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道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술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튀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넘어, 골넘어, 뻐꾸기는 - P87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散文詩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 기름묻은 책 하이텍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

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공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풀따기

김소월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 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은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되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비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
방정환
보려도 보이지 않고 흔적 없으니
그 한번 동하면 못할 것 없고
그 가는 곳마다 사업이루니
귀여움 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뜨거운 불길이 태우지 못하며
힘있는 세력이 빼앗지 못하며
굳센 물결이 씻지 못하니
그 조화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바라나
마음만 굳세면 못할 일 없네
세계가 넓으나 그보다 크니
그 크기 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이 보배 이 조화 향하는 곳에
뉘 능히 막아낼 장사 없나니
갈아서 빛내세 더욱 힘있게
닦아서 키우세 우리의 마음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독 한사발몸 속으로 들어온 길
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눈가장 단단한 먼지이자 가장 물렁한 바위다.
천상의 춤이자 지하의 술이다가장 가벼운 꽃이자 가장 무거운 물이다.
깊은 바다이자 얇은 바닥이다가장 맑은 소리이자 가장 탁한 소란이다화려한 침묵이자 소박한 웅변이다가장 차가운 불이자 가장 뜨거운 입김이다.
깨끗한 날개이자 불결한 내장이다가장 열렬한 마중이자 가장 쓸쓸한 배웅이다.
환한 입구이자 캄캄한 출구이다

가장 단정한 잠이자 가장 흐트러진 꿈이다.
달콤한 치욕이자 쓰디쓴 사랑이다가장 부드러운 몸이자 가장 거친 영혼이다.
촘촘한 그물이자 성긴 허공이다가장 확실한 연기이자 가장 희미한 실체이다그림자 없는 빛이자 빛 없는 그림자다EVEDER가장 느슨한 구속이자 가장 팽팽한 용서이다사막의 눈물이자 빙점의 웃음이다가장 광포한 평화이자 가장 차분한 혁명이다부실한 열매이자 탄탄한 뿌리이다-

가장 간절한 기도이자 가장 엉성한 수행이다.
높은 말씀이자 낮은 몸부림이다가장 독한 키스이자 가장 순수한 신열이다격렬한 떨림이자 조용한 소멸이다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울음이자 가장 가까이 다가온명이다섬세한 칼날이자 세상 뭉툭한 쇠몽둥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0 유용주 산문년 100 기념 디지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산골에 살면서 남보다 빠른 걸음은 자연의 변화를 피부로프느낀다는 사실이다. 풀과 나무가 자라고 시냇물과 해와 별과 달과 구름의 운행을 직접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먼저 감지한다. 그 모두가 사람 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바보배온전한 말이 떠다닌다.
응징하는 말이 가라앉는다.
물결이 발끝을 찌르고햇살이 허리를 관통한다.
바람이 온 바다를 취하고고난을 서서히 물들인다.
인간의 미래와 교훈과 철학이가득하다는 배에 오른다.
가장 가까이에서 파도를 보고 싶어뱃머리로 간다.
춤을 춘다.
옆 사람도 앞사람도 춤을 춘다.
서로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춤을 춘다.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읽으며춤을 춘다.
비난은 하지 마세요.
충고도 하지 마세요.
춤을 추는 것뿐이에요.
인간의 땀과 살냄새를 맡고 싶어서배가 고파서 춤을 추는 것이에요.

흥청망청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춤이에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추던 춤이에요.
바람이 일렁인다.
노을이 출렁인다.
발걸음이 뒤엉킨다.
선장이 노름을 하고 있다고누군가 귓속말을 한다.
선장은 재물을 모으고 여자를 취하고기름진 음식을 먹고 뚱뚱한 배를 내민다.
흉년 아닙니까.
우리는 늘 어둡고 처절할 겁니다.
지금 당장 맛나게 먹고 즐겨야지요.
챙길 게 있다면 챙겨야지요.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오.
갑판장과 항해사도 함께 챙겼는걸.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배에서스르르 살육이 시작된다.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사람의 살을 바르고 찢는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지요.

죽음은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란다.
광포한 얼굴들이 득실댄다.
아무런 맥락 없는 말들이 흘러간다.
물이 튀면 물고기가 떠오른다.
배는 광채가 없다.
배는 반란이 없다.
습관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헤아린다.
배의 꼬리에 사람들이 모인다.
모임을 만들고 모의를 하고 법을 만든다.
몇몇을 죽이고살인의 적법한 이유를 만들고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칼을 흩뿌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눅눅해진다.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병들고어떤 이는 흐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문을 전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눈동자가 탁해지고 사람들이 소금에 절여진다.

문학#44기

흙이 그리워 사박사박 발바닥에 투박하게 감기는 흙을밟고 싶어.
사람들의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
배가 점점 투명해진다.
바다 한가운데 점으로 남다가 사라진다.
멀리서 들릴 듯 말듯아기 울음이 들려온다.

퇴근

생활의 의문이란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생계의 고단함을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습관성 후회란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운다

길항(喆抗)

직장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망명지,
핑곗거리가 있어야 자기 검열이라는 칼끝 앞에 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장 다니며 이 정도면 괜찮다 하면서 당장 죽어버리고 싶은 자괴감의 바윗덩이를 피할 수 있었다.
직장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시를 쓸 수 있었다. 맹자께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도 바른 마음을 가질 만큼 나는 고매한 선비까지는 못 되는 인간이다. 카드 결제일에 부대끼는 호모머니쿠스인 것이다.
시와 직장 중에 무엇이 내게 먼저 도착한 난치병일까. 완급을 잘 다스리고 지내야 한다. 그러나 무업(巫業)을 중단하면 병이 재발하는 것처럼 나는 발병과 치료를 반복하며산다. 두서없이 뇌리를 선회하는 문장들을 외면하면서 전화를 받고 방문객과 차를 마신다. 컴퓨터에 직장용 엑셀과 메모용 흔글을 동시에 띄워놓고 근무한다.
나는 매일 시(詩)로부터 퇴근한다. 퇴근해야만 한다. 퇴근과 동시에 내게 주어진 남편, 아비, 아들이라는 소임에 근

무해야 한다. 거부하지도 못하는 당연직이니 어쩔 것인가.
진정한 퇴근이란 거부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퇴근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0 정채원 산문

겹겹의 불꽃

극지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1906년에 극지를 탐험하면서 북극 산맥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 광경에 나는 감동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칠 년 뒤 자연사박물관의 탐험대가 크로커랜드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피어리가 본 것과 똑같은 신기루만 보고 돌아왔다.
다양한 밀도의 대기층이 겹겹의 렌즈처럼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극지 탐험에 지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북극의끝없는 얼음 위에 떠 있는 히말라야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면 산맥은 자꾸 뒤로 물러나다가 해가 지면 끝없는 얼음 바다만 펼쳐지겠지. 마녀 모르간이 맘만 먹으면 펼쳐 보이는 세상에 속는 척 빠져보면 어떨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인 세상. 가짜인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낄낄대며 건너가는 유쾌한 세상.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동으로존재하다가 내가 휙 돌아볼 때만 입자로 존재하는 너처럼,
나처럼, 시(詩)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눈
1426
가장 단단한 먼지이자 가장 물렁한 바위다
천상의 춤이자 지하의 술이다
가장 가벼운 꽃이자 가장 무거운 물이다.
깊은 바다이자 얇은 바닥이다
가장 맑은 소리이자 가장 탁한 소란이다.
화려한 침묵이자 소박한 웅변이다
가장 차가운 불이자 가장 뜨거운 입김이다깨끗한 날개이자 불결한 내장이다
가장 열렬한 마중이자 가장 쓸쓸한 배웅이다.
환한 입구이자 캄캄한 출구이다

가장 단정한 잠이자 가장 흐트러진 꿈이다
달콤한 치욕이자 쓰디쓴 사랑이다
가장 부드러운 몸이자 가장 거친 영혼이다
촘촘한 그물이자 성긴 허공이다
가장 확실한 연기이자 가장 희미한 실체이다그림자 없는 빛이자 빛 없는 그림자다
가장 느슨한 구속이자 가장 팽팽한 용서이다.
사막의 눈물이자 빙점의 웃음이다
가장 광포한 평화이자 가장 차분한 혁명이다.
부실한 열매이자 탄탄한 뿌리이다

가장 간절한 기도이자 가장 엉성한 수행이다.
높은 말씀이자 낮은 몸부림이다
가장 독한 키스이자 가장 순수한 신열이다
격렬한 떨림이자 조용한 소멸이다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울음이자 가장 가까이 다가온 명이다
섬세한 칼날이자 세상 뭉툭한 쇠몽둥이다

문학동네시인선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산골에 살면서 남보다 빠른 걸음은 자연의 변화를 피부로 느낀다는 사실이다. 
풀과 나무가 자라고 시냇물과 해와 별과 달과 구름의 운행을 직접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먼저 감지한다. 
그 모두가 사람 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바보배
온전한 말이 떠다닌다.
응징하는 말이 가라앉는다.
물결이 발끝을 찌르고
햇살이 허리를 관통한다.
바람이 온 바다를 취하고
고난을 서서히 물들인다.
인간의 미래와 교훈과 철학이 가득하다는 배에 오른다.
가장 가까이에서 파도를 보고 싶어 뱃머리로 간다.
춤을 춘다.
옆 사람도 앞사람도 춤을 춘다.
서로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춤을 춘다.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읽으며 춤을 춘다.
비난은 하지 마세요.
충고도 하지 마세요.
춤을 추는 것뿐이에요.
인간의 땀과 살냄새를 맡고 싶어서
배가 고파서 춤을 추는 것이에요.

흥청망청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춤이에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추던 춤이에요.
바람이 일렁인다.
노을이 출렁인다.
발걸음이 뒤엉킨다.
선장이 노름을 하고 있다고 누군가 귓속말을 한다.
선장은 재물을 모으고 여자를 취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뚱뚱한 배를 내민다.
흉년 아닙니까.
우리는 늘 어둡고 처절할 겁니다.
지금 당장 맛나게 먹고 즐겨야지요.
챙길 게 있다면 챙겨야지요.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오.
갑판장과 항해사도 함께 챙겼는걸.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배에서
스르르 살육이 시작된다.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
사람의 살을 바르고 찢는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지요.

죽음은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란다.
광포한 얼굴들이 득실댄다.
아무런 맥락 없는 말들이 흘러간다.
물이 튀면 물고기가 떠오른다.
배는 광채가 없다.
배는 반란이 없다.
습관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헤아린다.
배의 꼬리에 사람들이 모인다.
모임을 만들고 모의를 하고 법을 만든다.
몇몇을 죽이고
살인의 적법한 이유를 만들고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칼을 흩뿌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눅눅해진다.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병들고어떤 이는 흐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문을 전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눈동자가 탁해지고 사람들이 소금에 절여진다.

흙이 그리워
사박사박 발바닥에 투박하게 감기는 흙을 밟고 싶어.
사람들의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
배가 점점 투명해진다.
바다 한가운데 점으로 남다가 사라진다.
멀리서 들릴 듯 말듯 아기 울음이 들려온다.

퇴근
생활의 의문이란
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
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
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
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
생계의 고단함을 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
습관성 후회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 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
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 운다

길항(喆抗)
직장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망명지 핑곗거리가 있어야 자기 검열이라는 칼끝 앞에 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장 다니며 이 정도면 괜찮다 하면서 당장 죽어버리고 싶은 자괴감의 바윗덩이를 피할 수 있었다.
직장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시를 쓸 수 있었다. 맹자께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도 바른 마음을 가질 만큼 나는 고매한 선비까지는 못 되는 인간이다. 카드 결제일에 부대끼는 호모머니쿠스인 것이다.
시와 직장 중에 무엇이 내게 먼저 도착한 난치병일까. 완급을 잘 다스리고 지내야 한다. 그러나 무업(巫業)을 중단하면 병이 재발하는 것처럼 나는 발병과 치료를 반복하며 산다. 두서없이 뇌리를 선회하는 문장들을 외면하면서 전화를 받고 방문객과 차를 마신다. 컴퓨터에 직장용 엑셀과 메모용 흔글을 동시에 띄워놓고 근무한다.
나는 매일 시(詩)로부터 퇴근한다. 퇴근해야만 한다. 퇴근과 동시에 내게 주어진 남편, 아비, 아들이라는 소임에 근

무해야 한다. 거부하지도 못하는 당연직이니 어쩔 것인가
진정한 퇴근이란 거부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퇴근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0 정채원 산문

겹겹의 불꽃
극지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1906년에 극지를 탐험하면서 북극 산맥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 광경에 나는 감동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칠 년 뒤 자연사박물관의 탐험대가 크로커랜드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피어리가 본 것과 똑같은 신기루만 보고 돌아왔다.
다양한 밀도의 대기층이 겹겹의 렌즈처럼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극지 탐험에 지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북극의 끝없는 얼음 위에 떠 있는 히말라야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면 산맥은 자꾸 뒤로 물러나다가 해가 지면 끝없는 얼음 바다만 펼쳐지겠지. 마녀 모르간이 맘만 먹으면 펼쳐 보이는 세상에 속는 척 빠져보면 어떨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인 세상. 가짜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낄낄대며 건너가는 유쾌한 세상.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내가 휙 돌아볼 때만 입자로 존재하는 너처럼,
나처럼, 시(詩)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조연인 것처럼 느껴지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주고 싶으신가요?
인생에서 나는 결코 조연이 될 수 없습니다 감독이니까요
어떤 상황이 어떤 날이 어떤 결과가 마음에안 들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세상이라는 무대 밖으로 밀려났다는 허무함도 느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에서 무수한 NG를 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No Good 입니다. 좋지 않으면 다시 하면 되잖아요.
‘Good‘이 될 때까지요. 조금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심호흡하면서다시 인생이라는 카메라 앞에, 무대 위에, 조명 아래 서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