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형제 페터가 남창일지도 모른다는, 적어도 한때는 그런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생각이 요아힘을 괴롭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비록 그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이 없고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생각은 잘못되었거나 심하게 과장됐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아힘은 페터의 집을 단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함께 살고 있던 페터의 남자친구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친구가 질투심이나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격 때문에 요아힘에게거짓말을 했다고 믿는 편이다. 요아힘은 소심했다. 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나와 대화하는 것을 절대 거부했기 때문에 그를 논리적으로 설득해서 위안을 주려고 했던 내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그날 밤은 기온이 너무 내려가서노숙자를 위해 지하철 입구를 폐쇄하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요아힘의 말대로 걸어갔다면 아주 끔찍했을 것이다. 정말 걸어갈 생각이었느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그는 단지 입술이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지껄인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63

황량한 사막과 저멀리에 먼지구름이 가득한 지평선뿐인 그런 장소. 그리고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죽는 날까지 수백만 명 중의 하나인 이름 없는 죄수로서 지내야 할 더럽고 초라한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 
왜 그런 지독한 상황이 나에게 M과 M을 방문하던 시기를 생각나게 하는지 그 분명한 원인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었을 때, 그 순간 바로 나는 겨울공원 근처에 있던 M의 집 문앞에 서서 그 안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은 대개 죽음이라고 불리며, 그 장소는 방향을 분간할 수조차 없이 황량한 곳이며, 이름 없는 존재로 수용되는 것이며, 수백만 중의 결코 구별되지 않는 하나로 소멸하는 경우이며, 혹은 설사 아주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최소한 죽음과 아주 닮은 어떤 것이 된다.
섣달그믐날의 파티와 새해의 신년 음악회가 끝난 후 요아힘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 홀로 떠났다. 플렌스부르크에는 그가 용접일을 배울 때 알게 된 마이스터가 살고 있다고했다. 그는 연말휴가 동안에 해치워야 할 일을 가지고 있으므로 요아힘에게 자신의 작업장에서 짧은 일자리와 잠자리
에세이스트의 책상 91

M이 어느 날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면, 그리고 너를 사랑하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얼어붙은 가을날 창에 찔리는 아픔,
사랑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그리워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갈등,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 자유롭게 떠나는 자에 대한 질투,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며 이제 너를 모르게 될 것이며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엔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남게 될 것이며 이 모든것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을 갖지 않는 순간이 올 것임을 알게 되는 예감 때문에 숨이 멈출 것이다. 
어느 순간 M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M은 더이상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제발 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날짜를 계산하거나 슬퍼하거나 귀찮게 같은 질문을 퍼부어대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하게, 너의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했을 뿐이었다. 다른 것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 M은 진정으로,
진정으로 상처받았던 것이다.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더이상의 다른 의미는전혀 없이, 에리히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음악회가 끝난 후, 슈베르트 애호가는 우리에게 말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다른 예술가들의 삶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봐도 짧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평생 동안 가난했으며 무명이었고 무엇보다도 키가 작고 뚱뚱했다.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단지미남이 아니라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 음악가답지 않게 손가락은 짧고 굵었으며 심한 근시인데다 과음 때문에 원래 뚱뚱했던 몸은 점점 더 볼품없어져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전혀 여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가 성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가곡 <겨울 나그네>가 최초로 불렸을 때조차도 별 볼 일 없는것으로 평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그 작품을 다른 어느 것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도 좋아하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무시당하는 일에는 익숙해져있었고 단 한 명의 후원자도 갖지 못했고, 혹은 원하지도 않
154

았다고 하며 죽고 난 뒤 남긴 것은 초라하고 낡은 옷가지와이불이 전부인 그런 인생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타고난 독학자였고 감성적이었으며 억제하는 낭만주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수줍고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근시인, 음악적인 걱정에 사무칠 때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몰라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떨면서 키득거리거나 시력이 나빠 자신 없게 움츠러들기나 하는 가난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하는 횔덜린의 말처럼, 우리가 들은 그의 음악은 그의 전부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나의 전부이고 온 영혼으로 말하는쾌락이고 창세기와 묵시록,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다."
슈베르트 애호가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팔 년 전 어느 날 이후 그는 사랑하는 것, 그 마음의 행위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시간의 풍경 위에 그대로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노란비단 의상을 입은 니진스키가 별들이 되었으며 하늘에서 빛나는 그 별빛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빛을 따라서 그 자신도 마침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머나먼 우주의 먼지 속으로 흘러가버렸다고.

에세이스트의 책상 155

나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M의얼굴에서 그 모든 생소한 메시지들을 읽었다. 그러자 그이전에 M의 얼굴에서 내가 읽었던 수많은 것들, 나에게 찾아가야 할 문장과 노래가 되어주었던, 보편문법과 야만인의 언어가 되어주었던 그 수많은 아름답고 숭고한 의미들이 아무런 항변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다음에는 한 낯설고 척박하게 메마른 얼굴이 거기 누워 있을 뿐이었다. 나는수치심 때문에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차갑게 질렸다. 숨을쉬고 있었으나 나는 시체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매장되었고내 마음은 땅속에 묻혔다. 
그러나 수치심은 조금도 나아지지않았다. 정녕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치를 느낀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고, 수치를 느끼는 자신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그 날카로운 수치로 인해서, 동시에 내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수치의 늪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절대적으로 무의미했으며 존재하는 것은 단지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무한으로 반사되는수치심, 그 영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나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을 저질렀고,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수치를 느끼며,
자신이 수치스러워함을 분명히 알게 되고, 자신이 느끼는 그
160

숨길 수 없는 수치 때문에 더더욱 수치스러우며, 자신이 수치스러워한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우며 마침내는 무감각 속에서, 오직 수치스럽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그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 역겹고 진정 용서할 수 없으며 정녕 천박한 것은 M도 아니고 에리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떨고 있었다. 짧은 순간 떠오른 생각은 M이 반드시 돌아가려고 하는 나에게 화가 났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마지막으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내 의식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M의 눈, 그것을 말할 때의 M의 눈,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라고 말할 때의 M의 눈이 모든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말하면서 M은 내가 상처받을 것을 미리 계산했을 것이 분명했다. M은 에리히가 페니스를 가진 남자이며, 보통의 여자들이 추구하는 보통의 쾌락을 제공한다는 그 사실을 강조해서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M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말 때문에 에리히에게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M은 에리히를 사랑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에세이스트의 책상 161

다. M은 페니스로 인해서 연결되는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M은 그것까지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단순한 자웅결합의 쾌락에 순응하기에 M은 너무나 독립적이고 너무나 중성적이고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저항적이었다. 나는 그런 M 의 모든 것을 지금도 잘 기억한다. M에게 침실에서의 에리히는 속삭이는 바이브레이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믿었으며 그렇게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한번 절망에 빠졌다. 나는 명분상으로는 M에게 도덕에 관한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때문에 이성과 잠자리를 같이할 때 내가 수치심을 느꼈던가?
도덕적인 저항을 느꼈던가? 정신과 육체의 괴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던가? 그렇지 않다.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육체적인 관계란, 특히 쾌락을 가지고 오는 육체적인 관계란신성시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이전부더 그런 입장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M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
그날 밤 M은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고, 혹은 단지 그런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62

수미는 분별 있고 영리했다. 매력적인 외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영화관에서 나와서서 먹는 커피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점차 내불쾌감이 수미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하게 됨을 알았다. 수미가 그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도 아니고 수미의 어떤 말이나구체적인 행동이 나에게 불쾌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수미의말대로 그 영화는 수미에게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비록 수미가 최소한 극장 안에서는 그것을 즐겼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 때문에 수미가 비난받는다면 부당한 일이리라. 수미는자신의 일상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천성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마음껏 영양을 섭취하면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와 같았다.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수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수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식이건 스타일이건 수미는 환경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학교나 단체나집회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미는 건강하고 확고하며 공명정대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수미는 어떤 의미로든 매스미디어의 각광을 받지 않거나 시각적인 쾌감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184

편이었다. 아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친절했으나 냉담했다.
수미가 알거나 믿고 있는 것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각종 미디어에서 배운 것이라고 할있다. 수미가 사랑하는 것은비극적이고 이타적으로 보이는 종류의 화제 그 자체였다. 수미는 인간이 가장 비속하게 오감에 충실할 때 사랑하게 되는 것들을 스타일리시하게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그것을 위해서 지나치다 싶은 해석과 변명과 명분과 휴머니즘과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욕구를 발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수미는 혁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이면서도 그것의 이름으로 불리는것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고 도리어 쾌감을 느끼는 21 세기의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수미는 그런 식으로 그 안에서 마음껏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로 명명될 수 있었다. 영상의 언더그라운드, 은둔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대중친화적인 파괴자로 말이다. 수미는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냈으며 마음에 드는 것들에게 명분과 이름을 부여했다. 수미 자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으로 수미는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해서 싸웠으나 역시 그 중요한 동기는 불특정 다수인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드는 것,

에세이스트의 책상 185

타인의 마음을 빼앗는 존재가 되는 것, 혹은 그런 존재를 추중하는 것,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형, 무형의 정서적인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수미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인 무리로 존재하는 캐릭터 상품과 같은 어떤 유형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안에서 명확해지자 수미에 대한 감정이 빠른 속도로 식어갔다. 그날수미는 나에게 인과 이상의 어떤 것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갖기도 했으나 역시, 그 이상은 아니었다.
수미는 어린양처럼 결백하고 순결하나 역시 인파 이상은 아니었다. 수미가 가지고 있는 온갖 매력적인 요소들, 사람을빨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소들은 그대로 군중성의특징과 일치하게 되었다. 나는 더이상 군중을 견딜 수 없을것이고 그들을 수용하는 극장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마음에 들려고 하는 영화를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역겨워하지 않고 도리어 즐길 수조차 있는 수미를 견딜수 없을 것이다. 수미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수미는 거대 인파의 한 사람으로, 수천수만의 많은 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불특정 명사로서의 수비를 견딜 수 없다면, 나는당신들 모두를 견딜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나는그런 내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186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로마의 마지막 영광인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있는 터키 이스탄불,
모더니즘의 몸과 전통 건축의 영혼이 담긴 아라냐 저비용 주거 단지가 있는 인도 인도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지혜의 집이 있는 이라크 바그다드
슬픔과 불안이 새겨진 홍콩 상하이 은행이 있는 중국 홍콩,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기억하는 유대인박물관이 있는 독일 베를린,
건축도 식물처럼 성장한다는 로그너 바트블루마우 호텔이 있는 오스트리아 바트블루마우 등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인문학 산책!

전통 농장을 재현해놓은 글라스 팜이 있는 네덜란드 스헤인덜,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는 산마르코 성당이 있는 이탈리아 베니스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종이로 만든 집‘이 있는 일본 고베,
자연의 형상을 닮은 성가족성당이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유연한 사고가 만들어낸 하이테크 건축 퐁피두센터가 있는 프랑스 파리,
21세기 정보의 왕국 페이스북 사옥이 있는 미국 멘로파크
인간의 욕망이 담긴 부르즈 칼리파가 있는 아랍에미리트연방 두바이 등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인문학적 풍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존의 바실리카Basilica 식 교회의 형식을 과감히 버리고중앙 돔dome (반구형 지붕이나 천장) 형식을 취한다.
물론 돔 형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판테온Pantheon처럼 형틀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어 굳히고 그 위에 벽돌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4개의 볼트vault(아치에서 발달된 반원형 천장 · 지붕을이루는 곡면 구조체)를 교각처럼 세우고 그 위에 경량 벽돌을 쌓아올린다. 또한 돔을 정사각형의 틀로 받치고, 그들은 아치와 아치의 틈을 메우는 펜던티브pendentive (오목한 삼각형 모양으로 두 벽면의 모서리에서 돔의 기초면에 이어지는 구조가 이어서 받아내며 완성된다.

중앙의 기둥이 없는 높이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돔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내부 공간과 돔 하부에 뚫려 있는 무수한 창으로 빛이들어와 중앙의 돔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돔을 "경탄과 전율이 동시에 이는 역작으로 이 돔은 석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사슬에 매달려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고 표현한다.

전통을 거부한 아버지가 어느 순간 다시 거부해야 할 낡은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모순은 인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갈등이다. 영화에서 극적 재미를 위해 악역으로 설정된 코치는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하고 자유시간을 준다. 언뜻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간식도 못 먹고 여가도 없이 하루 종일 훈련에만 몰입했던 기타는 드라마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외모를 꾸미며 말하자면 세련된 현대인의 일상을 즐기게 된다.

서로 다른 2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듯 고향 마을과 도시의 일상적 경험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기타가 겪는 혼란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전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와 도시가 겪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문화는 낡은 것으로 여겨지고 버려졌다. 
우리가 한옥에서 나와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고 입식생활을 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듯이, 기타는 낡은 인습에서는 해방시켜 주었지만 자신의 유년기를 구속했던 아버지에게서 독립을 꿈꾸며 모래밭에서 아버지를 메친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면서도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코르뷔지에 Le Corbusier를 찾아가 일을 배우던 그는 1954년 인도로돌아와 찬디가르Chandigarh와 아마다바드Ahmadabad 등에서 지어지는 르 코르뷔지에의 프로젝트들을 감독했다. 
1962년부터는 루이스칸Louis Kahn과 협력해 인도경영연구소를 설립하고 10년 이상 함께 일했다. 그는 서양 건축가에게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이 간직한 과거의 기억과 경험했던 자연과 인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경외를 담은 수많은 작업을 했다.

그의 프리츠커상 수상은 무척 많은 의미가 있다. 20세기 현대건축의 문을 연 거장들은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흐릿하지만 건축의 전설 혹은 건축적 도그마로 남아 있는데, 그 바통을 이어주듯 도시가 모더니즘의 정신을 연결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이라는 몸과 인도의 전통 건축이라는 영혼이 적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배합된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의 수상은 굉장히 독특한 문화적·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서구 위주의 현대건축에서 변방 취급을 받던 인도의 건축을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 출신 독일 철학자이며 아이히만과는 동갑(1906년생)이지만 같은 시대를 정반대의 상황 아래서 살아왔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를 스승으로 삼고 철학을 공부했으나 나치의 핍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정착해 연구와 저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잡지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아렌트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음을 강조하는 아이히만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정리한다.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행하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죄는 생각하지 않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는 죄다 
남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죄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죄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최종해결‘과 같은 상투어로 그 추종자들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현실을 단절시켰고, 아이히만과 같은 이들의 현실감각과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자신의 행동이나 언어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멈추면 그것 자체가 죄악인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아렌트는 말의 무능력, 사고의 무능력,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감의 무능력으로 정의했다. 

타인의 고통이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던지는 수많은 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내뱉는 말이 아니라 상투적인 적개심이나 공격성을 아무런 감각 없이 내뱉어대는 말,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도 낯익은 상황이다.

온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든 슬픈 사건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 글이나 특정 지역, 여성, 소수자 등을 겨냥한 근거 없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이트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현재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우

리의 상황과 ‘악의 평범성‘은 너무나도 흡사하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단련된 언어에 대한 무감각한 관성이 현실에서 테러로 이어진 사건은 그것이 단지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치기 어린 장난을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오해와 이해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유대인은 당시 유럽 유대인 인구의 3분의 2인 600여만명이라고 한다. 왜 나치는 그토록 유대인 배척에집착했던 걸까?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침체된 독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했다고도 하고, 
그들이 축적한 자본을 빼앗아 전쟁 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세계 경제위기나 테러의 배경에 유대인이 있다는 음모론이나 예수를 부정한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인 시선이 역사적으로 오래도록 존재했다고 해도, 무모한 대학살로 이어진 것은 인류가 부끄러워해야 할 참담한 역사적 현실임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과와 상관없이 그날의 함성, 숨결, 바람은 생생하게 내기억과 몸에 남아 있었다.
"학교 대표까지 했어? 대단하다! 나는 인라인스케이트랑 스키밖에 안 타 봤는데."
나는 또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에 감명받아 환경 동아리를 만들고 국회의사당 앞에 가서 시위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김나지움에서는 연극 동아리 활동했던 것도 신나서 얘기하다 나혼자만 떠드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내 이야기만 했네. 오빠는 고등학교 다닐 땐 어땠어?"
"음..... 난 공부밖에 한 게 없어서 해 줄 말이 없네. 이런저런활동도 다 생기부 때문에 한 거라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그냥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인생이 다 풀릴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마리오네트 같았던 거지. 마리오네트도 실은 저렇게 생김새가 다 다른데………."
오빠는 한숨을 쉬며 벽에 걸린 마리오네트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봄이만 떠나면 교실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까? 
우리 반 아이들이 봄이에게 보인 적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아이에 대한 부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혹시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불안함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봄이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옥죄는 숨통을 터 주었으리라. 봄이의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게 된 아이들의 상실감은 봄이의 상처 못지않게 검고 깊은 아가리를 벌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다. 더 많이 깨닫는 아이일수록 검고 깊은 아가리가 더 큰 공포로 다가오겠지. 그걸 지켜볼 일도 두려웠다. 아이들보다 20년이나 세상을 더 살았는데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몸인 양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은지의 번호였다. 영준, 소연, 약혼, 배신, 파혼, 그들의 결혼……. 은지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 순서대로 떠올랐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갉아먹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멀게 느껴졌다.

나는 원주토지문화관에 머무는 동안 그 이야기를 장편으로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다시 쓰는 동안 봄이를 괴롭히는 무리로 상정했던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에게 봄이와 같은 비중의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면서 나는 비로소 이야기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생각도 관계도 쿨(cool)한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요즘, ‘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찌 보면 진부하고 칙칙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이 어떤 사실 속에 감추어진 핵(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찾지 않거나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리는 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개인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축적되어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졌을 때 희생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봄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써 가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져 갔던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