톱 노트라는 향수 용어만 보아도 그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의 한 향수 제조업자는 다장조 음계 전체에 해당하는

향기를 만들었는데, D는 바이올렛, E는 아카시아. F는 월하향, G는 오렌지꽃, A는 막 자른 건초, B는 개사철쑥, C는 녹나무였다. 다른 꽃향기로 또 다른 음계를 만들 수도 있다. 

음악의 세계만큼 향기의 세계에도 다양한 변주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톱 노트는 코에 제일 먼저 감지가 되고 가장 먼저 사라지는 향기다. 하트 노트는 재스민과 장미 향부터 말린 정향 향기까지 다양하다. 베이스 노트에는 해변이나 비 온뒤의 숲과 비슷한 향기가 나는 마른 떡갈나무 등이 사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베이스 노트는 백단유 향기다. 샌들우드라고도 부르는 백단향에서 나오는 오일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동시에 관능적으로 흥분시키는 효과를 낸다. 나무 에센스는 따뜻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용연향 같은 동물적인 베이스노트도 있다. 용연향은 한때 황금이나 노예만큼 진귀한 대우를 받은 신비로운 에센스다. 깊은 바다에서 온 용연향은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물질은 원래 향유고래의 위에서 소화되지 않고 남아 있던 두족류의 뼈가풍부한 지방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배설된 것으로 보통해변에서 발견된다.
은은하든 화려하든, 차분하는 흥분을 시키든지 간에 향수의 향기는 생명이 용솟음치고 흐르는 다양한 곳에서 채취를 한다. 

삶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듯, 향기도 서서히변화하고 사라지기는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향기

사람들이 서로다른 생물종 사이에 세운 벽은 애초에 가르지 않아야 할것들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 집벽은 개미와 벌이 단열을 해주고 있었으며, 우리 집 천장은 새집의 바닥이고 우리 집 바닥은 여우 집의 천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가지 질문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모든 유기체가 어떻게 무너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전체를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나는 수많은 점을 찍어 형상을 묘사하는 점묘화와 컴퓨터 화면의 화소를 떠올렸다. 점이 많을수록 그림이 더 선명해지는 이유는 각각의 점이 색이나 세부 사항을 명확히 만드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서사로 잇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이야기에서는 모든 사건이 하나의 시점을 중심으로 벌어지지만, 지구상에 생명이 충만해지게 된 사건은 그런 식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미술 수업 시간에 나는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황금 비율을 사용해서 원근감을 주는 기법을 배웠다. 놀랍게도 자연에서도 똑같은 비율을찾을 수 있다. 작가 페테르 닐손Peter Nilson은 달팽이, 솔방울, 해바라기에서 황금 비율을 찾아냈다. 자연과 예술이 비슷한 규칙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닐손은 우주의 형태와 음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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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아이린의 말은 다급하고 절박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그녀가 저지른 잘못이 사라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자 치장하고 감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이목에만 신경 쓰는 아이린의 이런태도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삶은 행복해질까, 불행해질까? 몸속에 품은 잔가시마지 내비치는 유리메기처럼 우리의 몸도 마음도 투명해져서 깊은 곳에감추어둔 생각들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가리고 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창피해서, 상처를 줄까 봐, 원망을 들을까 봐 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시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처럼, 켜켜이 쌓은 

마틴 슐레스케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운 이래 평생 바이올린 곁에 머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바이올린 장인이 되어 뮌헨의 작업장에서 현악기들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어떤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죽었다. 그저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따름이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이 구절에서 영향을 받은 마틴 슐레스케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동안 그에게 떠오른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얻게 된내적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커스의 비극적인 죽음은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는 일조차 번번이 실패하는 우리가 말이다.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소설과 소설가의 삶에 대해서이야기를 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몇몇 후배들이따라오더니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용기가 어디에서났느냐고 묻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사회의 시선이나 압력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줄 만큼 나 스스로 잘 살고 있는지는 좀처럼 모르겠고, 내가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예술가상에 걸맞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답을 구하는 후배들의 눈빛이 간절해 보여 나는 고민 끝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라고 답한다. 다른 이들의 아우성에 가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불안과 두려움의 파도에 쉬게 휩쓸려버리는 시기가 이십 대이기도 하니까.

다른 소설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구상과 퇴고의 단계이다. 

가장싫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초고를 만드는 단계, 초고를 쓸때 나는 바람의 압력을 이겨내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이다. 가까스로 방향을 잡고 팔을 내저어봤자, 내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자주 낙담하고 또 낙담하는 비운의 표류자, 인물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번에 가주는 법이 없고, 몇 번이나 상상했던 근사한 장면조차 언어의 옷을 입혀놓으면 내 머릿속의 그것과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내가 써놓은 것과 쓰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울 때면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떠올린다.

언어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뒤늦게 얻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상실의 자리만 있을 뿐 다른 자리는없어요. 언어는 항상 인류를 저버리고 떠나는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경험입니다. *

설을 나는 어쩌면 끝끝내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소설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모르겠지만, 어쩌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 물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어딘가에 가닿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필사적으로, 한동안은 더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허구적 에세이다.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이 작품의 화자인 아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와사랑에 빠져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어느 날 정부가 생겼다고 고백한 뒤 그녀를 떠난다.
파국으로 끝나는 사랑을 그린 이 글은 언뜻 보면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는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슬프고 열정적인 탱고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앤 카슨의 시적인 문장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오븐 온도나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가 생기기만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의 껍질을 굽듯,
작가가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고/ 외과의사들은 말한다./ 집에 불이 다 꺼져 있어도/상처에서 나오는 빛으로/ 붕대를 감을 수 있다"거나 
"그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모든 곳에서 그녀를 찾아다녔다./그의 상상력의 빈곤을 통하여, 슬픔 속에서, 참호에서늦겨울 숲 속 멀리서 / 사슴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같은 문장들은 파멸에 이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어지러움만 남기고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지독한 달콤함처럼, 어떤 아름다움

탓에 신도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화해나 스펙터클한 모험, 마법처럼 신비로운 환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 대신, 언젠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먹어본 팬케이크를 연상시키는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던 파란 지붕의 프랜차이즈 식당. 그곳에서 팔던투박한 팬케이크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슬픔인 듯,
기쁨인 듯 입안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담담하고 부드러운 삶의 조각들은 소설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사람들은 뜻하지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만, 또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겠지만, 어둠을 밝히는 다정한 불빛들이 있는 한 길을 잃었던 어린 소녀가 무탈하게 집을 찾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축복』은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는 일상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몫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일본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흔한 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까닭은 그런 빵을 나눠 먹고 싶은 일본인 친구가 최근 생겼기 때문이다. 
단편적인것의 사회학』의 저자인 기시 마사히코가 바로 그 친구다.
친구라고 말해봤자 사실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몇 장 읽자마자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때문에.
우리 사회학자가 할 일은 남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그러한 폭력과 무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학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회학자 각 개인의 과제일 테지만.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문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서성이는 사람이었다. 사회학을 무척 좋아했으면서도 타인의삶을 분석하고 판단할 자신이 없어 결국엔 문학을 택했

막으로 쓴 동명의 소설집에 실려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라와 그녀의 가족은 가든파티 준비로 분주하다. ‘가든파티‘라는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백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고 푸른 잔디마저 반짝이는 더없이 완벽한 날에 정원 한가운데 차려진 티파티 테이블이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리고 3층으로 이뤄진 은식기 위에 샌드위치와 머랭 쉘 같은 것이 올라가 있는 근사한 티 테이블, 파티를 기다리는 로라의 마음은 파티를 위해 주문한 유명 제과점의 달콤한 슈크림빵처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아랫동네에 사는 짐꾼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들뜬 로라의 마음에는 어둠이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불행을 겪고 있는데 파티를 예정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로라의 마음에 싹터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와 엄마는 그런 로라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다며 비웃는다. 그리고 예정대로 열린 가든파티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을 때,
엄마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딸에게 파티에 쓰고 남은 음식들을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로라는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옳지 않

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음식을 갖고 가난한 동네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가든파티」는 소녀의 시선을 빌려 짧은 분량 안에 계급의식과 타인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점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움켜쥔 장면은 끄트머리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자아내는 망자의 얼굴을 본 로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늦게 돌아오는 로라를 마중 나온 오빠는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끔찍했니?" 하고 동생에게묻는다.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경이로웠어. 그렇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이란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응?" 로리가 말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제임스 설터가 말년에 대학에서 한 강연과 인터뷰를 묶었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어떤 작가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그려내온 설터의 소설 쓰기 비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는 누구나 설터처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매뉴얼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설터에게 소설이 상상력의 산물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삶에서 비롯한 글이기 때문이다. 삶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진실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한다면,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설터 같은 대가에게도 자신의 글에 확신이 없던 시절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가해한 것인 한소설 쓰기 작업 역시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면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라고 설터는 조언한다.
온 마음을 다해 쓴 소설을 투고하고 거절당하기를

쓰리는 사람처럼"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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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기간제 교장‘
짱구쌤의 티타임

이장규 용방초등학교 교장


"왜? 오늘 표정이 안 좋네. 숙제 안 했니? 걱정하지마, 담임선생님이 설마 어떻게 하겠냐? 얼굴 펴, 급식이 마라탕이래!"
아침 교문맞이, 기간제 교장이 하루 일을 시작한다. 첫 통학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클래식 음악이흘러나오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교문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요즘 같은 추운 날엔 눈만 빼꼼한 중무장에 쉼 없이 제자리 걷기를 반복하며 체온을 유지하는게 상책이다. 70여명 아이가 모두 등교할 때까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매일 아침맞이를 하는 것은,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는 오랜바람의 실천이다.
나는 전남 구례에서 일하는 3년 차 내부형 공모교

장이다. 공모를 통해 교사에서 바로 교장이 된, 이른바
‘무자격 교장‘이다. 

기존 승진 체제(교사 교감 교장)에 변화를 주기 위해 도입된 내부형 공모 교장제는 새로운리더십을 구축해 민주적인 학교문화를 형성했다는 평가와 함께 승진 구조 와해, 특정 교원단체의 전유물 등비판도 받아가며 벌써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전남•전체 학교의 2퍼센트 정도가 시행 중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나를 ‘짱구쌤‘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교장의 권위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버릇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런 기우는 접으시라. 아이들은누구보다 사리분별을 잘한다. 내 이름과 외모에서 나온 ‘짱구쌤‘ 별명은 아이들과 거리를 가깝게 하는 마법의 힘이 있다. 2교시를 마치면 ‘누구나 교장실에서 예약한 아이들과 우아하게 차를 마신다. 남자친구, 케이팝, 수업 이야기 등이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난 그냥함께 차를 마시며 웃어주면 된다. "짱구쌤, 오늘은 무슨 차예요. 김칫국물 맛이 나네요." "보이차야." "그럼남자만 마셔요?"
일주일에 네시간 정도 수업을 한다. 30년간 해오던 일이니 교장이 됐다고 관둘 이유는 없었다. 담임들과 교과와 시간을 협의해 체육, 국어, 실과, 창체(창의적체험활동)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한다. 놀이, 실내화 빨

기, 서시천 산책하기, 그림책 읽어주기, 자전거 타기등 재미와 의미를 함께 추구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우리 학교 대표 교육활동 중 하나인 ‘섬진강 자전거 마라톤‘에서 1학년 아이들의 완주를 지도했다. 아이들과 함께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다. 수업을 통해 내가 배우며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또 교실과 학생들을 가장 잘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교사들의 어려움도잊지 않게 된다.
제주도의 그림책 작가 니카는 "해녀는 페미니스트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강인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짱구쌤은 이렇게 말하고싶다. "교사는 휴머니스트다. 그들은 아이들의 오늘과내일을 믿는다.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사실 평교사 시절, 내가 휴머니스트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교장이 교실의 교육력을 믿고 전적으로 지원하면 아이들과 교사는 배움과 열정으로 화답한다.
학교 안에 있는 어른은 모두 선생님이다. 수업하는 교사뿐 아니라 교무실과 행정실, 급식과 안전을 담당하는 모든 교직원은 아이들의 선생님이다. 그래서우리는 성장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모든 교직원과 전

문적 학습공동체를 만들어 학교 건축, 생태교육을 공부하며 함께 성장해나간다. 정기적인 수업 공개(나눔)를 통해 자기 수업과 교실을 열고, 교사의 교수법을 넘어 아이들의 배움을 이야기한다. 교장은 꼼꼼하게 아이들을 관찰해 어려운 부분을 지원해주면 된다. 우리가 세운 목표를 다 이룰 수 없다고 해도 어제보다 더나은 사람은 될 수 있다.
운동장 너머에 노고단이 보이고 울타리를 따라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은 행운이다. 2년 뒤에는 그 풍경에 딱 어울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가 다시 지어진다. 긴 복도와 사각형 교실에서 벗어나, 천창과 거실, 툇마루가 있는 목조 지붕의 아늑한 학교가 탄생한다. 지난 30년 교사로 살면서 꿈꿨던 학교 건축에 관해 동료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2년 동안 모든 용방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설계했다. 어떤 뛰어난 개인도 집단지성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믿음으로. 10년 전, 열일곱명의 폐교 위기에서 지금에 이르렀듯, 우리 학교는 소멸의 위기를 넘어 계속 나아갈 것이다.
훌륭한 교사가 훌륭한 교장이 된다고 믿는다. 여러 평가 속에서도 교사에게 공모 교장의 기회를 주는제도가 존속돼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격증에 기

대지 않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닫는 글을 대신하여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노회찬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 구로구 가로수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두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네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네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네시 5분경에 출발하는 두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되고 버스 안 복도길까지 사람들이 한명 한명 바닥에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거의 다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 타시는 분들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새벽 다섯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탑니다. 한명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 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흘러서 아침 출근시간이 되고낮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퇴근길에도이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새벽 네시와 네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다섯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위에 올

라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물세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다섯분도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노회찬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만들어가는 이 진보정의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

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진보정의당의 공동대표로 이 부족한 사람을 선출해주신 데대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수락하고자 합니다. 저는 진보정의당이 존재하는 그 시간까지, 그리고 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동안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심상정 후보를 앞장세운 진보적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모든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이 진보정의당을 세우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겠습니다.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연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한다. "노회찬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얘기할까?" 그와의 알량한 인연을 앞세워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아니, 사실은 굳이 답을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 글쓴이들은그 삶 속에서 이미 노회찬의 대답을 듣고 있다. 하나하나의 글들 속에서 노회찬을 발견한다. 글쓴이들이 모두 노회찬이다.
손석희 언론인

노회찬의 은유적 언변에 담긴 해학은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평생 민중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이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거침없는 표현을 품위를 담아 우아하게 사용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치인 노회찬이 응시해온 ‘존재하되 우리가 그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 쓴 이야기를 통해 정치가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정우성 배우

나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노동에 기대어 하루를 살아간다. 농민의 노동으로 밥을 먹고, 유튜브 크리에이터의노동으로 정보를 얻고, 택배노동자의 노동으로 편안하게 집에서 물건을 받는다. 여기, 나를 살게 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묻는다. 대체 나의노동은 얼마짜리입니까? 노회찬은 말했다. 같이 살자고, 같이 잘 살자고! 주 52시간 노동이 흔들리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믿고 싶다. 노회찬의 절절한 꿈이 우리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용암처럼 솟구칠 그날을 기다리며 들끓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노회찬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거라고.
정지아 소설가

명절을 맞아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려고 아파트 현관 청소하시는분께 여쭤봤다. "한 동에 모두 몇분이 일하세요?" 어머니뻘인 그분이답하신다. "나 혼자 네 동 담당하는데요." 아무 말도 못한 채 현관을 나와 길을 걸으며 가슴이 미어졌다. 이 책은 우리 곁에 살아가지만 잘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기록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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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언덕의 섬‘이라는 뜻을 가진 매나해타가 공식적으로 서양의 도시가 된 것은초기의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단돈 60길더를 주고 섬을 사들인 1626년의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뉴욕은 유럽과 신대륙을 잇는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그런 곳을 사유 재산이 뭔지도 모르는 아메리칸인디언을 상대로 그렇게 해결하다니, 어쩐지 도둑놈 일대기 같은 뉴욕 역사의 첫 페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영국인이 점령한 뉴욕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했고, 1811년 야심 차게 정비된 12개의 애버뉴 avenue, 남북으로 연결된 도로와 152개의 스트리트 Istreet,
동서로 연결된 도로, 가는 뉴욕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 바둑판무늬 계획은 당시 마구 오르기 시작한 투기 일풍을 반영한 것인데, 이런 도시 형태가 부동산을 사고팔고 이윤을 남기는데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벌한 도시계획 속에서도 살아남은 길이 하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인디언이 다니던 길.
바로 브로드웨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오직 이 브로드웨이만이 겁도 없이 격자무늬의 맨해튼을 사선으로 지른다.

1851년부터 구상된 센트럴 파크가 들어서면서 맨해튼은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현재 맨해튼은 센트럴 파크 바로 아래 미드타운  Midtown, 
섬의 최남단에 위치한 로어맨해튼! Lower Manhattanl. 
센트럴 파크 동쪽의 어퍼이스트사이드 IUpper East Sidel. 
서쪽의 어퍼웨스트사이드 Upper West Sidel
그리고 북쪽의 할렘  Harleml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내가 묵고 있는 헤럴드스퀘어 호텔은 미드타운 34번가에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 1931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오래동안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9.11 테러로 세계 무역센터 빌딩이다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다.

플랫아이언 빌딩 Farron Building 1902년에 세워진 이 빌딩도 당시에는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우아한프렌치레상스 양식의 건물이 좁은 삼각 지대에 전기다리미처럼 들어선보습이다. 그래서 이름이 플랫아이언이다. 그러나 이 건물을 보면서 맨 처음오른 것은 전기다리미가 아니라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하고 있는 나의가난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었다.

울워스 빌딩 Woolworth Building 장엄한 고딕 양식의 이 빌딩은 영화<본 콜렉터>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장소로 잠깐 나온다. 일본의 100엔 숍처럼 모든상품을 10센트에 파는 상점을 만들어낸 F. 울워스의 의뢰로 세워졌다.

뉴욕에 남은 부호들의

철강왕 카네기와 카네기 홀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말을남긴A 카네기(Andrew Camiegel는 철도회사에서 일하면서 곧 다가올 강철시대를예견하여 제강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은퇴 후 상당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카네기는 특히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미국 전역에는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2,500여 개나 이른다. 1891년에 개장해 수많은 명연주자를 탄생시킨꿈의 무대, 뉴욕의 카네기 홀도 그의 기부로 개축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됐다.

석유왕 록펠러와 록펠러 센터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한 미국의 석유왕J. D.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역시 카네기에 버금가는 재력과 기부로유명한 인물이다. 1947년에 세워진 빌딩단지 록펠러 센터의 프로메테우스 동상과 아이스링크는 뉴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영화 등에서 익숙하게 봤을 법한장소다.

금융 재벌 모건과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 
거래의 천재‘, ‘월스트리트의제왕 등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모건은 전설적인 미국의 금융재벌이다. J. P. 모건 John Pierpont Morganl은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투자전문가면서 대기업 합병에도 관여했었는데, 미국의 대공황 때는 은행가들을 설득해 구제금융을 마련하기도 했다. 실은 자택 도서관에 거부들을 모아놓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겠다고 했단다. 매디슨애버뉴에 있는 피어폰트크건 도서관은 모건의 대저택 일부분으로, 그가 소장했던 가치 있는 문화재를

인종의 샐러드볼이 된 도시

먼저 자리를 잡고 머릿수가 많은 것이 최고라는 간단한 법칙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듯하다. 

처음 뉴욕에 도착한 사람들은 WASPI White, Anglo-Saxon,
Protestant 그러니까 백인이고 영국계이며 신교도였다. 1880년대까지 뉴욕이민의 주류를 이루던 외국인은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다. 그 후 이탈리아인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자, 토박이에게 멸시받던 아일랜드이민자는 뒤늦게 들어온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을 무진장 박대하기 시작했다.

뉴욕은 수많은 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지만 그들은 절대 섞이지 않고끼리끼리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고수한다. 
관광객의 눈으로도뉴요커는 대부분 같은 민족끼리 어울린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공존할 뿐,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낯선 민족적 풍경은 오히려 뉴욕의 볼거리가 되었다. 
현재 맨해튼지도에서 가장 돋보이는 민족 거리는 
리틀이탈리아  Little Italy‘와 차이나타운 I Chinatown‘이다. 
옛 아일랜드 구역에 이탈리아인이 들어오면서 그곳은 작은 이탈리아가 됐는데, 그들은 그곳에서조차 지방별로 나뉘어 살았다.
나폴리 출신이 모여 사는 멀베리스트리트  Mulberry Streetl는 리틀이탈리아의 중심거리다. 
그리고 리틀이탈리아 바로 남단, 모트스트리트  Mott Street 를 중심으로는뉴욕의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사실 카네기, 록펠러, 모건 등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부당 내부거래와 독과점 등 지금은 불법으로 규정된 경제 활동이 한몫했기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 때문에 이런 경제 관련법이 생겨난 셈인데, 한때오건이 움켜쥐었던 미국의 경제 권력도 현재는 정부 기구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은 이 미국의 대부호들은 그러나 말년에는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인생을 조금이나마도덕적으로 마무리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는 우리나라 속담의진수를 그야말로 확실하게 실천했다고 할까.

로어 프라자(Lower Plaza)아이스링크에 있는 프로메테우스 동상.

가문의 영광 뉴욕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20인중 ‘찰스 루치아노‘라는 마피아 보스가 있다. 루치아노의 업적은 시실리 출신갱단을 단순한 폭력배가 아닌 미국의 권력 중심부까지 좌지우지하는 기업체로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폭력배의 기본 수입원은 아무래도 근처 상가의 상인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것, 일명 보호비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랜도의 명대사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야"라는 말로 으스스한 분위기 조성까지 하면서말이다.

그러나 미국의 마피아가 이렇게까지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원인은 무엇보다 1920년부터 시행된 금주법과, 범죄 소탕에 별로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FBI의태도가 결정적이었다. 
영화 <언터처블>에서 알 카포네를 잡아 넣은 투수 수사팀 엘리엇 네스트FBI가 아닌 미국 재무싱 소속이다. 알 카포네의 죄명도 탈세 
마피아는 매매춘, 도박, 마약등 지하세계의 경제를 장악하면서 정치권력과 줄을 엮어 세력을 넓힌다.
<대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뉴욕의 5대 마피아 가문은 살바토레 마란차노가 마피아를 통합한 후 뉴욕을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눠 각 가문에 할당한 것이시작이었다.

마피아가 미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과 이에 관련된 사법기관의 부패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뉴욕 시장 줄리아니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많은 영화에서 차용된 전설적인 갱의 도시, 뉴욕의 범죄율은40퍼센트 이상 줄어들어 생각보다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게 한편의 말이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

1910년대, 그리니치빌리지를 거쳐 간 사람 중에는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와 근대 사진 예술의 아버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도 있다. 
이 스티글리츠의 아내가 꽃과 식물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던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로, 스티글리츠는오키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녀의 작품 활동을 팍팍 밀어주었다.

그리고 1920~1930년대에는 미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일러스트레이터노먼 록웰과 화가 에드워드 호퍼, 극작가 유진 오닐이 살았었고, 1940년대에는뉴욕파 화가 잭슨 폴록이, 1960년대에는 밥 딜런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유명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앞서 1900년대에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활동했던 작가가 바로 오 헨리 10. Henry 다. 
어린 시절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읽으면서그리니치빌리지를 알게 된 이들도 아마 적잖을 것 같다. 내가 읽은 동화책에서는 분명 소녀와 어머니 그리고 화가 할아버지가 등장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본 소설의 내용은 그게 아니다. 

워싱턴스퀘어 서쪽, 그리니치빌리지의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는 수와 존시라는 두 화가 아가씨와 역시 가난한 화가면서 같은 집 1층에 사는 비번 영감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동화책같으니라고!!

오 헨리의 단편은 대부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읽는 그의 단편 소설에서는 무명의 작가와 화가가 살았던 당시의 그리니치빌리지 그리고 맨해튼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맨해튼에 자리한 대학교#NEW YORK 104

줄리어드 음악원 The Juilliard Schooll 
정경화, 장영주, 아이작 스틴, 요요마등이렇게 화려한 클래식 연주자가 모두 줄리어드 출신이다. 이 음악원은 1905년에세워져 현재는 유럽인도 가길 꿈꾸는 전설 같은 음악학교가 되었다. 줄리어드는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빈부와 인종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실제로 학생의 70퍼센트가 장학금을 지원받는다고 한다.

뉴욕 대학교 I New York University 미국의 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이 사립 대학의 장점은 뉴욕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월스트리트에서 인턴십을 한다든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수업을 받는다든가 하는 최상의 기회를 접할 수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 중 하나로,
뉴욕에 자리한 고등교육의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인류학이 학문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은 1840년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중심으로해서 였는데, 마거릿 미드 같은 인류학자가 바로 컬럼비아 대학 출신이다.

맨해튼에는 
SVAIScnool of Visual Artl나 
파슨스 디자인 스쿨  Parsons School ofDesignl. 
FITI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l 같은 디자인 학교도 눈에 띈다. SVA는원래 일러스트레이터를 양성하는 학교였지만 1956년에 좀더 테크니컬한 교육을실시하면서 이름을 지금처럼 바꾸었다.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프랫인스티튜트  Pratt Institutel도 한국 학생이 선호하는 디자인 대학이다.

그래도 한 번쯤 들러봐야 한 미술관#063NEW YORK 104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I 
뉴욕에 갔을 때 MoMA는확장 공사를 하느라고 퀸스로 이사 간 상태였다. 과연 퀸스까지 가서 작품을 감상해야 할까? 가이드북에 따르면, MoMA는 개마고원에 있더라도 꼭 가봐야하는 미술관이다. 록펠러가의 며느리 애비 록펠러의 주도로 1929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에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마티스의<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앤디 워홀의 <골드 메릴린 먼로> 등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공부했던 유명한 그림이 모두 모여 있다. MoMA가 인수한PS1 미술관도 호응이 좋다. 이곳은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미술관이기 때문에 아마도 뉴욕의 젊은 미술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ISolomon R. Guggenheim Museuml 
광산 투자가였던 솔로몬구겐하임이 개관한 미술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아름다운 외관으로도유명하다.

휘트니 미술관 Whitney Museurn of Armerican Art 
예술 후원자이자 예술가인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자신의 수집품을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거절하자 1930년에 직접 이 미술관을 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센트럴 파크 옆에 자리한 미국 최대의 미술관. 맨해튼에 있는 베르메르의 그림 중 다섯 점이 이곳에 있다.

<위대한 유산>과 화가의 작업실

영화를 보면서 뉴욕 미술계의 분위기를 슬쩍 느껴보기에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위대한 유산>이 제격이다.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상류층 아가씨를 사랑하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 핀 벨(에단 호크) 이 뉴욕에서 아트스타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핀 벨과 에스텔라 (기네스 펠트로)의사랑이야기도 좋지만, 영화 내내 초록빛으로 일관하는 영상도 멋지고, 무엇보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프란시스코 클레멘트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도매력적이다.
핀 벨은 로드처럼 나타난 수수께끼의 사나이에게 뉴욕행 티켓을 받는다. 핀은 그가 마련해준 작업실에서 소호의 로프트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그가 소개해준 아트 딜러에 의해 스타가 된다. 핀의 데뷔전은 모든 그림이 다 팔려나가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것도 모두 수수께끼사나이의 공로였다.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화가의 대부분은 섬 밖으로 작업실을 옮겨 갔다. 웃지못할 일은 그들이 모여 주목받는 예술 동네가 되고 그래서 그곳으로 관광객이 몰려들면 집값이 뛰는 바람에 화가들은 정작 쫓겨난다는 난감한 사이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씨 예술인 마을을 만들어도 별 소득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등이 예술가가 모여드는 대표 지역으로, 지금은 그곳
"역시 집값이 띈다고 한다. 아무래도 부동산 사업에 야망을 가진 복부인이라면 록밴드 대신 뉴욕 화가의 그루피를 자처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지는 현상이다. 

패션 거리의 미싱사 아저씨

미드타운 서쪽 7번가인가 8번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미싱을 돌리는 웬아저씨의 동상이 보인다. 바늘에 꽂힌 엄청나게 커다란 단추 모형과 패션디스트릭트/Fashion District 라는 거리 이름으로 볼 때 옷 만드는 일과 상관이 있는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상이 말해주듯 뉴욕의 기성복 제조 역사는 꽤 긴 편이다.
1820년대부터 각종 부티크와 숍이 브로드웨이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몇몇 돈을 번 상인은 넓은 대지를 확보해 대형 양품점을 세웠는데 1858년, 롤랜드 허시메이시가 6번가에 문을 연 손수건 가게도 30년 뒤 지금의 메이시 백화점 자리로 옮겼다.
뉴욕을 걷다 보면 이렇게 과거 혹은 현재를 말해주는 이정표를 가끔 만나게 된다.

뉴욕의 패션 디자인 회사가 몰려 있는 의류 지구 Garment District,
Fashion Districtl 라든가,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극장이 잔뜩 들어선 극장지구 ITheatre District,
 맨해튼 최남단 배터리 파크 근처 월스트리트라 불리는금융 지구 I Financial Districtl까지. 
그리고 지금은 고기를 포장하는 사람이 하나도없는 육류 포장 지구(Meat Packing Districtl도 있다.
육류 포장지구는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힙 Hipl한사람들이 모여 글랩 파티 Glam Party‘를 즐기는 곳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마퀴로‘에서는 가끔 유명 스타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혹시 거리 이름만 보고
"역시 고기는 안창살이 최고지"라며 입맛을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설마 또 있는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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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당사자들이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즉 1990년 전후에야 불거진 거죠. 이때부터는 일본도 이 문제를그냥 넘어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일본정부도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일 문제에서 자주 거론되는 고노 담화나무라야마 담화가 이때 발표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993년에 나온 고노 담화는 당시 일본의 관방장관이었던 고노 요헤이의 이름을 땄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자 일본정부가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 위안부들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경우도 있고 일본이 위탁한 회사에 의해 속아서 간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김으로써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이 문제로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 고노 담화입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山가 발표한 담화를 말합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죄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치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성기금이란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일협정에서 개인 배상 얘기는 끝났기 때문에 일본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고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식민지 본국이 그 식민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개척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식민지를 발전시켜주려고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본국의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더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는것입니다. 즉 착취리는 본질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착시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식민지가 제국주의 본국 경제에 포함되어버리니까 제국주의 본국의 시장과 근대 문화가 ‘이식‘되는 과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 식민지 지역에서 근대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와 경제구조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식된 경제구조를 보고우리나라가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는 논리로 자본주의 맹아론이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조선시대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발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발전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들어오면서 한국에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어느 나라는자본주의 맹아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다보면 어느 단계에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인 모델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모델들이 자생적으로 확대되고 발전할 수도 있고, 그전에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애초에 나타났던 맹아는 사라지고 이식된 자본주의적인 모델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즉 맹아가 발전해서 스스로 발전한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기본적으로 모든 교과서가 수용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식민지 시기라는 같은 경험을 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는 몇 가지 의미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인 문제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대단히 특이한 경우로 다른 나라와 달리 이웃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대다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죠 
이웃 국가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사의 어떤 국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기도 했겠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살아왔죠그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전근대 시대에 일본을 그렇게 문명화된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우린 굉장히 문명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종속적 문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당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전근대 시대에 선진문명의 제1 아이콘은 중국의 유학이었습니다. 그 유학을 받아들여서 나름대로의 유학체계를 유지해온 나라이니, 수준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보다 분명 수준이 낮다고 여겨지던 일본에 식민지화되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 식민지였다는 것에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는 거죠.

두 번째로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을 보면 수천 년 동안 독립된 통일왕조를 유지한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는 인도에도 독립된 통일왕조가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간중간에 계속 외세의 침입을 받았고, 계속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들이 지배한 적도 있죠. 
베트남은 우리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의 변방에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도 중국의 괴롭힘을 더 많이 받은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베트남에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은 1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중간에 분열과 복속이 반복되었습니다. 
타이완은 식민지 전 300여년간 독립국가를 이뤘던 적이 없었습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일본이 들어왔고, 다시 국민당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국가의 국민들한테는 어떤 나라의 식민지가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좋은 지배자였는지만 생각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오랫동안 통일왕조를 유지하며 우리것을 지키다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뒤떨어진 문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죠. 우리와 같은 경우가 많지는 않아서 이웃나라인 영국에 통합된 아일랜드 정도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처럼 아일랜드와 영국도 사이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사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 비교해 보면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정말 점잖은 편입니다. 아일랜드의 유혈투쟁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나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면 ‘개발이냐, 수탈이냐‘ 같은 문제를 포함해 좀더 명확하게 이 시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와 제국주의 관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위주로, 아니 너무 사실만 강조했기 때문에 문제된 측면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옛날에는 너무 수탈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는 특히 균형 잡힌 관점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바로 알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1960년대 이후 개발 원조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현재를 바라보는 데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우리도 힘든데 무슨원조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도 우리 상품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물건을 사는 나라도 잘살아야 합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소득이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이용할 줄도 모르면 우리와의 교역은불가능합니다. 즉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같이가야되는 측면이 있는 거죠. 물론 이건 식민지화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논리는 비슷하지만 식민지는 상대국의 주권까지도허용하지 않는 반면, 원조는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의 방안이죠. 식민지 시기의 본질은착취였고 그 과정에서 개발이 나타나는 것이지만 오늘날 국제관계의본질은 착취가 아니라 상생의 모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 윈-윈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격의 이슈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적으로는 베트남 파병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려던 시기에 파병을 결정하여 미국의 대한 원조를 연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원조 감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원조할 곳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단일국가에 대규모의 원조를 주기가 힘들었습니다. 원조를 감축하려는 때에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1966년 브라운 각서를 작성하고 미국이 한국에 특별원조를 주기로 했죠. 그외에도 전투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특히 경제개발계획 실행에 꼭 필요한 도움이었습니다. 경계개발계획을 실행하려는 개발도상국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과 기술 문제입니다. 베트남전쟁이 문제들을 모두 극복하는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특수로 돈이 들어왔고 파병의 대가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참 중요합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돈을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전쟁 기간에 일본이 돈을 벌어서 경제를 부홍시킨 것을 알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신입생들한테 물어보면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어디서 배웠느냐

고품으면 그 친구들은 기억을 못 합니다. 부모님한테 들은 건지 수업시간에 들었는지 그러나 분명히 한국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정으로 고통받는 동안 일본은 얄밉게도 전쟁특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없다는 것을요.

한국전쟁을 베트남전쟁에 비교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전쟁이라고 하더라도그 전쟁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물며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국가입니다. 그곳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봤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전쟁특수를 정당화시킨다면 일본이 한국전쟁 중에 돈을 번 것을 어떻게 비난하겠습니까. 

비난을 떠나 우리가 일본을 굉장히 얄밉게 보는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한국인들을 그렇게 바라보겠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요?
우리 후손들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후손들한테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목적도 중요하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과정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결과나 결론을 얻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수단을 썼는지를 봐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경제성장을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서 이득을 얻는 과정이•정당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면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전혀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할 때는 또다른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모든 신문들이 재파병에 반대하면서 "뭘 얻을 게 있느냐"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파병의 목적은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내서 평화체제수립에 이바지하고, 그 나라의 재건에 참여하고, 정말 순수하게 전쟁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소프트파워이고 우리의 브랜드죠.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어려운 국가를 도와준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성은 ‘우리가 뭘 얻을 게 있느냐‘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가뭘 얻겠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와도 모자란데 말이죠. 

베트남전쟁의 기억이 지금의 현실 정치, 현실 외교정치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고있는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은 한편으로는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올바른 외교정책과 정치를 해나가기 위해서도 베트남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이런 과거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가장 먼저 정부가 나서서 풀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이고, 군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과 사회가 나서야합니다. 

2014년 현재 베트남의 삼성전자 공장이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차지하는 비중이 17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2015년 2월 현재 삼성전자가 공장을 증축하면서 일주일에 2,400명을 신규 채용한다고도합니다. 또한 한국의 전문가들이 설립한 사회적 기업 ‘야만‘이 매년 평화를 위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업과 사회의 역할이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기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

내부에서 정치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자제해야 되겠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안부와 징용이라는 과거사가 있다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과거사가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일본정부에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면, 한국사회 역시 베트남에 대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국도 베트남에게 진심으로사과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남의 문제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물론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과 베트콩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한국군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게릴라 전쟁이었기 때문에 분명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기에 대해서 사과해야 합니다. 한국군은 정부에 의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정부가 사과해야 합니다. 한국정부가 진심으로 사과함으로써 동원된 군인들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과 베트남은 과거를 넘어서 동반자로 나아가야 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사과를요구해야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역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베트남전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앞으로의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소중한 기회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교과서는 이분법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독재는 부정적이고 경제성장은 긍정적이었지만 경제성장 과정에서 독재는 불가피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거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은 우리의 빛나는 성과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 탓에 빈부 격차가 커졌고 경제구조 자체도 튼튼해지지않았다‘라는 식으로 명과 암으로 나눠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긍정과 부정을 함께 보기 때문에 혹은 명과 암을 함께 살피기 때문에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명과 암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이해해야 합니다. 
서로 같이 이해해야 우리 경제사를 제대로 보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통합적으로 봐야 하고, 동시에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동전처럼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경제사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최근까지 연속적으로 바라보면서 각 국면마다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물론 자료가 아직 다 공개되지 않았고, 앞으로 우리가 더 분석해야할 이슈도 많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환율 문제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환율문제는 한미관계와도 관련이 되고 경제정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는 경제개발계획이 중요하겠죠. 박정희 정부 하면 대부분 1972년의 유신만 이야기하지만 1972년의 또다른 사건인 8.3조치에•대한 이해가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합니다. 
그대음에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경제위기와 부채위기, 
1980년대에 있었던 3저 호황을 잘 들여다보면 한국경제의 맥락과 성과 그리고 비용 같은 부분들이 한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대부분 시장논리대로 처리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시장논리에 따라 처리했다면, 한국경제는 더 탄탄한 구조를 가졌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윤리 문제입니다. 8.3조치를 발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에 강조한 것도 기업가들의 윤리입니다. 즉 모든 기업인은 깊이 성찰하고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강조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죠. 경제성장의 초기에는 허점이 많았습니다. 기업가들이 마음만 먹으면 차관이나 정부의 돈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탈세나 부동산 투기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경제적 규율과 법률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기업들에 대한 감사시스템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기업가의 윤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크게 논란이 됐던 위장 사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기업가는 자기 돈을 회사에 투자해서 그 이익금으로 회사를 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인 연구개발 R&D 개념입니다. 즉 연구개발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률을 높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죠. 그런데 회사의

사주들이 이익금을 자본금으로 투자하는 대신 자기 회사에 사채로 빌려주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빌려주면 안 되니까 가족의 이름으로 빌려주었습니다. 회사는 사주의 가족들에게 높은 이자를 갚아줘야 했습니다. 사주로서는 경제개발의 초기 기업이 생산으로 얻는 이익이 크지않은 상황에서 사채로 얻는 이익이 훨씬 크겠죠. 이걸 위장 사채라고 합니다. 

정부의 조사한 결과 생각보다 위장 사채의 규모가 컸습니다. 부동산 투기나 위장 사채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회의 기업가 윤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처벌이 필요했지만 정부는 많은 대기업들을 사면해주었습니다.

8.3조치는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위기가 왔을때는 시장논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장을 정상화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시장논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1969년과 1970년의 청와대 보고서만 보더라도 시장논리가 살아 있었지만 8.3조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기업가 윤리를 명확하게 세워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업가 윤리를 명확히 세워야만 경제위기가 다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8.3조치는 기업가 편을 들어주면서 기업가 윤리 문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업가들의 윤리를담보해줄 법률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위기 때마다 기업가들의 윤리 문제가 재발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다시 부동산 투기가 나타납니다. 그때는 중동특수로 오일달러가 들어오던 시기입니다. 기업들이 돈이 생기자 다시 두기를 시작했습니다. 강남이 개발되고, 현대아파트 사건이 있던 때였죠.
그리고 나서 1980년에 또 경제위기가 왔습니다. 두 번째 외환위기였습니다.

으켰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또 하나, 정변을 주도한 사람이 기존의 권력층과 완전히 다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김옥균만 해도 안동 김씨의 대단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입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안동 김씨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물론 양반 계층이 아닌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재필이나 오징석은 양반 출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 세력은 북촌 양반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5·16을 통해서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었는지를 살펴볼까요? 

사람들이 혁명이라고 부르는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을 보면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 권력을 주도하는 계층이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로,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확 바뀌게 됩니다. 시민사회로 들어가거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로 전환하는 거죠. 이걸 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5·16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5.16 이후에 과연 정책이나 권력층에 변화가 있었을까요?
일단 5·16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이전의 집권층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전 집권층은 대부분 식민지 시기부터 특혜를 받았던 계층입니다. 그래서 친일파들이 처단되지 않고 등용되었다는 논란이 계속 있었던 거죠. 그런데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육사 5기, 8기 등의 세력은 한국현대사에서 비주류 세력입니다. 주류 세력은 이승만 정부가까이에서 당시 여러 가지 부정부패, 부정선거를 만들어냈던 세력이죠.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출신 배경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시골의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단지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현재 러시아나 일본이 나아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듯이 역사철학 중에도 전체주의나 군국주의에 기초한 역사인식은 지양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들은 법적으로도 규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결국 한국,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말 일본과 독일의 역사인식이 사회 전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일본에 나타나는 역사인식은 그 당시의 역사인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한국 역시 그런 역사인식이 전혀 없다고 할수 없습니다. 
2014년에 있었던 ‘서북청년단 재건‘ 사건과 이른바 ‘일베‘
의 역사인식에서 그런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사회를 위험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전체주의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회는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정치적 평가나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객관적인 접근이 어렵다는것입니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모두 신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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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사람들 2024-08-0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뭔가 어느 한쪽의 이익에 자신이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인가... 너무 소모적인 편향으로 몰고가는 극단적인 모습들에서 ‘몰지성‘과 ‘형오‘를 읽고 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도 역사는 이어지고, 진실이 힘있게 드러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