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가장 단단한 먼지이자 가장 물렁한 바위다. 천상의 춤이자 지하의 술이다가장 가벼운 꽃이자 가장 무거운 물이다. 깊은 바다이자 얇은 바닥이다가장 맑은 소리이자 가장 탁한 소란이다화려한 침묵이자 소박한 웅변이다가장 차가운 불이자 가장 뜨거운 입김이다. 깨끗한 날개이자 불결한 내장이다가장 열렬한 마중이자 가장 쓸쓸한 배웅이다. 환한 입구이자 캄캄한 출구이다
가장 단정한 잠이자 가장 흐트러진 꿈이다. 달콤한 치욕이자 쓰디쓴 사랑이다가장 부드러운 몸이자 가장 거친 영혼이다. 촘촘한 그물이자 성긴 허공이다가장 확실한 연기이자 가장 희미한 실체이다그림자 없는 빛이자 빛 없는 그림자다EVEDER가장 느슨한 구속이자 가장 팽팽한 용서이다사막의 눈물이자 빙점의 웃음이다가장 광포한 평화이자 가장 차분한 혁명이다부실한 열매이자 탄탄한 뿌리이다-
가장 간절한 기도이자 가장 엉성한 수행이다. 높은 말씀이자 낮은 몸부림이다가장 독한 키스이자 가장 순수한 신열이다격렬한 떨림이자 조용한 소멸이다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울음이자 가장 가까이 다가온명이다섬세한 칼날이자 세상 뭉툭한 쇠몽둥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0 유용주 산문년 100 기념 디지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산골에 살면서 남보다 빠른 걸음은 자연의 변화를 피부로프느낀다는 사실이다. 풀과 나무가 자라고 시냇물과 해와 별과 달과 구름의 운행을 직접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먼저 감지한다. 그 모두가 사람 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바보배온전한 말이 떠다닌다. 응징하는 말이 가라앉는다. 물결이 발끝을 찌르고햇살이 허리를 관통한다. 바람이 온 바다를 취하고고난을 서서히 물들인다. 인간의 미래와 교훈과 철학이가득하다는 배에 오른다. 가장 가까이에서 파도를 보고 싶어뱃머리로 간다. 춤을 춘다. 옆 사람도 앞사람도 춤을 춘다. 서로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춤을 춘다.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읽으며춤을 춘다. 비난은 하지 마세요. 충고도 하지 마세요. 춤을 추는 것뿐이에요. 인간의 땀과 살냄새를 맡고 싶어서배가 고파서 춤을 추는 것이에요.
흥청망청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춤이에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추던 춤이에요. 바람이 일렁인다. 노을이 출렁인다. 발걸음이 뒤엉킨다. 선장이 노름을 하고 있다고누군가 귓속말을 한다. 선장은 재물을 모으고 여자를 취하고기름진 음식을 먹고 뚱뚱한 배를 내민다. 흉년 아닙니까. 우리는 늘 어둡고 처절할 겁니다. 지금 당장 맛나게 먹고 즐겨야지요. 챙길 게 있다면 챙겨야지요.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오. 갑판장과 항해사도 함께 챙겼는걸.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배에서스르르 살육이 시작된다.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사람의 살을 바르고 찢는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지요.
죽음은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란다. 광포한 얼굴들이 득실댄다. 아무런 맥락 없는 말들이 흘러간다. 물이 튀면 물고기가 떠오른다. 배는 광채가 없다. 배는 반란이 없다. 습관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헤아린다. 배의 꼬리에 사람들이 모인다. 모임을 만들고 모의를 하고 법을 만든다. 몇몇을 죽이고살인의 적법한 이유를 만들고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칼을 흩뿌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눅눅해진다.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병들고어떤 이는 흐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문을 전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눈동자가 탁해지고 사람들이 소금에 절여진다.
문학#44기
흙이 그리워 사박사박 발바닥에 투박하게 감기는 흙을밟고 싶어. 사람들의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 배가 점점 투명해진다. 바다 한가운데 점으로 남다가 사라진다. 멀리서 들릴 듯 말듯아기 울음이 들려온다.
퇴근
생활의 의문이란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생계의 고단함을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습관성 후회란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운다
길항(喆抗)
직장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망명지, 핑곗거리가 있어야 자기 검열이라는 칼끝 앞에 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장 다니며 이 정도면 괜찮다 하면서 당장 죽어버리고 싶은 자괴감의 바윗덩이를 피할 수 있었다. 직장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시를 쓸 수 있었다. 맹자께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도 바른 마음을 가질 만큼 나는 고매한 선비까지는 못 되는 인간이다. 카드 결제일에 부대끼는 호모머니쿠스인 것이다. 시와 직장 중에 무엇이 내게 먼저 도착한 난치병일까. 완급을 잘 다스리고 지내야 한다. 그러나 무업(巫業)을 중단하면 병이 재발하는 것처럼 나는 발병과 치료를 반복하며산다. 두서없이 뇌리를 선회하는 문장들을 외면하면서 전화를 받고 방문객과 차를 마신다. 컴퓨터에 직장용 엑셀과 메모용 흔글을 동시에 띄워놓고 근무한다. 나는 매일 시(詩)로부터 퇴근한다. 퇴근해야만 한다. 퇴근과 동시에 내게 주어진 남편, 아비, 아들이라는 소임에 근
무해야 한다. 거부하지도 못하는 당연직이니 어쩔 것인가. 진정한 퇴근이란 거부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퇴근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0 정채원 산문
겹겹의 불꽃
극지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1906년에 극지를 탐험하면서 북극 산맥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 광경에 나는 감동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칠 년 뒤 자연사박물관의 탐험대가 크로커랜드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피어리가 본 것과 똑같은 신기루만 보고 돌아왔다. 다양한 밀도의 대기층이 겹겹의 렌즈처럼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극지 탐험에 지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북극의끝없는 얼음 위에 떠 있는 히말라야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면 산맥은 자꾸 뒤로 물러나다가 해가 지면 끝없는 얼음 바다만 펼쳐지겠지. 마녀 모르간이 맘만 먹으면 펼쳐 보이는 세상에 속는 척 빠져보면 어떨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인 세상. 가짜인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낄낄대며 건너가는 유쾌한 세상.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동으로존재하다가 내가 휙 돌아볼 때만 입자로 존재하는 너처럼, 나처럼, 시(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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